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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남한산성」

  • 작성일 2009-02-19
  • 조회수 5,376



 

「남한산성」 김훈

 

-밤새 빗소리를 들었다.

 

임금이 장지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임금은 곤룡포를 입지 않은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임금은 당상들의 앞자리에 앉았다. 영의정 김류가 말했다.

 

-아침에 각 군영에서 보고가 있었사온데, 비에 젖은 자는 반이 채 안 된다 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영상의 말은 성첩에서 멀다. 비가 온 산에 고루 내리는데, 가리개 없는 군병들이 어찌 반만 젖을 수 있겠느냐?

 

-포개어 입은 자는 속까지 젖지 않았다 하옵니다.

 

-군병들 중에 포개어 입은 자가 있고 홑겹인 자가 따로 있느냐?

 

-각자 제 요량으로 입고 있으니…….

 

-포개어 입은들, 밤새 내려 땅속까지 적신 비가 옷에 스미지 않았겠느냐? 스몄으니 얼지 않았겠느냐? 경들의 계책을 말하라. 어찌하면 좋겠느냐?

 

영의정 김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를 돌려서 내행전 마당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힐끗거렸다. 김류가 시선을 마당에 꽂은 채 말했다.

 

-눈이 왔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옵니다.

 

임금이 말했다.

 

-비가 오는데 눈 얘기는 하지 마라. 어찌해야 좋겠는가?

 

병조판서 이성구가 말했다.

 

-전하, 군병의 추위는 망극한 일이오나 온 산과 들에 비가 고루 내려 적병들 또한 깊이 젖고 얼었으니, 적세는 사납지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겠구나.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이성구가 엎드린 어깨를 움찔했다.

 

-전하, 비가 올 만큼 왔으니 이제 해가 뜰 것이옵니다.

 

임금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쳤다.

 

-군병이 얼고 젖으니, 병판은 해뜨기를 기다리는가?

 

이성구가 허리를 더욱 낮추었다.

 

-전하, 백성은 사시四時와 더불어 사는 것이고 군병에게 풍찬노숙은 본래 그러한 것이옵니다. 해가 떠서 옷을 말리면 군사는 다시 원기를 회복할 것이옵니다. 성심을 굳게 하소서. 전하.

 

임금의 시선은 천장에 박혀 있었다.

 

-병판이 기다리지 않아도 해는 뜬다. 떠서 적의 옷을 말릴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영의정 김류가 말했다.

 

-전하, 자꾸 어쩌랴 어쩌랴 하지 마옵소서. 어쩌랴 어쩌랴 하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옵니다. 받들기 민망하옵니다.

 

임금이 말했다.

 

-알았다. 내 하지 않으마. 경들도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그러나 어찌해야 하지 않겠느냐?

 

● 출처 :『남한산성』, 학고재 2007

 

 

● 작가 : 김훈 - 1948년 서울애서 태어나 오랫동안 신문기자를 지냈음. 소설『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 여행산문집『풍경과 상처』『자전거 여행』 등이 있음.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 한철 : 한철녹음실 사장.
기주봉 : 배우. 연극『관객모독』『리어왕』, 영화『주먹이 운다』『지구를 지켜라』『와일드 카드』, 드라마『불멸의 이순신』『부활』 등에 출연.
김용선 : 배우. 연극 『덧치맨』『1月 16日에 생긴 일』『메디아』『나비』 등에 출연.
김상규 : 배우. 연극 『청춘예찬』『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민들레 바람되어』 등에 출연.

● 음악 : 이해식

남쪽 바다 옆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지요. 아이가 이제 겨우 태어난 지 17개월. 예쁘더군요. 옹알옹알. 야단법석. 거실에 앉아 있는데 뉴스가 나왔어요. 정치 얘기들, 있잖아요.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극단적일까? 우린 이토록 평범한데. 제가 말했어요. 그러게. 좀 타협하고 살면 될 텐데. 친구도 말했어요. 타협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글쎄……. 아마도 그건 극단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마나한 소리만 반복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봐도 그 사람들은 하나마나한 소리밖에는 안 한답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들 속셈인지도 몰라요. 아름답고 고귀한 말들일수록 하나마나한 소리일 가능성이 많지요. 너무 훌륭하고 고귀한 말들이라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그건 옹알이만도 못한 소리일 뿐이죠.

 

2009. 2. 19.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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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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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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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마라. 차라리 벙어리가 낫겠다

    • 2009-02-23 17:31:4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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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말했다.-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유현숙-

    • 2009-02-19 23:22: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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