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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틱 엔딩

  • 작성일 2018-02-01
  • 조회수 1,799

[단편소설]



애틀랜틱 엔딩
Atlantic Ending



문지혁




1


박은 성의 외벽처럼 도박장을 둘러싸고 있는 슬롯머신을 지나 테이블 게임 사이로 들어섰다. 블랙잭, 룰렛, 바카라, 포커. 유니폼을 입은 딜러들이 테이블마다 기둥처럼 서 있었고 수영복 모양의 검은 의상을 입은 버니 걸 몇이 윙크를 하며 지나갔다. 박은 머뭇거리지 않고 카지노 끝에 있는 보가타 호텔 프런트를 향해 걸었다. 코끝에서 카지노 특유의 냄새가 맴돌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금속성의 기계들이 내뿜는 열기, 사람들의 땀 냄새와 체취, 미처 다 환기되지 못한 담배 연기가 섞인 기묘한 냄새. 일확천금을 꿈꾸는, 혹은 파국을 앞둔 인간들의 운명에 어울리는 전주. 박은 그게 좋았다.
도착한 프런트에서 그는 체크인 대신 매니저를 호출했다. 잠시 후 안쪽 사무실 문이 열리고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매니저 라이언이 나타났다. 그는 멀리서부터 박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웰컴, 미스터 팍.”
라이언은 박을 최상층에 위치한 코너 스위트룸으로 안내했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번에는 며칠이나 묵을 예정이냐고 그가 묻자, 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주일쯤, 이라고 답했다. 차량이나 헬기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박은 고개를 저었다. 스위트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그에게 박은 평소처럼 백 불짜리를 접어 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라이언은 필요하면 언제든 자신을 찾으라는 말과 함께 윙크를 남기고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박은 혼자 앉기엔 너무 넓은 초록색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들고 있던 서류가방이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가벼운 두통이 있어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박은 재킷 안쪽에서 힙 플라스크를 꺼내 위스키를 한입 가득 머금고는, 입을 헹구듯 천천히 양쪽으로 움직이다 넘겼다. 혀끝에서부터 목을 거쳐 명치에 이르기까지 뜨끈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한숨 같은 낮은 신음이 흐르자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박은 스트레칭 하듯 위아래로 몸을 쭉 폈다. 그러자 발끝에 뭔가 걸렸다. 가방에서 삐져나온 총이었다.


둘을 쏴 죽인 건 오늘 새벽이었다. 
닫혀 있는 <큰기와집> 문을 따고 들어가니 평소 휴게실로 쓰는 안쪽 방에서 희미한 빛과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박은 숨을 낮추고 테이블과 의자 사이를 지나 조심스레 방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신음소리가 선명해졌다.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장갑 낀 손으로 가방 속에서 총을 꺼내든 뒤에는 사격장에서 하던 버릇대로 뜻 모를 기도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자 널려 있는 옷가지 사이로 일을 치르고 있는 남녀가 보였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가 덜덜 떨릴 줄 알았는데, 막상 짐작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뒤엉켜 있는 강과 아내를 보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박은 소음기 달린 권총으로 한 사람당 정확히 두 발씩을 번갈아 쐈다. 강의 마지막 말은 형님, 이었고 아내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박은 눈앞에 놓인, 불과 일 분 전까지만 해도 활달히 움직이던 따뜻한 시체 두 구를 내려다보았다. 살인 이후의 첫 번째 감정은 난감하게도 난감함 그 자체였다. 사격장에서는 총을 쏘고도 시체를 치울 필요가 없었다. 박은 누군가에게 살인이란 원래 이런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가 이들의 죽음을 의도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그가 원하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이를테면 그는 그들의 죽음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볼품없이 추하게 축 늘어져 있는 육신을 그들 눈으로 보게 하고 싶었다. 봤지? 저게 너희야.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였고,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혼자라고 느꼈다. 
피범벅이 된 침대 위에서 박은 시체를 하나씩 끌어냈다. 앞치마와 고무장갑 차림으로 식재료를 담는 커다란 방수포대에 강과 아내를 하나씩 넣어 묶은 다음 카트에 실어 주방으로 옮겼다. 아내는 그럭저럭 들어갔지만 몸집이 큰 강은 거의 구겨 넣다시피 했다. 연쇄살인마들이 사람을 토막 내는 이유를 박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피자처럼 여덟 쪽일 필요도 없었다. 누가 그냥 반으로만 잘라 줘도 고마울 것 같았다.
마침내 고기 핏물을 빼던 곳에 덩그러니 놓인 파란 포대 두 개를 바라보며 박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등 뒤로 몇 줄기 땀이 흘렀다. 그들의 마지막 말이 더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는 상상했다. 형님, 그게 아니고…… 강은 변명을 시작했겠지. 분명 장황한 궤변이었을 것이므로 듣지 않길 잘했다. 아내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을까. 짐작할 수 없었다. 아내는 늘 짐작과 다른 말을 했으니까.
한참 쉬고 난 뒤 박은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멀찍이 세워 놨던 차를 가게 뒤편으로 옮긴 다음 트렁크를 열었다. 새벽녘에 식자재를 받을 때마다 하던 일이라 낯설지 않았다. 야채 트럭 대신 벤틀리라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포대를 가지러 뒷문으로 들어가며 박은 차를 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그가 뉴저지에 세 번째 식당 <백기와집>을 오픈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에게는 뉴욕과 뉴저지 근방에서 몰려들 수많은 손님에게 이민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말없이 웅변해 줄 물건이 필요했다. 통유리로 훤히 내다보이는 주차장 한쪽에 무심한 듯 세워져 있는 벤틀리만큼 그 용도에 어울리는 차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박은 맨해튼 서쪽, 웨스트 27번 스트리트와 11번 애비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벤틀리 매장에 가서 차를 골랐다. 당장 출고가 가능한 차는 남색 콘티넨털 모델뿐이라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박을 상대하던 딜러 이름은 마이크였는데, 그는 정말로 마이크 타이슨을 닮은 흑인이었다. 근육질이라 양복 입은 태가 영 어색한 마이크는 차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말이 끝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박은 그 과정이 다소 지루하고 형식적이라고 느껴져서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모든 소개를 마친 마이크가 차 뒤쪽으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더니, 텅 빈 공간을 가리키며 또 한 번 엄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투 데드 바디즈.
마이크의 말대로 트렁크엔 시체 두 구가 넉넉히 들어갔다. 박은 트렁크를 닫은 뒤 마지막으로 가게에 다시 들어가 바닥에 물을 뿌려 꼼꼼히 피를 닦아내고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안쪽 방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장 부부가 쓰던 방이니 쉽게 열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발각될 테지만 시기를 늦추고 단서를 줄여서 나쁠 건 없다. 가장 성실한 직원이 출근할 즈음 그는 이미 애틀랜틱시티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박은 발밑 가방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묵직한 금속 덩어리에는 아직도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방아쇠에 손을 넣었다 뺐다 몇 번 반복하다가 커피 테이블 위의 꽃병을 조준해 보았다. 검지를 당기기만 하면 꽃병은 산산조각날 것이고, 그는 쉽게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박은 총을 돌려 총구를 입에 물었다. 마지막 한 발은 자신을 위해 남겨 둔 거였다. 그 상태로 박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플랜 A는 대서양 어딘가에 시체를 유기하고 남부로 계속 내려가 멕시코 국경을 넘는 거였지만, 손에 들고 있는 현금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용케 국경을 넘는다 해도 그다음엔 뾰족한 답이 없었다. 벤틀리를 타고 다니다가 멕시코 갱들의 표적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플랜 B는 일단 애틀랜틱시티까지 내려와서 시체와 함께 차를 버려두고 교통수단을 바꿔 가며 도주하는 거였다. 몸과 마음이 무척 고되긴 하겠지만 현금만 사용해서 도주한다면 LA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중간쯤에 캔자스나 미주리 같은 중서부 시골 어디쯤에 숨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그가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는 것이고 또 이제 돈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따라서 플랜 C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 모든 일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었다. 스스로 만든 문제에 스스로 줄 수 있는 유일한 답. 자살.
아직 박은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줄어들고 있는 시간의 총량은 누구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몇 달이나 몇 주, 일주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 하루일 수도 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는 자신의 기분이 언짢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은 소파 위에 총을 던져 놓고 일어섰다.


