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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별들의 들판」

  • 작성일 2009-02-05
  • 조회수 5,278



 

「별들의 들판」 공지영

그때 어디선가 짤랑짤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연한 갈색 머리의 게르만인 처녀가 자전거를 타고 이리로 오고 있었다. 그들이 자전거 길을 침범한 모양이었다. 선희 아줌마가 수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게르만인 처녀는 당케, 하고 짧게 말하며 이 여름아침처럼 싱그럽게 이 두 한국인을 향해 웃어주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자전거 탈 줄 아니?"

선희 아줌마가 물었다.

"네."

"언제 배웠어?"

"어릴 때…… 사학년 때였던가요? 그때 여름에 자전거 배운다고 하다가 이틀인가 몸살 앓아누워 있었어요."

선희 아줌마가 무슨 생각인가에 잠긴 얼굴로 잠시 입술을 앙다물더니 미소를 지었다.

"네 엄마 이야기 해줄까? 우리 시골에서는 여자애들 자전거 못 타게 했어. 여자들이 타면 좋을 자전거도 없고…… 근데 네 엄마는 그걸 그렇게 타고 싶어했다. 그래 내가 밤마다 우리 아버지가 쌀 배달하는 자전거를 몰래 끌고 나갔지. 네 엄마 밤마다 그걸 혼자 배운다고 무릎이 얼마나 까졌는지…… 한동안 절뚝거리고 걸어다니면서도 그래도 열심히 탔다. 우리가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네 엄마 몇달 월급 모아가지고 어느날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거야. 우리 병원 간호사들 중에 그건 처음이었어. 자전거 이름을 포르셰라고 지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선희야 봐, 하더니 새로 산 모자 쓰고 길고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목에 감고 베를린 우리가 근무하던 병원 앞길을 달려나갔다. 네 엄마 뒷모습으로 얄따란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는데…… 네 엄마, 그때 참 이뻤어."

선희 아줌마가 웃었다. 마치 그때, 상처입기 전, 훼손되기 전, 리본이 달린 모자 쓰고 길고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휘날리며 포르셰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던, 그런 처녀로 돌아간 듯 웃었다. 수연의 입가로도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베를린에 도착한 처녀가 새로 산 모자를 쓰고 스카프 휘날리며 달려나가는 장면을 생각하자 마음이 따뜻해왔다. 이 초여름 오스나브뤼크 작고 조용한 마을에 부는 바람처럼 싱그러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엄마는 그때도 짧은 치마를 입었을지 모른다. 오징어처럼 희고 관능적인 다리로 페달을 밟아대며 베를린 거리를 달렸으리라. 수연의 가슴속으로 왠지 안도감 같은 것이 스쳤다.

 

● 출처 :『별들의 들판』, 창비 2004

 

 

● 작가 : 공지영 -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8년 『창작과 비평』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봉순이 언니』『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즐거운 나의 집』 ,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등이 있음. 21세기 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 김용선 : 배우. 연극 『덧치맨』『1月 16日에 생긴 일』『메디아』『나비』 등에 출연.

● 이상희 : 배우. 연극 『특급호텔』『선녀와 나무꾼』『기차』『봉순이 언니』등에 출연.

음악 : 이미랑

제가 드디어 지름신의 법칙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그게 가방이든, 카메라든, 노트북이든 몇 달이고 그 생각만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질러버립니다. 저질러버리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수중에 가방이든 카메라든 노트북이든 들어오게 되겠죠? 얼마나 오랫동안 원했는가,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였는가에 따라 손에 든 그것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그게 간절히 원한 것이라면 밥을 굶어야 하는 고통 따위도 잊게 만들 정도로 고귀하게 보이겠죠. 그런 까닭에 한동안 그 물건에 푹 빠져서 살게 될 거에요. 시간이 지나도 그 물건이 잊히지 않을 만큼. 인생은 그렇게 기억되는 게 아닐까요? 그 대상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여행이든 일단 저지르고 나면, 그리고 그 일이 무모하면 무모할수록 우린 그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2009. 2. 5.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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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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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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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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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제 책상 옆에 노트북 사진,멋진 여름 옷 사진 붙여놨어요. 꼭 사려고요. 열심히 보고 생각하다 저도 질러버릴 겁니다.

    • 2009-06-30 10:40: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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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김연수 작가님이 덧붙여주시는 글이 참 좋아요. 읽고 나면 자주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고맙습니다 :)

    • 2009-02-06 14:28: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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