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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 작성일 2018-02-01
  • 조회수 2,259

[글틴-동화]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임어진






“빨간 구두 소문 들었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오래전 한 소녀를 불행에 빠뜨리고 어딘가로 멀리 떠났다는 구두였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이야기 속 소녀는 세례 뒤 성사에 신을 새 신발로 빨간 구두를 고른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소녀가 고른 신발 색깔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배당에는 검정 신을 신고 가야 한단다.”
“예, 할머니. 까만 구두를 신었어요.”
예배당에 들어가려는 소녀에게 빨간 수염 노인이 다가와 구두를 톡톡 치며 말했다.
“참 예쁜 신이군요. 춤출 때 꼭 신도록 해요!”
소녀는 노인 말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춤은 멈출 수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춤을 추던 소녀는 벌을 받고서야 구두에게서 벗어나고, 구두는 저 혼자 춤을 추며 어딘가로 떠났다. 사람들은 빨간 구두를 꺼리고 소녀를 탓했다.


빨간 구두를 꺼리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람들은 옛날과 달리 빨간 구두의 능력을 좋게 보았다. 빨간 구두를 신으면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옛 성벽이 아직 남아 있는 도시 외곽 마을의 여자 아이 예나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빨간 구두를 신으면 나도 최고의 무용수가 될 수 있을까?”
예나의 꿈은 춤추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세계에 이름을 크게 떨치는 뛰어난 무용가. 그것이 예나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예나는 마을 상점 거리에 있는 작은 빵집으로 뛰어 갔다. 예나 부모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가게 안을 맴돌며 종일토록 부지런히 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예나가 배우고 싶어 하는 비싼 무용 수업료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예나는 그래서 더 간절했다.
“엄마, 아빠. 소문 들었어요?”
예나 부모는 예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빨간 구두 얘기 말이니?”
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이 있으면 무엇을 하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근데 누가 본 사람이 있다던?”
아기를 안고 빵을 고르던 젊은 부부가 말을 거들었다.
“외국의 어떤 큰 도시에서 본 사람이 있대요. 빨간 수염이 난 늙은 구두장이가 한 자리에 계속 앉아서 만들어 팔고 있다던데요?”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도 벌써 알고 있었다. 어느새 많은 이들이 빨간 구두를 손에 넣어 갖고 있었다. 한두 켤레가 아닌 사람도 있었다.
“저것 봐. 생각보다 평범한걸. 저기서 무슨 능력이 나오는 걸까?”
“평범하니까 더 신비한 거지. 우리도 한 켤레만 있으면 좋겠어.”
예나네 부모는 일을 하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두는 작을수록 좋다는 말이 돌면 마냥 작아졌다. 높을수록 좋다는 말이 돌면 한없이 높아졌다. 사람들 말 따라 구두코도 뭉툭하거나 날렵해졌다. 발에 맞는지, 신을 수는 있는지 그런 염려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빨간 구두는 우선 갖고 보는 거였다. 빨간 구두만 있으면 활개를 치는 세상이었다.
예나 옆집 친구 로아도 구두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예나네 빵집 옆 채소 가게가 로아네 집이었다. 로아의 꿈 역시 춤추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두 아이는 같은 무용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로아와 예나는 만나기만 하면 구두 이야기를 했다.
“그 신만 있으면 어떤 춤도 문제없을 텐데…….”
“맞아. 최고의 스텝을 보여줄 수 있을 거야. 아! 우리한테 빨간 구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아이가 집 앞 골목 의자에 앉아 구두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퀭한 눈의 청년이 지나가다 듣고 웃었다.
“너희의 소원은 고작 춤이야? 그 신의 능력은 그 이상이라구! 나는 그걸로 더 엄청난 걸 할 거야.”
청년 뒤를 따라 웬 노인 하나도 큰 개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문이 아이들까지 홀리는군.”
예나와 로아는 노인을 힐끗 보고 다시 저희들 이야기에 열중했다. 아이들의 구두 이야기는 밤이 될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다.


날이 지날수록 소문으로 들리는 빨간 구두의 능력은 더 막강해져 갔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오로지 진짜 빨간 구두 하나뿐이라는 말도 들렸다. 그 구두에게는 뛰어난 춤이나 노래, 연주, 연기 정도는 약과였다. 말만 하면 무엇이건 그대로 된다거나 어떤 사람이든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고르는 것마다 당첨이 돼 빨간 구두가 신기를 부린다는 말도 했다.
“그 신발을 신고 다니면 밟는 곳이 다 자기 땅이 된대!”
실제로 중국에서 그런 일이 있어 엄청나게 넓은 땅을 갖게 된 부자가 있다고 했다. 부자는 신발의 존재가 알려지면 도둑들에게 시달릴까 봐 끝끝내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도둑맞고 말았다고 했다.