2


카지노로 내려간 박은 사람이 가장 적은 블랙잭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라틴계 사내가 떠나자 곧 그는 딜러와 둘만 남았다. 무표정하게 게임을 진행하는 동양계 여자 딜러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박은 나이 든 동양 여자는 어디서나 비슷해 보이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 앉아 블랙잭을 하는 동안 박의 승률은 오십 퍼센트 정도였다. 삼백 불을 놓고 돈을 다 잃으면 일어나려 했는데 의외로 본전이 줄어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별다른 의욕이나 욕심 없이 게임을 하니 오히려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중간에 한두 사람이 끼어서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딜러의 기계적인 영어에는 약간의 억양이 섞여 있었는데,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박은 딜러가 한국 여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명찰에 적힌 ‘KIM’이라는 성이 그 확신을 도왔다.
“딜러 교체 전 마지막 게임입니다.”
딜러가 자신의 퇴근과 맞바꿀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박은 가진 칩의 절반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끝을 뒤집어 두 장의 카드를 확인했다. 스페이드와 킹. 몇 년 만에 받아 보는 패였다. 
“블랙잭.”
박이 카드를 뒤집으며 말했다. 딜러는 말없이 테이블 중앙에 쌓인 칩을 모아 그에게 밀었다. 박은 싱거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칩을 쓸어 모으며 그가 한국어로 말했다.
“한국사람?”
딜러는 카드를 정리하다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근무 중 잡담은 금지입니다.”
그녀는 영어로 답했다.
“그래요. 수고하쇼.”
박은 한국어로 인사한 다음, 칩을 챙겨 자리를 떴다. 캐시 아웃 하는 창구에서 칩을 현금으로 바꾸자 사백오십 불이었다. 놀던 버릇 때문인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근처에서 룰렛을 몇 번 하다가 나중엔 구석의 슬롯머신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오십 센트짜리 기계에 앉아 백 불을 넣으니 크레딧이 이백 개나 생겼고, 그러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생명을 연장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임을 시작하려는데 화면 오른쪽 아래 붙어 있는 십자가 모양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누가 간절한 마음으로 붙이고 간 모양이었다. 레버를 당기면서 박은 피식 웃었다.
그때 슬롯머신 뒤로 아까의 그 딜러가 지나갔다. 소지품을 들고 가는 걸 보니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듯했다. 이민자들은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 간다고 박은 생각했다. 짧은 파마머리, 안경, 주름, 억양. 딜러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시선을 슬롯머신으로 돌려 버튼을 누르려는데, 십자가 스티커를 보는 순간 어떤 얼굴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우리 주님이 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겁니다.
김 사장이라는 사내의 마지막 말을 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십 년 전 박이 처음으로 맨해튼에 식당을 살 때였다. 음식점 전 주인이었던 김 사장은 확고해 보이는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박중독자였다. 동부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리는 애틀랜틱시티, 그중에서도 김 사장은 타지마할이라는 호텔 카지노의 VVIP였다. 그가 호텔에 전화를 걸면 헬기를 보내준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패가 돌기 전이면 기도를 하고, 돈을 따면 그 돈의 반 이상을 헌금하는 김 사장의 기행은 교민사회에서도 화제였다. 그러나 그가 믿는 주님이 그를 버린 것인지, 아니면 진정 그를 사랑하여 도박중독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부터 사업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했던 그의 두 자아, 신앙인과 도박중독자 사이의 균형도 깨졌다. 놀랍게도 김 사장은 사업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애틀랜틱시티로 내려가 도박에 매달렸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카드를 뒤집고 룰렛을 돌리고 슬롯머신을 당겼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쌓아올린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맨해튼과 뉴저지에 걸쳐 그가 운영하던 여러 개의 식당과 점포들이 급매로 시장에 나오자 한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 다투어 달라붙었다. 박도 그중 하나였고, 결국 맨해튼 한인 타운에 있던 알짜배기 가게를 사는 데 성공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 김 사장은 아내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계약에 대한 말보다 자신의 주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를 시련에 빠뜨렸고 또 앞으로 구원해 줄 계획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박은 김 사장의 얘기를 적당히 흘려들으면서도 동행한 그의 아내를 유심히 살폈다. 김 사장이 가진 구원과 부활의 확신은 적어도 그의 아내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계약이 마무리될 무렵 박이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김 사장의 신앙고백보다 박은 그게 더 궁금했다. 이제까지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 놓던 김 사장이 잠시 머뭇거렸다. 뭐, 그게…… 일단 살길을 찾아봐야죠. 지금 생각 같아서는 사자 굴로 들어간 다니엘처럼 다시 애틀랜틱시티로 내려가서 딜러 일을 할까 싶습니다. 우리 주님이 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겁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때까지 이 가게를 잘 맡아 주십시오. 음식점 앞에서 박은 김 사장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김 사장의 아내는 묵례를 하고 멀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축축해진 손을 닦았다. 불쾌하고 뜨끈한 습기가 김 사장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슬롯머신을 계속하면서도 박은 딜러 여인이 들어간 직원 전용 문을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나타났다. 박은 남아 있는 돈을 캐시 아웃 하고는 일어서서 그녀를 좇았다. 여자는 천천히 카지노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가장자리의 중국식 국숫집 앞에 멈춰 섰다. 박은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며 서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는 척했다. 곧 그녀가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고 그도 뒤따랐다. 그녀는 맨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 사장 사모님, 맞죠?”
박은 그녀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자는 잠시 눈을 치켜떴다가 금세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박 사장님.”
“날 기억합니까?”
“잊을 리가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이 입을 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낯이 익더라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면서 긴가민가했지 뭐요. 김 사장 잘 지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모님을 이렇게 험한 곳에서…….”
“죽었어요.”
여자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박은 말문이 막혔다.
“먼저 주문하세요.”
여자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3


