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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천재토끼 차상문」 중에서

  • 작성일 2010-03-11
  • 조회수 4,433




김남일, 「천재토끼 차상문」 중에서
 
 
 
 
디지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그것은 0과 1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0과 1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집과 회사의 유리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빌 게이츠가 만든 운영체제 MS 윈도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고 해석한다. 그렇게 새 세상을 연 디지털의 천재들은 0과 1의 비트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데 굳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런가, 정말? 그들이 0과 1의 2진법만으로 만유를 다 옮겨 담을 수 있을까. 가령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시도 때도 없이 짙은 그리움을 향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는 북조선 토끼 신애란과의 추억 같은 것은? 천만에! 차상문은 설사 0과 1이 제아무리 근사하게 그 추억을 합성해 낸다고 하더라도, 단연코 거부하리라 마음먹었다. 도대체 빈틈 하나 없이 꽉꽉 채워진 '뽀샵' 같은 추억을 어찌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나아가 어머니는?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가 끌고 온 저 끔찍한 세월을, 색채도 질량도 냄새도 부피도 없고, 마침내는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없는 0과 1로 어찌 조립해낼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또 흐르면서 관계기관대책회의도 해체되고, 저 장엄하다는 전쟁에 대해 기억하는 이들마저 거의 없어졌다. 전국 경찰서며 치안지구대마다 붙어 있던 토끼 수배 전단은 벌써 몇 번이나 살인, 살인미수, 강도, 특수강도, 절도, 강간, 유괴, 사기, 공갈, 횡령 등 새로운 범죄 용의자들의 수배 전단으로 대치되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지구의 미래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일 101가지’ 패러디도 시들해졌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섹스를 하지 말지어니, 자기가 하고 싶어도 남에게 베풀지 마시라. 마음이 있지 않으면 봐도 보이지 않는 법, 그래도 정히 하고 싶으면 스스로 위무할 사.)
 
패러디는 패러디일 뿐, 관광지에서 산 효자손처럼 현실의 가려운 부분을 재미삼아 한번 긁어 주는 게 다였다. 누리꾼들이 전쟁의 홍보를 위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게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만 힘을 쓴 것 또한 사실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영 맥을 못 추는 드라큘라 백작이나 좀비처럼.
  
작가 / 김남일 - 195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청년일기』『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천하무적』『세상의 어떤 아침』『산을 내려가는 법』 등이 있음. 제1회 전태일문학상(보고문학 부문), 제2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함.
 
낭독 / 김상석 - 배우. 연극 '햄릿', 영화 '아스라이' 등 출연.
출전 /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
음악 / 권재욱
애니메이션 / 황선숙
프로듀서 / 김태형

 

 

이 소설은 유나바머라는 살인자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요. 열일곱 살에 하버드에 입학한 수학 천재, 버클리 대학에서 최연소 종신교수가 되었으나 사임한 뒤 숲속으로 은둔했다가 홀로 산업 문명 전체를 상대로 한 ‘전쟁’을 전개하는 인물. 이 소설에서는 그를 대신해서 토끼가 외치네요. 육식이든 초식이든 생명을 섭취해야만 존재가 유지되는 인간들! 숨 쉴 때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인간들! 속도만으로 모자라 가속도에 몸을 맡긴 인간들! 그러고도 꾸역꾸역 종의 번식을 시도하는 인간들! “토끼 볼 면목이 없다. 어쩌랴,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인 것을!”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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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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