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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게임을 한다 6 - 스탠리 패러블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1,432

[serialization]



우리는 게임을 한다6

- 스탠리 패러블



염성진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의 정의란 무엇일까? 픽션, 룰, 특정한 목표와 그것의 성취…….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나는 게임을 ‘플레이어’와 ‘플레이’의 결합으로 정리하고 싶다. 게임이 게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속에 행해지는 개입인 ‘플레이’와 ‘플레이’의 주체인 ‘플레이어’가 반드시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다고 혹평을 받는 게임도, 그것이 게임으로 불리는 데에는 이 두 개념의 결합이 또렷이 보인다는 이유가 있다. 이 기초적인 결합을 바탕으로, 게임의 제작자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게임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게임의 목적, 룰,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라나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탠리 패러블의 타이틀 화면



이번에 소개할 게임은 ‘스탠리 패러블’이다. 제목 그대로, 게임은 플레이어가 스탠리를 조종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이 게임을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스탠리 패러블은 엄청난 양의 스포일러를 숨기고 있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 게임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아무 정보 없이 플레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실제로도 게임의 본질을 알고 플레이하게 되면 그 재미는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이 게임을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것이 ‘게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주인공 없이 이 글을 더 끌고나가지 말고, 이제 게임을 살펴보도록 하자.



해피 엔딩?


스탠리는 어느 회사에 고용된 427번 사원으로, 그의 일은 자신의 방에서 키보드 자판의 특정 키를 누르라는 단순한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게임은 어느 날 갑자기 상부로부터 어떠한 명령도 내려오지 않게 된 시점에서 시작하고, 그때부터 플레이어는 스탠리를 조종할 권리를 얻게 되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레이터의 목소리와 함께 회사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계속 마주쳐야 할 첫 번째 선택


나레이터는 플레이어, 혹은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를 들려주듯 말을 한다. 스탠리가 갈림길에 서면 어느 쪽을 선택했다고 단정하듯 말하고, 비밀번호가 있는 문 앞에서는 비밀번호를 말해주면서 스탠리가 알 턱이 없다고도 한다. 다른 게임들처럼 스탠리 패러블 역시 어떤 목표- 어쩌면 회사 탐험 - 가 있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게 게임의 목적이라면 나레이터의 말을 따라 게임을 진행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손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따라 행동하면 스탠리는 아무도 없는 회사를 탐험하고, 사장실의 비밀 문을 발견하며, 그곳에서 회사원들이 정신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스탠리는 정신 조종 기계를 꺼 버리고, 회사의 출구를 빠져나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는 나레이터의 말과 함께 게임이 끝난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했지만 ‘이 엔딩’의 내용은 이게 다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이번 플레이를 통해 게임의 미심쩍은 부분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레이터가 알려준 대로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는 스탠리가 운좋게 비밀번호를 맞추었다는 멘트를 들을 수 있고, 정신 지배 시설은 어째선지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한술 더 떠서 게임의 끝에서 나레이터는 스탠리가 동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떻게 자신은 기계의 영향에서 벗어났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게임이 끝나면 처음 시작할 때의 로딩 화면이 나타나고, 그렇게 게임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다른 선택을 좀 해 봐, 게임이 그렇게 손짓하고 있는 셈이다.



반항하고 싶은걸요


결국 스탠리 패러블은 나레이터의 말을 듣고 플레이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변하는 ‘선택형 게임’의 한 유형처럼 보인다. 정신 지배 기관을 향할 때도 출구라고 쓰여 있는 갈림길이 존재하고, 정신 지배 기계의 전원을 꺼 버리라는 나레이터의 말과 반대로 전원을 켜 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특정한 엔딩이 나타나고, 플레이어는 그런 선택을 한 스탠리에 대해 멋대로 지껄이는 나레이터의 말을 계속 들어야만 한다.



나레이터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다면 나레이터의 말을 한사코 듣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야기를 전달하듯 명령을 내리는 나레이터의 말을 계속 거부하면, 그는 곧 스탠리가 잘리지 않은 게 이상하다며 비난하다가 곧 그에게 직접 말을 걸기 시작한다. 자신은 스탠리의 적이 아니며, 이 이야기가 모두 스탠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혼자 결정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이어서 뜬금없이 지금껏 어떤 정보도 없던 아내를 구하라면서, 전화를 받으라고 지시한다. 전화를 받으면 아내가 기다리는 방이 나타나는데, 그 속에는 마네킹이 하나 놓여있을 뿐이었으며 나레이터는 속아버린 스탠리를 조롱한다. 427이라고 번호가 쓰여 있는 그 방에서 나레이터는 스탠리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며 장황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 사이사이에 일상생활을 하려면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라는 자막이 나오고, 해당 키를 누를 때마다 방 안의 가구들이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사무실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다시 한 번 스탠리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해야만 한다며, ‘죽으세요.’라는 자막이 나오며 게임이 리셋된다.