국수를 하나씩 시켜 놓고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했다. 박은 자신 앞에서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면발을 입속에 넣고 있는 여인을 이따금 바라보았다. 딜러로 일하겠다던 그는 어디 가고 아내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까. 김 사장은 왜 죽었을까. 하지만 박은 이내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그러자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나도 곧 김 사장처럼 될 것인가. 언제. 어떻게.
“얼마나 된 겁니까? 여기서 일한 지.”
그 질문을 지워버리려고 박은 입을 열었다. 면을 다 먹은 여자는 그릇을 통째로 들고 국물을 마셨다.
“십 년쯤 됐죠.”
“왜 못 봤지? 보가타에 자주 왔는데.”
“이 호텔로 옮긴 지는 몇 달 안 됐으니까.”
“그전에는?”
“타지마할이죠.”
김 사장의 몰락 이후 뉴욕 한인들은 그곳을 ‘따지마할’이라 불렀다. 대대로 그 호텔에서 패가망신한 한인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긴 했지만, 김 사장처럼 멀쩡한 교회 장로가 새로운 전설의 주인공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어쩌면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은 현실이 됐고,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박은 김 사장의 가게를 인수한 뒤론 타지마할에 가지 않았다. 꺼림칙하기도 했고 혹시나 마주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게가 안정 궤도에 들어서기까지는 실제로 그럴 여유도 없었다. 주말에 애틀랜틱시티에 내려오기 시작한 건 사업이 자리를 잡고 손에 돈이 조금씩 쥐어질 무렵부터였다. 목적지는 새로 지은 보가타 호텔이었다.
“최근에 간 겁니까, 김 사장은?”
여자가 소리를 내어 트림했다.
“아뇨. 내려오자마자.”
“전혀 몰랐는데.”
“안 알렸어요. 알릴 수도 없었고. 미국 건너와서 이십 년 동안 겨우 만들어 놓은 가게들 다 날린 것도 억울한데, 빚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내가 알린다고 사람들이 그 빚 없던 거로 해주겠어요? 그 사람 죽음 팔아서 돈 마련하고픈 생각도 없었고. 그런 건 그이도 원치 않았을 거고.”
박은 여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단하게 굳은 표면 아래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저 여자가 건너왔을 십 년을 상상했다. 믿었던 남편의 실체, 사업 실패, 낯선 곳으로의 이주, 생활의 추락, 새로운 일, 쌓여 있는 빚, 죄 없는 아이들, 돌연한 죽음. 김 사장은 어떻게 죽었을까. 자살일까? 사고일까? 누가 죽인 걸까? 박은 자기 집 화장실에서 목을 맨 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김 사장을 상상했다. 해변에 앉아서 파도를 바라보다가 어두워진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김 사장을 상상했다. 눈앞의 여자가 퉁퉁 불은 남편의 시체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상상했다. 9, 1, 1을 한 번에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여자의 창백한 손가락을 상상했다.
김 사장의 실패는 박의 연료였다. 그 가게를 출발점으로 해서 지난 십 년간 박은 눈부신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그 시작에서 김 사장의 죽음을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 사장의 목숨은 박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다 쓴 연료의 행방을 누가 궁금해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박은 이제 거꾸로 자신의 죽음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젓가락으로 식어 가는 면을 건져 입에 넣었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해산물 국수는 맛이 형편없었다.
“죽을 건가요?”
여자가 말했다. 박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기가 언제 뭘 묻기라도 했냐는 듯 뚱한 얼굴로 박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요?”
박은 짐짓 못 알아듣겠다는 듯 되물었다. 
“게임하는 거 보면 알아요. 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치들 목적은 그냥 잃는 거예요. 돈이든 시간이든. 눈은 풀려 있고 정신은 딴 데 가 있고. 게임에 집중도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앉아 있죠. 자기 패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그랬단 얘깁니까?”
여자는 박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죽진 마세요.”
갑자기 아랫배가 쓰려 왔다. 박은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심한 설사였다. 돌아오니 여자는 자리에 없고 이십 불짜리 지폐 한 장과 포춘 쿠키 두 개만 빈 국수 그릇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4