빨간 구두 덕에 큰 도박장들을 돌며 내로라하는 도박꾼들을 떼로 망하게 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돈을 감추고 숨어 살았는데, 그 세계가 쉽게 숨을 수 있는 데가 아니어서 어림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네들이 이 자를 귀신같이 찾아내 목숨 빼고는 다 앗아갔다는 것이다.
빨간 구두 때문에 최고 권력자가 된 지구 반대편 나라 사람도 여럿이라고 했다. 빨간 구두를 손에 넣은 사람은 정말 뜻대로 뭐든 다 이룬다는 얘기였다.
“설마, 그 정도까지?”
“그러게. 너무 엄청나다.”
예나와 로아는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눈을 빛냈다. 부모들은 볼멘소리를 했다.
“돈과 권력을 벌써 많이 차지한 사람들한테 빨간 구두는 너무한 거 아냐?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 손에 들어와 줘야지.”
“누가 아니래. 우리한테나 좀 와주면 좋겠군.”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먼 곳에서 무성한 소문을 풍기던 빨간 구두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빨간 구두를 보았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로 온 것이다.
빨간 구두는 이 도시에서 또 다른 능력들을 계속해서 발휘해 갔다. 여기저기에서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갈 낌새만 보이면 바로 모습을 감춘다고 했다. 한꺼번에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사라진다고도 했다.
서로 자기가 본 것이 진짜라고 목청을 세우다 몸싸움에 소송까지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엄청난 값을 부르며 구두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빨간 구두를 떠받드는 종교도 생겨났다. 세상에 하나뿐인 구두, 신을 신으로 모시는 신앙이었다. 금은은 물론이고 대리석 조각이나 청동 주물, 흙으로 빚어 구운 빨간 구두 동상들이 마구 늘어났다. 구두 동상들을 집 안 한가운데에 설치해 놓고 날마다 경건하게 떠받드는 사람들도 속속 늘어났다.
누구도 진짜는 본 적 없지만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신. 사람들은 이제 다른 어떤 신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냥 빨갛기만 한 구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전지전능한 빨간 구두만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모두들 그 신을 갖지 못해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 구두. 내 빨간 구두. 내 신은 어디 있는 거지?”
얼이 빠진 채 중얼거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냥 빨간 구두를 만들어 이게 바로 진짜 빨간 구두라고 남들을 홀리다 덜미가 잡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마음 약해진 노인들이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속이고 다니는 고약한 인간들이었다. 외국 어떤 도시에서 빨간 구두를 만들어 팔던 빨간 수염 난 늙은 구두장이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기업 이미지나 마케팅에 빨간 구두를 활용할까 골몰하느라 밤이 새도록 회의를 그칠 줄 몰랐다.
학자들도 바빠졌다. ‘빨간 구두 현상과 본질 연구’가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이를 다루는 학술 토론회가 잇달아 열렸다.
또 다른 이유에서 아이가 있는 집들이 제일 들떴다. 부모든 아니든 아이가 있는 집들은 너나없이 빨간 구두의 ‘효과’를 얻고 싶어 했다. 아이에게 그 신만 신기면 상황 종료인 거였다. 최고! 일인자! 자기네 집 아이에게 그런 축복이 내려질 테니 말이다. 어느 분야든 자기네 아이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데,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빨간 구두가 예나와 로아네 마을에 나타났다. 아니, 그렇다는 소문이 돌았다. 빨간 구두 두 짝이 우쭐우쭐 춤을 추며 마을 광장으로 들어서는 걸 누군가가 보았다고 했다.
마을은 비상이 걸렸다. 좁은 도로로 차들이 밀려들고 삽시간에 뒤엉키더니 길은 주차장으로 변했다. 서로 앞 다퉈 울려대는 경적소리가 고막을 찢을 지경이었다.
집집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데서 밀려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예나와 로아네 부모들도 서둘러 빵집과 채소 가게 문을 닫았다. 이런 중요한 때에 하루 생업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가족의 앞날이 걸린 일이었다. 빨간 구두만 있으면 빵집 채소 가게가 문제가 아니었다. 턱없이 부족한 벌이로 딸의 무용 수업비조차 걱정하던 일은 이제 지나간 옛날 일이 될 터였다. 진짜 빨간 구두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온 거다.
“예나는 지금 어디 있대? 얘는 이 일을 알고 있나?”
예나 아버지가 제빵 도구들을 주방 서랍에 허둥지둥 쓸어 담으며 물었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평생을 고이 애지중지 다루던 물건들이었다. 예나 엄마도 바깥 진열장의 빵들을 모아 들여오다 빵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다른 때 같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다. 엄마는 떨어진 빵을 주우며 바삐 대답했다.
“아까 벌써 달려가던걸. 로아랑 손잡고.”
로아네 집에서도 부모 사이에 똑같은 얘기가 오갔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아이는 아까부터 광장 인파 속에 벌써 파묻혀 있었다.
