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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적벽에 다시」

  • 작성일 2010-01-18
  • 조회수 3,633




적벽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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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

 

 

 

적벽 오고 말았습니다, 물염정 아래 호수의 물은 말라 수면이 여러 겹 물염적벽 아래 떠다닙니다 당신은 흐르는 강물 따라 다녔겠지요 망향정에 와 노루목적벽 마주 보며 흔들리듯 서 있으니 수수만년 전의 당신이 나를 여기 보냈다는 걸 알겠습니다 적벽 와서야 허전한 한 목숨 겨우 이어 붙였다는 느낌은

 

나는 가장 맑은 눈으로 적벽 보려 합니다 물염적벽, 노루목적벽, 망미적벽, 창랑적벽, 이서적벽…… 적벽의 이름들 안타까이 구슬처럼 입안에서 꿰어봅니다 무덤에 업힌 듯 박혀 있는 부서지고 나뒹구는 석탑이 절터임을 말해주지만 호수의 물과 파헤쳐진 대숲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기억을 방해하고 간섭합니다

 

당신도 한동안 적벽의 풍경을 몸 안에서 구하였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느 생에선가 미묘란 무엇이냐 물었더니 당신은, 바람이 물소리를 베갯머리에 실어다 주고 달이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준다* 말했습니다 여러 생을 통과하면서 혹 미묘가 맑아져 표묘가 되기도 하였는지요

 

찬연함이 얇아져 처연함이 되는지 나는 이 시간에 오롯이 놓여 적벽에 쓸쓸히 물어봅니다 내 몸을 입고 나온 어떤 이도 적벽 흐르는 강물 바라보며 미묘와 표묘를 아득한 눈빛으로 중얼거리게 될는지요 수수만년 전 적벽을 보았던 게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생에선가 나는 다시 적벽 와야 하겠지요 흐르는 구름과 적벽에 물드는 단풍을 바라보며 오래 거듭되는 환(幻)의 끝을 물으며 서 있어야겠지요 후생의 어디쯤에서 나는 나를 알 수 있을까요 풍문도 습관도 회환도 아닌 한 사람의 지극한 삶을, 향기와 음악처럼 두루 표묘하여 잡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간결한 한 생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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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물소리를 베갯머리에 실어다 주고 달이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준다” 『벽암록』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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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 조용미 - 1962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했으며,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함. 

출전 / 『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음악/ 최창국

애니메이션 / 박상혁

프로듀서 / 김태형

이 시를 읽으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한 생을 지나서 후생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시간은 얼마나 끝없이 넓고 먼 것인지요. 비록 앞 생의 일은 다 알 수 없을 만큼 어렴풋하지만. 나도 당신도 흐르는 강물 따라 다니는 쓸쓸한 목숨이오니, 내 설령 적벽에 가더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과 그 어느 생에선가 이어 붙여져 있었기에 내가 적벽을 다시 찾아온 것은 당신이 시킨 일인 줄로만 압니다. 당신은 흐르는 구름의 몸을 입고, 물드는 단풍의 몸을 입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사를 거듭합니다.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집배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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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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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적벽에 가본 적 없지만, 역사의 무게로만 알았던 적벽이, 묘함과 윤회의 긴 시간을 지금 나와 동시에 있게 했던 성찰과 사색과 운율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원래 사이버에 글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조 시인의 시적 힘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문태준 선생님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 2010-01-21 00:22:3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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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는 문학과 그리 친하지 않지만…. 이것을 읽으니 울 것만 같아지는군요. 표묘. 아득하고 흐릿하다는 그 뜻은 안개인지, 눈물의 흔들림인지....

    • 2010-01-19 18:09:4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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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적벽가.적벽대전. 아무런 감정을 자아낼수 없는 이름만으로 와닿는절벽. 그 사연의 이야기를 듣으니 적벽이 주체인것보다 객체되어 살아지는 삶. 삶도 의지하는 삶보다는 타인의 영향력에 의해 무늬입히는 사랑...오는 사랑은 마음껏 안을 수 있지만 떠나는 사랑은 적벽을 지나 한 번 지나가는 강물임을.. 깊은 적벽에서 흐느껴 우는 슬픔의 눈물이 수량에 보태어질까요..

    • 2010-01-18 09:19: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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