박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카지노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져 바다 쪽으로 난 문으로 향했다. 보드워크라고 불리는 길 오른쪽으로는 대서양이, 왼쪽으로는 상점과 호텔이 늘어서 있었다. 박은 좁은 나무판자로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 부부, 가볍게 차려입은 연인, 느릿하게 떨어져 걷는 노부부, 시끌벅적한 한 무리의 관광객. 그의 곁을 지나가는 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니었다. 박은 자신도 혼자가 아니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해 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분명 그도 곁에서 함께 걸었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구멍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이제는 트렁크에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조차 희미했다. 
걸음을 멈추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려는지 하늘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박은 모래사장으로 연결된 통로로 들어섰다. 단단한 보드워크에서 빠져나오자 발밑에 고운 모래가 밟혔다. 그는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한여름은 아니었지만 성미 급한 수영객 몇이 바다에 들어가 있었다. 모래사장에 놓인 네댓 개의 선 베드 위에서 책을 읽거나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박은 파도가 그려 놓은 갈색 경계선 근처까지 다가가 섰다. 바다 쪽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박은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석양을 반사하는 바다. 짠 내가 섞인 바람. 허공을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 하지만 이 낯익음은 시간의 축 위에서 그가 위치한 현재의 지점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연원을 찾아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도가 한참 동안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고, 갈매기 몇 마리가 그의 주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기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마침내 기억을 찾아냈다. 기시감의 근원은 사십여 년 전 소년 시절을 보냈던 인천 월미도 앞바다였다. 그 시절 박은 방과 후면 동네 친구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월미도로 향했다. 공부에 목을 매거나 소심한 모범생 타입은 아니었으므로 날씨가 좋은 날이면 종종 오후 수업을 빼먹고 가는 날도 있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대서양 해변 같은 백사장은 없었지만, 대신 월미도에는 까마득하게 펼쳐진 검은 갯벌이 있었다. 콘크리트로 펄이 메워지고 온갖 카페와 술집, 횟집들이 들어서기 전의 일이었다. 갯벌 너머로 뿌연 바다가 보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물에 들어가면 박과 친구 무리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는 달음박질로 갯벌을 지나 바다 속으로 뛰어들 때의 감각, 언제나 날씨보다 차가웠던 수온의 청량한 느낌을 기억해 냈다. 잠수를 하다 숨이 가빠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의 폐가 터질 듯한 고통을 기억해 냈다. 곧잘 누가 더 빨리 다녀오는지를 놓고 내기하던 등대를 향해 헤엄쳐 갈 때의 흥분을 기억해 냈다. 누군가 빽 소리를 지르면 모두가 자맥질을 멈추고 넋을 잃은 채 물속에서 지켜보던, 저물어 가면서도 온 세상을 삼킬 듯 붉던 태양의 얼굴도.
해가 완전히 사라지면 아이들은 그제야 하나둘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땀과 바닷물이 섞인 물방울들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뒤를 쫓았다. 어머니는 늘 부엌에서 육남매의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집 안 전체에 비릿하고 고소한 꽁치 굽는 냄새가 퍼지는 날이 많았다. 오가다 만난 누나들은 이유도 없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몸을 녹이기 위해 아궁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노라면 어머니는 무심하게 말하곤 했다. 오델 그렇게 저녁까지 싸돌아 댕기냐. 감기 들게. 이따금 어머니는 부엌 한쪽에 식구들 몰래 숨겨 놓은 누룽지를 조금 떼어다가 박에게 주곤 했다. 그때 먹은 누룽지는 세상의 어떤 사탕보다도 달았다. 박은 어머니에게 누룽지를 얻어먹은 사람은 자기뿐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건 박이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기 위해 한창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영화감독이라는 허황된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온 한 청년의 목표가 생활과 생존으로 옮겨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군대를 제대하고 부평의 작은 베어링 공장에 취업했던 청년 박이 자신의 처지를 답답하게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자기 일이 싫었고, 바람 잘 날 없는 집구석이 싫었고, 지긋지긋한 인천이 싫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박은 자신의 아주 어렸을 적 꿈을 소환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영화감독이 되는 거였다. 목표는 미국 뉴욕의 영화 학교였다. 그는 일 년간 딱 돈 백만 원을 모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거기엔 형과 누나들에게 빌린 돈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뉴욕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녹록지 않은 도시였고, 가져온 돈은 월세 몇 번에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박은 한국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백 불도 안 되는 주급을 받으며 셔터를 올리는 것부터 청소, 주문, 계산, 설거지, 때로는 정산까지 모든 일을 해내야 했다. 셔터를 내리면 아무도 없는 식당 안에서 새우잠을 잤고 날이 밝으면 다시 똑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어학원을 통해 어렵사리 받은 일 년짜리 유학생 비자가 만료되었고 마침내 그는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전화를 걸어온 건 둘째 형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착실하게 커서 국어교사가 된 그는 막내인 박과 열네 살 차이가 났다. 덩치가 좋고 성격이 불같아서 동생들을 자주 때렸기 때문에 박은 그를 무서워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둘째 형은 다짜고짜 들어오라고 했지만, 박은 망설였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미국을 떠나면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교민 중에는 부모상을 당해도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박은 이미 죽은 어머니보다는 자신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는 자신 말고도 자식이 다섯이나 더 있고, 가봤자 고인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아버지의 임종은 지켰으니 할 도리를 반은 했다고도 생각했다. 마침내 그가 한국에 다시 전화를 걸어 최종적으로 못 가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둘째 형은 순순히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통화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박이 건강하라는 상투적인 인사말로 전화를 끊으려 했을 때, 둘째 형은 끝내 자신의 감정 일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덧붙였다. 씨팔, 넌 사람도 아니다. 개 같은 새끼.
순간 서늘한 한기가 발끝을 덮쳤다. 박은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멍하니 서 있던 그의 발 위로 파도가 올라탔다가 사라진 뒤였다. 구두 속으로 바닷물이 들어가 양말까지 다 젖었다. 박은 조그맣게 씨팔,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뒤돌아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드 워크에서 호텔 입구로 들어가기 전 그는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고기가 죽은 것처럼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5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간 박은 소파에 다시 몸을 묻었다. 텔레비전을 켜자 토크쇼가 한창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줄곧 이야기만 나눌 뿐인데 진행자와 손님 모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시종일관 낄낄거렸다. 미국에 산 지 스무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그들의 웃음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영어는 더 불편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비슷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것으로 이 사회의 일원이라고 착각하는 이민 1.5세나 2세들이 더 우스워 보였다. 그래 봤자 너넨 들러리야. 쟤네 눈에 우린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봤자 그냥 세탁소, 음식점, 청과물 가게 주인일 뿐이라고. 낯선 이들로부터 당신은 미국에 살면서 왜 영어를 더 배우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좆 까고 돈이나 많이 벌어라, 병신들아.