이 엔딩은 나레이터에게 또다시 ‘당해버린’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화를 받기 전, 리프트를 타고 가는 길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선택지 또한 존재한다. 나레이터는 스탠리가 이야기를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자살을 선택했다며 잘 했다고 칭찬해준다. 그리고 다시 또 리셋. 이 선택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게임을 그냥 꺼 버리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나레이터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를 당황시키고 게임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 위해서는, 순순히 전화가 있는 방까지 진행한 뒤 전화선을 뽑아버리면 된다.



나 스탠리 아니다


전화선을 뽑으면 나레이터는 당황한다. 그런 선택은 해선 안됐다고. 대본을 뒤지듯 종이 넘기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말을 따르면 스탠리가 아내를 맞이하며 흰색 화면에서 크레딧이 나오고 엔딩을 맞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어 당신이 어떻게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묻다가 그는 주인공이 ‘스탠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이때부터 나레이터는 스탠리를 스탠리라고 부르지 않으며, 이런 선택을 한 주인공에게 현실 세계의 올바른 의사결정 과정을 교육하겠다며 선택에 관한 교육용 비디오를 보여 준다. 비디오가 끝나면 전화가 있던 방은 ‘이야기의 모순’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고, 나레이터는 이곳이 현실을 다루기에 부족하다며, 이야기의 모순이 더 심해지기 전에 플레이어를 집으로 보내주겠다며 돌아가는 길을 이끈다. 리프트 역시 플레이어의 선택이 의미가 있으니 뛰어내려 죽게 할 수 없다며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첫 번째 갈림길로 돌아가면 나레이터는 ‘스탠리가 할 법한 일들을 그대로 하라’며 헛기침을 하고 처음처럼 왼쪽 길로 들어가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도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오른쪽 문으로 가면, 복도의 공간이 망가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의도했던’ 왼쪽 길에 있는 회의실도 엉망이 되어 있고, 나레이터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망쳐버렸다며 절규한다.



‘이야기의 모순’


회사, 즉 게임 공간은 결국 뒤틀려버렸고, 화면이 암전되며 다시 두 개의 문이 있는 갈림길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오른쪽 문을 선택해도 게임이 다시 갈림길로 시간이 되돌아가서, 무조건 왼쪽 길을 선택해야 한다. 회의실도 멀쩡해 보이고, 사장실에 올라가는 길 또한 내려가는 계단이 사라졌을 뿐 그대로다. 그러나 사장실에서 나레이터는 비밀번호가 아니라 음성인식 암호를 스탠리가 알고 있다며, 마이크에 대고 그것을 말하라고 한다. 그의 요청을 무시하면 마침내 나레이터는 이곳에 왜 왔냐며 폭발하고 화면이 넘어간다.



나레이터의 분노와 엔딩


두 개의 문이 있는 공간 밖에서 플레이어는 스탠리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레이터는 여전히 스탠리가 왼쪽 문으로 들어갔다고 하지만, 어쩐지 그 안의 스탠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레이터는 그런 스탠리가 이야기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며 선택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레이터는 스탠리가 선택할 때까지 자신은 기다릴 것이라고 하며 게임이 리셋된다.


플레이어가 스탠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람이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나레이터의 반응은 흥미롭다. 게임의 뒤틀림을 망쳐졌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게임의 제작자와 동일시되는 어떤 인물이 아닌 ‘NPC(Non Playable Character)'인 것을 알 수 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선택을 하면 결과가 뒤따르는데, 이번에는 나레이터가 예기치 못한 선택이 게임을 뒤틀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고자 하는 NPC인 나레이터에게 게임의 뒤틀림을 보여줌으로써 스탠리 패러블이 ‘나레이터’와 ‘스탠리’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선택’은 앞서 이야기한 ‘플레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것을 선택한다’는 것 외에 ‘선택하지 않는다’ 역시 하나의 선택으로 ‘플레이’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선택으로 게임을 진행시켜달라는 마지막 나레이터의 말 역시 이 엔딩의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엔딩의 목적은 ‘게임 뒤틀기’에 있는 것이다.



