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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랩소디 인 베를린」 중에서

  • 작성일 2010-07-01
  • 조회수 4,143




구효서, 「랩소디 인 베를린」 중에서





하나코는 그 앞에 얼어붙었다.
격정을 삼킨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울대가 몇 차례나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세월이 가면, 누구도 김상호라는 사람의 무덤이란 사실을 알 수 없게 돼 있었다. 알기를 바라지 않았던 걸까. 오직 하나코만 알길 바랐던 걸까. 하나코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기를, 하나코가 찾지 않는다면 침묵을 안고 끝내 침묵 속으로 사라지기를.
하나코의 격정이 쉬 가라앉지 않은 이유였다. 묘석의 숫자는 40년 세월의 아픔과 외로움, 사랑과 이별의 진실, 그리움과 낙망의 숫자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작고 수수한 대리석에 적힌, 단순 기호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나코의 격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나무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졌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조용히 뒤돌아서서 폴더를 열었다.
에밀리였다. 격앙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과거 신상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그녀는 경황이 없어 보였다. 뭔가를 알게 된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알 수 없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든 사실은 달라질 수 없었다.
(……)
이렇게 아프게 하고 가버리면 어떡하냐고, 에밀리는 말했다. 나는 말했다. 누구나 아프다.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가를 따진다는 건 의미없는 일인 것 같다고.
에밀리의 아픔은 에밀리 자신이 초래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폴더를 닫았다. 아픔이란 그런 거였다. 김상호에게도 하나코에게도, 빌헬름에게도.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코에게 다가가, 내가 말했다.
“겐타로는 평생을 하나코에게 가닿고자 했던 게 아니에요. 하나코를 찾았던 게 아니라,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세상의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찾고 향한다는 의미는 그런 거였어요. 언제까지고 기다린다는 것. 이렇게 외로이 한 사람만을.”




작가 : 구효서 - 1957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으며,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마디」가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시계가 걸렸던 자리』 등과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 『남자의 서쪽』『나가사키 파파』 등이 있음.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 : 이재인 - 배우. '관객모독' '맥베드' 등 출연.
출전 : 『랩소디 인 베를린』(문학 에디션 뿔)
음악 : 박세준
애니메이션 : 송승리
프로듀서 : 김태형




아파트 복도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낯선 할머니를 보았어요. 인사를 드리자 할머니의 말이 봇둑 터진 듯 흘러나왔어요. 96세, 아직도 마음은 어리다는 할머니의 내력을 듣고 돌아오는 길, 앞산의 초록은 무심히 짙었어요. 무심코 스치는 사람들은 저마다 얼마나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걸까요. 그날, 먼셀 색상표의 숫자만 남은 묘비가 나오는 이 소설을 읽었어요.
유민이 되어버린 한 음악가가 평생 가 닿고자 했던 곳, 하나코. 40년 전 말없이 떠난 연인의 짧은 유언이 하나코를 독일로 이끕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겹치는 이야기들, 고문과 학살을 ‘다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 남북한과 일본과 독일, 현대와 중세를 넘나드는 인물을 좇는 동안, 끊임없이 바로크 음악이 들려오는 듯했어요. 작고한 재독 음악가의 난해한 선율이 그 장중함 사이로 불쑥 솟아오르기도 했고요.

문학집배원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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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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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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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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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구효서씨의 소설은 항상 가슴이 먹먹하네요. 그 먹먹함이 참 좋습니다. 랩소디 인 베를린잘 읽었습니다.

    • 2010-11-05 02:02: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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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집배원님의 글을 읽으니,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네요. 소설의 일부분의 글이라 그 속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감정만은 잔잔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 2010-07-31 09:16:2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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