박은 초록색 소파 위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두통이 심해지고 어깨와 등의 여러 근육이 아팠다. 곧 몸살을 앓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통증이 계속되자 박은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셔츠와 바지를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가방에서 진통제를 찾아 두 알 삼키고는 위스키로 입가심했다. 반대쪽 일인용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으려니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초록색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약을 먹어도 통증이 금방 사라지지 않아 박은 눈을 감았다. 그래, 저기서 밤새 신나게 뒹굴던 날도 있었지. 백인들과 영어로 농담을 나눌 순 없어도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섹스는 언어가 필요 없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충분한 현금과 몇 잔의 술, 물에 타먹는 동그란 알약 하나면 충분했다. 귀에서 어디선가 원피스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강을 부리기 시작한 이후 박은 강과 함께 애틀랜틱시티에 내려오는 일이 잦아졌다. 강은 박의 동향 후배로, 김 사장 가게를 인수하던 무렵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만난 인연으로 함께 일하게 되었다. 매사 계획적이고 섬세한 박에게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행동대장 스타일의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강이 그 역할에 적격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도 센 데다가 인천 사람 특유의 거친 성격이 있어 같이 다니기 좋았다. 낯을 가리는 아내도 강을 마음에 들어 했고 강도 아내를 잘 따랐다. 강을 데리고 다니면서 골치 아픈 몇 가지 일이 해결됐다. 주로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는데, 강은 채무자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욕에서부터 가벼운 완력,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한 유무형의 협박까지 강은 일을 곧잘 했다. 박이 처음 강을 이곳에 데려온 것은 일종의 포상이었다. 한 천 불 줄 테니까 놀다 가자. 보가타 호텔에 차를 대며 박이 말했을 때, 강은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 고생하셨는데 재미도 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콜걸을 부르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라고 박은 생각했다. 강이 호텔 매니저 라이언에게 백 불짜리 두 장을 쥐여 주며 뭐라고 속닥거리자 라이언은 자신의 개인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십 분쯤 후에 방으로 누군가 올 거라고 했다. 약속대로 이십오 분 후에 스위트룸 벨이 울렸고, 문을 열자 붉은색과 노란색 드레스 차림의 늘씬한 백인 미녀 둘이 서 있었다. 리사와 모니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그들은 너무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여서 박은 눈앞의 광경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파트너를 바꿔 가며 진행된 섹스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박은 그들의 끈팬티 속에 백 불짜리 지폐 서너 장씩을 넣어주었다. 다음날 첫 소변을 보면서 박은 자신의 물건에 처음으로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사장으로부터 인수한 맨해튼 한식당에 박은 <큰기와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이 주방장을 비롯한 인력 관리와 경영을 맡고, 아내가 고객 관리와 돈 관리를 맡았다. 기타 힘쓰거나 궂은일은 대부분 강이 나서서 해결했다. 코리아타운 전체의 확장과 함께 장사의 규모는 금세 커졌다. 셋의 팀워크가 좋은 것도 한몫했다. 오 년 만에 은행 대출을 모두 갚고, 새로 대출을 받아 다운타운과 뉴저지에 각각 <청기와집>과 <백기와집>이라는 분점을 냈다. 사람들은 점차 박을 회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최초로 음식점을 인수한 지 칠 년 만에 박은 모든 부채를 갚고 음식점 세 개와 대저택 두 채, 플로리다의 별장 하나, 고급 세단과 SUV 여러 대를 소유한 성공한 이민 1세가 되었다. 교민 신문에 그의 성공담이 소개되고, 다 세기 힘든 각종 모임의 장으로 추대되었다. 연락이 끊어졌던 사람들에게 안부 전화가 빗발쳤는데 끝까지 듣고 보면 열에 일곱은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기억할 만한 순간은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둘째 형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였다. 형은 다소 머뭇거리면서, 대학생인 자신의 딸이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가려고 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박은 조카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카를 ‘그 애’로 지칭하면서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묻고는, 필요한 일 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대주겠다고 했다. 형은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고맙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은 채 머뭇거리다가, 오래전처럼 전화를 끊기 직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넌 어릴 때부터 참 남달랐어.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박에게 찾아온 감정은 뜻밖에도 무료함이었다. 은행 잔고는 현실감 없는 숫자들로 점점 더 쌓여 갔고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반기며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박은 인생이란 게 이렇게 따분한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권태로웠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그가 찾은 것은 섹스와 도박이었다. 주중에는 각종 모임에서 만난 젊은 여성들과 뉴욕 시내의 호텔을 찾았고, 주말이면 강과 함께 애틀랜틱시티에 내려가 본격적으로 도박과 섹스를 즐겼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젊은 시절 함께 식당 일을 하다 만난 아내는 온갖 고생을 같이한 동료였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오느라 그들은 아이조차 부러 갖지 않았다. 형편이 나아져 가지려 했을 때 아내는 자연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어렵게 시험관 시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그녀는 틈만 나면 돈과 아이를 맞바꾼 일이 평생의 한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로부터 한참 후 마침내 고생 끝에 비로소 낙이 찾아왔는데도 아내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박은 아내의 어두운 표정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졌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그녀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성공하더니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말이 듣기 싫어 참고 살았다. 퍼주어야 할 위자료를 생각하면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부부관계는 끊긴 지 오래였고, 날이 갈수록 하루에 몇 분 대화하기조차 힘들었다.
어느 날 점심과 저녁 사이, 손님이 뜸한 시간에 아내는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가자고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박은 꺼림칙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음료가 채 나오기도 전에 아내는 탁자 위로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그와 낯선 여자들이 맨해튼 W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이었다. 박은 무표정하게 사진을 내려다보다가 아내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고. 아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혼해야지. 박이 물었다. 이혼이 그렇게 쉬워? 아내는 박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식당 하나만 줘.
박은 아내에게 맨해튼에 있는 <큰기와집>을 주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단골도 많으며 그들의 첫 식당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버렸다. 실제로는 월세도 가장 비싸고 이익도 적게 날 뿐 아니라 그는 태생적으로 뉴욕이라는 도시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청기와집>이나 <백기와집>을 주지 않고 가장 큰 식당을 준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양쪽에서 한인 이혼 전문 변호사를 선임하자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십오 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데는 두 달이면 충분했다.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는 변호사의 전화를 끊고 나자 박은 자신이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이혼이란 성공한 남자의 상처이자 증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달아야 할 딱지를 이제야 단 것뿐이라고.
이혼 후 박은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그게 다 찌푸린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덕분이라고 그는 믿었다. 주중에는 가게를 강에게 맡겨 두고 골프를 치러 다녔고 주말에는 강과 함께 애틀랜틱시티에 내려갔다. 애틀랜틱시티에서는 버릇대로 진탕 놀았지만 오가는 길에는 강에게 꼼꼼히 보고를 듣고 지시를 내렸다. 카지노에서 놀다 밤이 되면 방으로 올라갔다. 다른 여자들을 부를 때도 있지만 그들은 주로 리사와 모니카를 불렀다. 창밖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동안 강은 초록색 소파에 앉아 모니카의 애무를 받으며 리사와 엉켜 있는 박을 지켜봤다. 박이 나가떨어지면 강은 박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고 리사에게 다가가 거칠게 그녀를 안았다. 굵은 팔뚝으로 리사의 금발을 연신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곤 했다. 박은 약 때문에 몽롱한 정신으로 시가에 불을 붙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신을 떠올렸다. 내 거라면 뭐든 뺏고 싶어 하던 놈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야 했다고, 박은 생각했다. 
눈을 뜨자 눈앞에 강이 앉아 있던 초록색 소파가 보였다. 그러나 거기엔 리사도 모니카도 강도 그 시절의 박도 없었다.