절대자를 만나다


스탭롤이 나왔기 때문에 이 엔딩이 ‘진짜 엔딩’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다른 선택지들 역시 매력적인 게임의 모습들을 보여 준다. 정신 지배 기관의 입구에서 출구라고 쓰여 있는 샛길을 택하면 나레이터가 잔인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실제로 스탠리는 압축 프레스기에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나레이터는 그가 인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며 비꼰다. 그러나 돌연 여자 목소리의 나레이터가 이야기를 이어가며 스탠리는 죽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게임을 재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길이 미리 정해져있다면 죽음도 삶도 의미가 없다는 말까지 하는 그녀는 이것이 엔딩이 정해진 게임임을 알고 있는 듯하다.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뒤 나타난 장소는 박물관처럼 게임 속 여러 요소들을 전시해 둔 곳이고, 플레이어는 여기서 게임의 개발 단계에서 사라진 요소들이나 게임 속에 등장하는 스탠리의 사무실, 회사 구조, 컴퓨터 등 게임과 관련된 정보들을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나레이터의 의자와 게임에 등장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까지도 들어볼 수 있다. 그 출구에서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망가뜨리고 지배하고 싶어하고,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게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나레이터와 스탠리(플레이어)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린다. 이어서 그녀가 ‘서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보이냐’는 말까지 하기 때문이다. 출구에는 스탠리 패러블의 제목과 전원 스위치가 있고, 그것을 끄면 다시 압축 프레스기가 나타난다. 그녀는 둘이 죽기 전에 프로그램을 꺼 버려서 그들을 살리는 것이 게임을 깨는 방법이라고 말하며, 다가오는 프레스기에 시간이 선택을 해 버리게 두지 말라고 재촉한다. 게임을 끄면 그것은 다시 ‘리셋’이 되며, 끄지 않으면 스탠리, 또 어쩌면 나레이터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는 리셋 화면이 나타나지 않고 까만 화면에 정적만이 흐른다.



우리는 게임을 한다


짧은 묘사만으로 게임을 소개하는 것은, 더군다나 다양한 선택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탠리 패러블은 이런 게임이다. 말하지 못한 엔딩 역시 많다. 플레이어의 선택은 나레이터의 말로 ‘미완성된’ 게임 구역을 보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게임 - 말 그대로, 마인크래프트 등 다른 게임이 등장한다 - 을 해보기도 하며, 미로 같은 회사에서 헤매다 미쳐버리는 스탠리를 보게 되기도 하고, 신비로운 우주 공간을 보며 죽음을 맞기도 한다. 게임 개발자가 자신의 게임에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을 이스터 에그라고 하는데, 스탠리 패러블은 이스터 에그와 엔딩의 구분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해볼 수 있는 것들에는 모두 제작자의 의도와 손길이 닿아 있다고나 할까. 게임을 뜯어고치는 치트를 사용해도 그것에 나레이터가 반응한다고 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스탠리 패러블은 이런 방식으로 게임의 정의와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풀어놓았다.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게임 내부에 스스로가 조작하는 어떤 것과 동화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존재이기에 구분하기 쉽지 않은데, 시종일관 플레이어를 괴롭히던 나레이터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 가능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플레이’의 개념 역시 게임 안에선 ‘선택’으로 나타났다. 과감히 다시 요약해보자면, 스탠리 패러블은 ‘나레이터와의 싸움’이 아닐까.


또한 스탠리 패러블은 게임의 목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생각을 내게 남겨주었다. 플레이어는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은 게임의 클리어 목표에 당황스러워하다가, 이내 게임의 모든 선택지를 확인한다는, 그러니까 게임의 내부를 샅샅이 뒤져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다. 게임을 모두 들여다보는 것이 클리어의 목표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내부에서의 목표에 밀려 보통 잊게 되는 ‘게임을 할 거야’라는 플레이어 본래의 목표가 게임 내부의 것과 일치하게 됨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게임플레이 자체보다는 게임을 클리어하는 목표의 달성에서 재미를 얻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로딩 화면 - The End Is Never The End



어쩌면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진 게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내게 주는 충격은 꽤나 컸다. 게임의 끝에는 늘 리셋이 반복되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그 힘이 나를 중간에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까. ‘해피 엔딩’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 게임을 진행하는데도 나는 ‘플레이어의 의지’와 비슷한 것이 작용함을 느꼈다. 스탠리로서 죽고, 죽고, 또 죽고 발견하는 것들. 이런 신선한 매력 역시 게임의 재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재미있는 게임은 지천에 널려있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작가소개 / 염성진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국어국문학과
글을 쓰고 싶고, 음악을 하고 싶고, 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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