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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꽃피는 고래」

  • 작성일 2008-11-20
  • 조회수 4,549



 

「꽃피는 고래」 김형경

 

 

세로 액자는 가로 액자 중 고래가 집중된 왼쪽 사분의 일 부분을 따로 확대해서 만든 것이었다. 폭 2미터 길이 5미터쯤 되는 크기였다. 그 액자 속 고래들은 모두 위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있었는데 아마도 무리지어 헤엄치는 광경을 그린 듯했다. 큰 고래 안에 작은 고래가 그려진 그림은 새끼 밴 어미고래를 묘사한 듯했다. 몸 안에 작살이 그려진 고래는 작살을 맞은 듯했고, 고래 몸통 위로 무수히 작은 선이 그려진 고래는 물뿜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포경조합에서 저기 가끔 놀러갔었다. 니은이 할아버지도 함께 갔지. 그때 니 애비는 지금 너보다 어렸고.”

 

내가 액자 그림을 오래 올려다보고 있은 모양이었다. 장포수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계속 궁금해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바위그림이 왜 중요해요?”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또 가만히 있었다.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난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나은지, 기억하는 게 좋은지.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여전히 할아버지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다른 방식으로 물어보았다. 기억하는 일이 힘들고 따가워도 기억해야 하는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오래 고개를 끄덕이면서 할아버지가 기증한 물건들이 전시된 방을 바라보았다.

 

“나도 기억하는 방법을 몰라서 저 물건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내 인생을 낡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만든 셈이지. 잘 떠나보내고서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걸.”

 

잘 떠나보낸 뒤 기억하기.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입 안에서 반복했다. 아주 어릴 때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던 적이 있었다. 쓰레기폐기장처럼 어딘가에 우리가 사용하고 버린 시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시간 들이 흘러가 쌓이는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의 고래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 쌓이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것 같았다. 기억도 시간도 바위그림처럼 하면 될 것이다.

  

● 출처 :『꽃피는 고래』, 창비 2008 (235-237)

 

 

 

● 김형경- 196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83년 『0문예중앙』에 시가, 1985년 『문학사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 소설 『담배 피우는 여자』『세월』『외출』 등이 있음.

 

● 낭독- 김세동 : 배우. 연극『비닐하우스』『날 보러와요』『자객열전』 등에 출연.
장희재 : 배우. 연극『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드림스튜디오』『아홉개의 모래시계』 등에 출연.

 

● 음악 : 한창욱

 

몽골에 여행을 가서 본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수천 년 전에 죽었던 공룡들의 화석을 본 일이었어요!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에 달하는! 그 뼈들이 한데 모여서 쌓여 있었지요! 그 느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답니다. 한 번도 공룡의 사생활에 대해서 궁금한 적이 없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호기심이 일었어요. 이 공룡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을까? 왜 여기 다 모여서 죽은 것일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공룡들의 뼈가 한 곳에서 발견됐다면 아마도 그건 시간 때문이겠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의 시간들.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 중에서 어떤 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걸까요?

 

2008. 11. 20.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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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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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니은'의 음성이 정말 이럴 듯...^^ 잔잔한 음악과 오랜만에 참 좋아요.

    • 2009-11-26 15:39: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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