6


새벽녘에 눈을 뜬 건 통증 때문이었다. 박은 허리 아래가 저린 느낌에 몸을 뒤척였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처럼 서서히 밝아지던 의식이 누군가 둔기로 밤새 내려친 듯한 통증과 함께 돌연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침대 위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은땀으로 등허리가 흥건했다. 발가락을 움직이려 했지만 머리와 발 사이의 거리가 뉴욕과 LA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꿈에서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는 누룽지를 들고 있었다. 박은 자신의 것이라고 소리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엄한 얼굴로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건 네 것이 아니야. 한 번도 네 것이었던 적이 없지. 넌 다른 아이 걸 뺏어 먹은 거다.
하나의 몸에 존재하는 시차 속에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엄마의 얼굴은 우물처럼 깊고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목덜미 전체를 가로지르는 반복적인 통증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무엇도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펴고 대자로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그는 쉼 없이 밀려오는 고통의 파도를 꼼짝없이 맞고 서 있어야 했다. 파도는 차갑고 세고 영원히 반복될 것 같아 두려웠다.
박이 침대를 처음 벗어난 것은 정오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는 시체처럼 무거운 자신의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두 컵 마신 후 진통제 네 알을 삼켰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 커피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뉴욕 지역 번호로 시작하는 발신번호를 보고 아마도 경찰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진 사장과 강 때문에 식당은 하루 동안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제저녁 늦게 실종신고를 했을 테고, 경찰은 오늘 아침부터 수사에 착수했겠지. 어쩌면 이미 잠겨 있던 식당 안 휴게실의 문을 열고 흥건한 핏자국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경찰이 박에게 연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과 아내, 그리고 박은 이미 여러 건의 소송으로 얽혀 있는 상태였다. 박은 전화기의 전원을 껐다.
강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건 이혼한 지 몇 달이 지나서부터였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박은 자신을 대하는 강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무례하거나 오만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박은 강이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고 느꼈다. 원래의 그와 다르게 강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즈음 박은 남부 뉴저지와 업스테이트 뉴욕 쪽에 새로운 음식점들을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와집’이라는 단어를 브랜드 삼아 이번에는 <홍기와집>과 <새기와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었다. ‘기와집’을 미국 전역으로 뻗어 나갈 한식 프랜차이즈로 키우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굵직한 계약 조건들은 건물주와 대강 합의가 된 후라, 계약서를 확인하고 사인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박은 강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계약을 마무리 짓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세금 문제에서 얼마간 이득이 있을 거라는 변호사의 충고를 따른 거였다. 그러나 얼마 후 가게 계약 서류에 문제가 생겼다. 뒷돈까지 먹인 건물주가 최종적으로 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 세입자의 상호는 <큰기와집>이었다.
박은 강을 사무실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덩치가 커다란 강은 몸을 접듯이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의 따귀를 연달아 때렸다. 두 대를 맞다가 강이 마지막 세 번째에 박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하시죠, 형님. 강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박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너, 설마 일부러 그런 거냐. 강은 박의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볼 안쪽에 혀를 넣어 볼록하게 만들었다. 대답해. 대답하라고 새끼야! 양 손목이 잡힌 채 박은 소리 질렀다. 박이 발로 수차례 걷어찼지만 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강이 말했다. 형수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은 움직임을 멈추고 강을 쳐다보았다. 뭐? 그 순간 강이 박을 벽 쪽으로 세게 밀쳤다. 박은 힘없이 딸려가 책장에 부딪혔다. 책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은 바닥에 넘어져 있는 박을 내려다보다가, 목을 풀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동안 해도 너무하셨어.
그 뒤로 강은 박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퍼즐 맞추듯 모든 것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박은 강이 계약을 위해 사인해야 한다며 가져오던 한 뭉치의 서류들을 기억해 냈다. 서명할 자리들만 계속해서 등장하던 겹쳐진 문서들. 박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서명을 휘갈겼다. 강을 믿었고 더 정확히는 강을 믿는 자신을 믿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마침내 아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낸 순간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강의 머리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맥이 풀렸다. 아내가 내밀었던 내연녀와의 사진들. (그건 누가 찍었을까?) 분명하고도 현실적인 이혼 요구 조건. (아내는 이상주의자인 데다 본래 빙 돌려 말하는 사람이다) 돕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너무나 수월하고 신속했던 이혼 과정. (아내 뒤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박은 의미 없어진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스스로를 원망하고 강과 아내를 저주했다. 얼마 후 한인 사회에 강이 맨해튼 <큰기와집>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변호사에게서는 <청기와집>과 <백기와집> 소유권에 관한 소송이 제기됐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대로 소송을 걸어온 사람은 아내와 강이었다.
아직 전부를 뺏긴 것은 아니었다. 박에게는 여전히 자기 소유의 집 두 채와 몇 대의 자동차, 그리고 두 개의 음식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가게를 뺏겼고 심복이었던 강을 뺏겼고 강에게는 아내를 뺏겼다. 박은 뺏긴 것들이 모두 곁에 둘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얼마간 그 위로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박이 생각 없이 사인했던 문서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문서들은 <청기와집>과 <백기와집>에 대한 소유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아내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며, 이제 저들이 걸어온 소송에서 재산을 지키려면 거꾸로 그 문서가 어떻게 왜 위조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박은 충격과 억울함으로 분노했다. 며칠간의 폭음 끝에 두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는 사람을 고용해 아내와 강의 뒤를 밟게 했다. 아내는 특별할 것 없이 하루 중 대부분을 가게에 머물렀다. 강은 느지막이 집을 나와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다가 저녁 9시 무렵 <큰기와집>으로 들어가 새벽 3시쯤 아내와 같이 나온다고 했다. 11시쯤 식당 영업이 끝나면 뒷정리와 청소를 하고, 종업원들은 1시에 퇴근한다. 이후에는 아마 둘이서 돈 계산을 할 거고, 안쪽 휴게실에서 그 짓도 할 거라고 박은 생각했다. 처음 <큰기와집>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무렵 자신과 아내가 생활하던 패턴이었다. 박은 복사해 두고 가게를 인수할 때 넘겨주지 않은 여분의 식당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현금으로 총도 구했다. 총기소지 허가가 없었지만 브로커에게 오백 불을 더 얹어 주니 하루 만에 총과 탄환 다섯 발이 수중에 들어왔다. 박은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강이 저녁 늦게 음식점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들은 날 새벽, 박은 <큰기와집>을 찾아갔다.
눈을 떠보니 박은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됐고 배가 고팠다. 다행히 통증은 아까보다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박은 룸서비스를 불러 감자 수프와 토마토 파스타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와 거실 식탁에 세팅을 해주는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종업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그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잠시나마 주말마다 애틀랜틱시티에 내려오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제 던져 놓은 소파 위의 총을 보자 그 기분이 싹 사라졌다. 트렁크에 들어 있는 시체들 생각이 그를 다시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박은 가진 돈을 전부 꺼내 모아 보았다. 사업 확장과 소송으로 자금을 무리하게 운용하다 보니 정작 은행에는 잔액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어제 새벽 내려오는 길에 휴게소 ATM에서 뽑아온 잔액까지 합쳐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총 5,875불뿐이었다.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박은 생각했다. 이걸로 멕시코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LA로 간다면 누굴 찾아가야 할까. 중부에 숨어 있으려면 어느 도시가 좋을까. 담배가 다 타기도 전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기 놓여 있는 총을 들고 당기면 당장이라도 이 고민을 끝낼 수 있다. 박은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나 총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그 여자 생각이 났다.


