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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반죽의 형상」

  • 작성일 2008-01-17
  • 조회수 5,266



권여선「반죽의 형상」

 

  N에게 말은 안했지만,
  올해에도 나는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휴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결투에는 상대를 몇대 패주겠다거나 보상금 몇푼 받아내겠다는 식의 유치한 계산 찌꺼기가 없다. 나를 모욕한 자를 죽이거나 모욕당한 나 스스로 죽는 것만큼 모욕을 완전연소시키는 방식이 또 있을까. 모욕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칼이 둘 중 하나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모욕관계를 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휴가 또한 과거의 모욕에 대한 뒤늦은 결투신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날 아침 문득 골똘해져 수십년 전 어떤 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행위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발견하고 불현듯 떨치고 일어나 결투의 편지를 써 보내는 늙은 신사처럼 내 결투신청에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목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모욕이 즉각 교환되지 못하고 시간의 회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수도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이다. 결투란 모욕이 가해진 싯점이 아니라 모욕을 느낀 싯점에서 신청되는 것이다.

 

 

● 출전 :『분홍 리본의 시절』, 창비 2007 

 

● 작가 - 권여선 : 196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96년 장편소설『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푸르른 틈새』『처녀치마』『분홍 리본의 시절』등이 있으며,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서은경 : 배우. 연극 <관객모독> <냉정과 열정사이> <강철> <친정엄마> 등에 출연.

 

문장 하나하나에 ‘통찰의 형상’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그럴 수 있지요.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맞지요? 모욕의 완전연소가 결투다, 이 역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대목입니다. 제게 가장 실감이 가는 부분은 결투의 편지를 써 보내는 늙은 신사에서 ‘늙은’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면서 우스꽝스럽지만 약간은 슬프게도 느껴집니다.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라는 말은 일상에 유용한 잠언 같기도 합니다.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통찰의 말들이 일제히 빠르고 힘 있게 달려가는 듯한,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군요.
 
2008. 1. 17.  문학집배원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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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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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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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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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여자분 목소리와 문장이 너무 잘어울려요. 잘 듣고 갑니다.

    • 2008-01-17 20:13: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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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배경음악이 멋지네요. 음원???궁금합니다.

    • 2008-01-17 11:36:0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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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으로의 휴가결투로 미화된 휴가로 치유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많고 유치한 공간이 아닐까요매일같이 모욕당하는 샐러리맨에게는 다소 비현실적 해결책이며오히려 보다 자신에게 천착하여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커뮤니케이션 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

    • 2008-01-17 07:24: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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