7


카지노로 내려간 박은 매니저를 찾았다. 머리가 심한 곱슬머리인 중년의 흑인이 나타나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카지노 바깥에서 들어온 태양의 잔광이 그들이 서 있는 카펫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였다.
“딜러를 찾는데. 킴이라고.”
매니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녀는 근무 중이 아니라고 했다. 어제도 오후에 퇴근하는 걸 봤으니 오전조에 속한 모양이었다. 박은 이십 불짜리 지폐를 하나 건네며 매니저에게 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했다.
“이 봉투 좀 전해 주시오.”
“이걸요?”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매니저는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는 봉투와 지폐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어렵겠는데요.”
박이 되물었다. 
“왜죠?”
매니저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킴은 오후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근무를 하고 있어야 한단 뜻이죠. 킴이 무단결근을 하는 바람에 오후 내내 나도 골치가 아팠다고요. 미리 연락을 준 것도 아니고, 전화기는 꺼져 있고. 젠장, 동양인이라고 다 성실한 것도 아니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알 게 뭐예요. 내일이면 또 멀쩡하게 출근하겠죠. 돈이 궁한 여자니까.”
매니저는 인상을 쓴 채 자리를 떴다.
박은 바다로 나가는 입구 쪽 슬롯머신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오천 불이 든 봉투에서 백 불을 꺼내 넣었다. 레버를 당기고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서 숫자와 그림들이 맞춰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세븐 바나나 체리. 체리 세븐 스타. 스타 스타 바나나. 그림들은 맞춰질 듯 맞춰지지 않으며 회전했다. 기계적으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어느 순간 그림들은 아내와 강과 박 자신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고, 총과 시체주머니와 킴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 불이 소진될 때마다 박은 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지폐를 넣었다. 중간중간 소액을 따기도 했지만 잃는 속도는 그보다 빨랐고, 그 사실이 박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는 돈을 다 잃고 머신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때가 되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 가지로 좁혀질 것이고, 박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재킷 안쪽에 들어 있는 총을 확인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박은 허리를 숙여 주머니에서 나온 조그마한 비닐봉지 두 개를 집었다. 국숫집에서 받아온 포춘 쿠키였다. 그는 킴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 봉투에는 삼천 불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없다면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내 결말은 하나이니까. 박은 물끄러미 손에 든 포춘 쿠키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안쪽에 있는 매니저에게 걸어갔다.
“킴 주소를 알고 싶은데.”
매니저는 아직도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안 된다고 답했다. 박은 돌돌 말아 쥐고 있던 백 불짜리를 건네며 다시 말했다.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꼭 줘야 할 것도 있고.”
매니저는 봉투를 흔드는 박과 그에게서 건네받은 백 불짜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곧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를 조회해서 나온 주소를 카지노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메모지에 옮겨 적어 건네면서 덧붙였다.
“킴한테 내일도 안 나오면 당장 잘라버릴 거라고 전해 줘요. 내가 주소 가르쳐줬다는 말은 하지 말고.”
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구로 향했다. 누군가 문을 열 때마다 바다 쪽에서 짭조름한 바람이 불어왔다.


8


매니저는 킴의 집이 카지노에서 걸어서 이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다. 박은 전화기를 켜서 지도 앱을 확인하려다가 그만두고 호텔 앞에 설치된 대형 지도 앞에서 경로를 확인했다. 오래됐는지 도로명과 지명 곳곳이 햇볕에 노랗게 바래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직선으로 큼직큼직하게 구획된 미국 도시답게 우회전, 직진, 좌회전, 우회전이 전부였다.
호텔과 카지노, 쇼핑몰이 몰려 있는 번화가를 벗어나는 데는 빠른 걸음으로 십 분이면 충분했다. 그러자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는데, 그건 그가 생각해 온 애틀랜틱시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낡고 갈라진 도로, 더럽고 낙서 가득한 벽, 겨우 이층이 될까 말까 한 낮고 오래된 집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오가는 차들도 많지 않았다. 호텔의 인공적인 향취 대신 매캐한 연기와 정체모를 음식 냄새가 병균처럼 공기 중에 떠다녔다. 태양은 거의 져서 도시의 민낯 위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박은 걸음을 재촉했다.
킴이 사는 아파트는 회색의 낡고 기다란 이층 건물이었다. 박은 종이에 적힌 그녀의 호수 23B를 찾아 일층을 헤매다가, 2가 이층을 뜻하는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녹슨 철제 계단에서는 발을 디딜 때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23B는 복도 끝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문 앞에 서서 박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둘러 걸은 탓인지 겨드랑이와 등 뒤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의식처럼 주머니에 들어 있는 봉투와 총을 차례로 확인하고 박은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노크를 하고 이번에는 귀를 가까이에 댄 채 소리를 들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렸을 때 문은 힘없이 열렸다. 문가에 가지런히 정리된 몇 켤레의 신발들이 먼저 보였고, 큰 창문이 달린 넓지 않은 거실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박은 열린 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거실 너머 좁은 베란다에는 걷지 않은 빨래들과 함께 작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여자를 발견한 건 현관에서 가장 먼 화장실에서였다. 킴은 이어폰을 낀 채 욕실 벽에 붙은 샤워기 꼭지에 느릿느릿 황금색 보자기를 묶고 있었다. 소리 내 불렀지만 킴은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지켜보고 있던 박이 화장실 문을 세게 두드리자 그제야 돌아서 그를 발견하고 킴이 괴성을 질렀다. 박은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서 보자기를 뺏었다. 그녀는 뺏기지 않으려고 그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욕실 바닥에 넘어졌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뿜어 나와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박은 벗겨진 킴의 이어폰 한쪽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볼륨이 너무 높아 노랫소리는 거의 절규처럼 들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킴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와요.”
박은 샤워기를 잠그고 보자기를 손에 감아쥔 채 거실로 나왔다. 입이 텁텁해서 뭐라도 마시고 싶어졌다.


베란다에 나간 박이 부엌 찬장에서 꺼내온 한국식 믹스커피를 타고 있을 때 킴이 타월을 두른 채 나타났다. 그새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죠? 지금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예요?”
킴은 창백해진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박은 대답하지 않고 커피 가루 위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빨리 말해요. 경찰 부르기 전에!”
킴이 소리 질렀다. 박은 믹스커피 봉지로 머그잔 두 개를 번갈아 저었다.
“죽게 내버려둬요, 제발.”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박은 머그잔 하나를 킴 쪽으로 민 다음, 재킷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탁자 위에 소리 나게 올려놨다. 커피에서 나는 달짝지근한 향이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퍼졌다.
“이거 한 잔만 먹고 죽읍시다.”
박이 말했다.
믹스커피가 조금씩 줄어드는 동안 두 사람은 베란다에 앉아 황량한 동네 풍경과 멀리 솟은 높은 호텔들, 그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박은 킴의 본래 이름이 전영숙이라는 것을 알았고, 킴은 박의 자동차 트렁크 속에 시체 두 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킴은 자신이 오랫동안 신과 남편을 증오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샤워기에 보자기를 묶는데, 오늘만큼은 꼭 성공할 것 같았다고도 했다. 박은 이제는 의미 없어진 도주 계획에 대해 말했지만, 플랜 C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커피는 식으면서 줄어들다가 마침내 바닥을 보였다.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서 주황색 가로등과 호텔의 불빛만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하죠.”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박이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을 정합시다. 총알은 하나뿐이니까.”
“어떻게요?”
킴이 묻자 박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구겨진 봉투와 포춘 쿠키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국숫집에 이걸 두고 가셨더라고. 뭔지 알죠?”
킴은 외계에서 온 물건을 보듯 비닐 포장에 싸인 쿠키를 만지작거렸다.
“더 짧은 문장이 적혀 있는 사람이 죽는 걸로 합시다. 단어 수대로. 보자기로 죽으려다간 하루 온종일 걸릴 테니 이 총을 상대방이 쏴주는 걸로 하죠. 살아남은 사람은 이 봉투도 갖는 겁니다. 삼천 불 정도 들어 있거든. 있으나 없으나 큰 의미는 없는 돈이겠지만.”
박은 동의를 구하는 듯이 킴의 얼굴을 쳐다봤다. 킴은 잠시 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은 포춘 쿠키를 손바닥에 올려 킴에게 내밀었다. 킴이 먼저 하나를 선택했고 박이 나머지를 가졌다. 킴은 포장지를 뜯으려다가 멈추고 말했다.
“먼저 하세요.”
박은 주저 없이 포장지를 뜯고 쉼표처럼 구부러진 포춘 쿠키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안에서 특유의 조악한 폰트로 인쇄된 종이가 나왔다.
“웬 원 도어 클로지스, 어나더 오픈즈.”
박은 점괘를 더듬더듬 읽은 다음 덧붙였다.
“여섯 단어네. 그니까 영숙 씨가 다섯 개 이하가 나오면…….”
“내가 죽는 거군요.”
킴이 박의 말을 완성했다. 그녀는 천천히 포장지를 찢고 포춘 쿠키를 꺼내든 다음, 조심스럽게 부러뜨렸다. 그러고 나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박은 그 순간이 너무 천천히 흐른다고 느꼈다. 갑자기 목이 탔다.
“몇 개예요?”
박이 물었다. 킴은 말없이 두 동강난 포춘 쿠키를 박에게 보였다. 거기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제 어쩌죠?”
킴이 말했다.
“그러게요.”
박이 답했다.
그때 바다 쪽에서 큰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매일 이 시간쯤 호텔 근처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였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 위에서 형형색색의 빛 알갱이들이 수직으로, 수평으로, 원형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노랗고 빨갛고 파란 구슬들이 저마다의 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혹은 돌아가야 할, 예정되었고 계획되었던 본향 같은 구멍으로. 박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구멍은 저기 어디쯤에 있을까 하고 찾았다.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서 재킷 단추를 잠갔다.
마지막 폭죽이 사라졌을 때, 킴은 뭔가를 결심한 듯 일어났다. 그녀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포춘 쿠키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일단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이 동네에 끝내주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하나 있거든요. 진짜 베트남 사람이 주방장이라 뭐가 달라도 달라요. 어제 먹은 국수는 정말 최악이었잖아요?”
박은 천천히 일어나 탁자 위의 짐을 챙기려고 했다.
“총은 놔두고요.”
킴이 말했다.
“총은 놔두고.”
박이 따라 말했다. (끝)















작가소개 / 문지혁

2010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사자와의 이틀밤』, 장편소설 『P의 도시』, 『체이서』, 여행 에세이 『뉴욕』, 『홋카이도』가 있고, 옮긴 책으로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이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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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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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3-01
손상

손상 지강숙 차가 안개를 헤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반쯤 열린 철문에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민호가 머뭇거렸다. 방금 지나온 캠핑장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민호는 할 수 없이 철문 안으로 차를 전진시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니 샛길이 나 있고 길 끄트머리에 숨어 있던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편에는 미니버스 크기의 캠핑카 한 대가 서 있었다. 희수가 자세히 보려 차창을 내렸을 때,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차를 한쪽으로 몰았다. 희수는 차에서 내려 소나무 숲 건너 언뜻 보이는 캠핑장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는 여기 두시고, 저어기 계곡 건너편이 조용할 거예요. 남자는 캠핑카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맞은편에 간신히 텐트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였다. 희수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캠핑카 앞에도 촬영 장비가 즐비한 것을 보니 남자 쪽도 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의 화각을 생각하면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희수와 민호는 텐트와 조리도구, 음식 재료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 번쩍. 캠핑카 앞을 지날 때,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희수는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물에 발을 디뎠다. 백화점의 캠핑 코너는 몇 개의 유명 브랜드를 빼고 대부분 비슷한 물건을 팔았다. 중소 브랜드의 경우에는 전주 매출에 따라 매대 위치가 정해지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매니저들은 타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백화점에서 금지한 가매출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자신의 카드 한도로 모자라면 신입이나 수습 같은 말단 직원에게 구매를 강요했는데, 다음 달에 실적이 없어 취소를 못 하면 직원이 고스란히 빚을 떠안기도 했다. 희수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고생하는 편을 택했다. 밤늦게까지 트렌드를 분석하거나 캠핑 용품의 기능을 공부해 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올렸다. 희수의 언변으로 타 매장에서 텐트를 산 고객이 환불을 받고 희수 매장에서 구매한 일도 있었다. 자산 규모가 미미한 업체임에도 희수의 매대는 작년까지 이벤트 홀 가장 좋은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했다. 매일 저녁 블로그나 유튜브로 유행 아이템을 살펴보고 설명할 말을 다듬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희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희수도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신생 브랜드 P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P사는 입점 행사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의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희수가 봤을 때 기능 면에서 희수의 제품이 훨씬 뛰어났지만 고객들은 희수의 설명에 잠시 멈췄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P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수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대책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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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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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기 클래스 신주희 유리 조각을 주워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피아노 레슨 중인 그 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집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자유다. 예컨대, 그 애가 아끼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그 인형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거나. 침대에 눕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눕고 싶다면 그래도 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 애의 침대가 좋았다. 늘 좋은 냄새가 나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 시트가 깔려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앙증맞은 침대였으므로. 나는 그곳에 누워 차마 피아노곡이라 말할 수 없는 도, 미, 솔, 솔, 솔을 들으며 끝끝내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가 된다. 길에서 주워 온 유리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 본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그 애의 매끄러운 피아노에 깊은 흠집을 내버리기로. * 수업 준비는 늘 최고이면서 최악이었다. 나는 매일 산산조각이 난 접시나 찻잔, 사발을 들고 온 수강생들에게 그것은 복원 중일 뿐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기를. 끈기를 가지고 다음 수업 예약을 꼭 해주기를. 나는 구차함을 떨쳐내며 테이블 위의 수업 계획서를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지난 수업과는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문장들 사이에서 틈이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 중 하나인 킨(金) 츠기(継ぎ)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틈을 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파편의 경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살려서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나는 틈을 메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내게 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 고작 틈,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망이나 좌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비관을 포기한 사람으로 서른 중반까지 사모님으로 살았지만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꽤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남편의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집 안 곳곳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처참했다. 동시에 처절하게 이를 악물고 살아남고 싶기도 했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일처럼, 눈앞에 던져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끝내 이혼과 재산 분할, 양육권 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시간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깨뜨려 본 사람은 안다. 한번 깨진 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뒤로 알 수 없는 허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공포스러울 만큼 왕성한 소화력과 끝이 없는 식사. 순식간에 불어난 몸이 거대한 틈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틈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항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적

  • 관리자
  •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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