“뭐 좀 보이니?”
“아니, 앞사람들 뒤통수밖에 안 보여.”
“이리로 온 건 분명하대?”
“본 사람이 있다잖아. 이 광장에서.”
두 아이는 인파에 이리저리 떠밀리면서도 부지런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보면 바로 잡아야 해.”
“당연! 잽싸게 잡을게. 아무한테도 양보 안 할 거야.”
말을 마친 예나가 멈칫했다. 로아도 어깨를 으쓱했다. 예나가 얼른 말을 바꿨다.
“너만 빼고. 우리는 같이할 거니까.”
두 아이는 마주 보고 생긋 웃었다. 어쩌면 잡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빨간 구두를 눈으로 볼 수만 있어도 능력을 조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를 등목 태운 젊은 부부도 열심히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광장 왼편으로 왈칵 쏠렸다. 오른쪽 낡은 집 이층 발코니에서 노인 하나가 물뿌리개로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뿌리개에서 흩뿌려져 나온 물이 사람들 머리 위로 튄 것이다. 골목에서 큰 개를 앞세우고 중얼거리며 예나와 로아 옆으로 지나가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세상일에 아랑곳 않고 기르던 꽃들에게 물 주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 바람에 머리와 옷에 물이 튄 사람들이 노인에게 삿대질을 했다. 눈이 퀭한 청년도 거기에 있었다. 삿대질하는 사람들을 나이 든 사람들이 나무랐다. 나무라는 사람들을 청년 일행들이 또 욕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 말싸움이 벌어졌다. 말싸움이 몸싸움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구 휘두른 주먹이 빗나가 엉뚱한 사람들을 후려쳤다. 엉겁결에 주먹질을 당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항변했다.
애꿎은 일을 안 당하려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인파가 크게 술렁였다. 그러느라 또 사람들이 쏠리고 넘어졌다. 넘어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른 손을 놓친 아이들이 빽빽거리고 울어댔다. 경찰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나와 로아도 서로를 소리쳐 불렀다.
“로아야! 괜찮니?”
“응, 난 괜찮아! 넌?”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기가 아니래! 옛날 교회당 앞이래!”
사람들이 우뚝 멈췄다.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거센 물줄기가 되어 바로 방향을 틀었다.
“옛날 교회당이래! 교회당으로 가!”
예나와 로아도 똑똑히 들었다.
“뭐? 여기가 아니고 옛날 교회당?”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예나도 몸을 돌렸다.
“우리도 가자.”
로아가 뒤에서 소리쳤다.
“같이 가!”
예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 신발이 벗겨졌어. 예나야, 기다려!”
로아가 또 소리쳤다.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빨리 가야 해. 기다릴 수 없어.’
로아가 계속 소리쳤지만 예나에게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로아가 울음 섞인 소리로 다시 불렀다.
“예나야, 같이 가!”
예나는 귀를 막고 뛰었다.
‘아니, 싫어! 내가 먼저 갈 거야. 내가 잡을 거야. 빨간 구두는 내 꺼야!’
“아아악!”
로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예나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보았다. 로아가 넘어져 있었다. 로아를 타넘고 다른 사람들이 달려왔다. 넘어진 로아를 밟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먹이를 쫓는 동물들 같았다. 순간 예나는 사람들의 눈빛이 자신을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예나는 오싹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이 예나의 어깨를 부딪치며 스쳐 지나갔다.
잠시 뒤 예나는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한 거지? 로아를 내팽개치고 나 혼자……?’
퍼뜩 손을 내리고 달려온 쪽을 살피자 넘어진 로아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몇 사람이 로아를 타넘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개를 앞세운 노인이 로아 쪽으로 힘겹게 다가가고 있었다.
“로아야.”
예나는 다급하게 로아에게 달려갔다. 노인이 로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로아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로아야.”
“…….”
예나가 다가가 팔을 잡자 로아는 고개를 돌렸다.
“로아야…….”
예나는 소리가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로아는 예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로 로아의 상태를 살피고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톡톡 쳤다.
“춤을 잘 출 발이구나.”
노인의 짧은 수염이 햇빛을 받아 빨갛게 빛났다. 노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헛것에 지지 마라, 얘들아.”
노인은 개를 앞세우고 자기 집 쪽으로 다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 모습을 예나도 로아도 잠자코 지켜보았다. 로아가 예나에게로 눈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바닥에 앉아 있게 할래?”
로아 말에 예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예나는 얼른 로아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일으켜 세웠다.
“괜, 찮아?”
예나가 흙 묻은 로아의 옷자락을 털어 주며 물었다.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 찮, 아.”
로아가 두 팔을 훨훨 활개 쳐 보였다. 예나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친구를 잃을 뻔했다. 예나는 가만히 로아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거의 다 옛 교회당 쪽으로 몰려가자 남은 건 단순한 구경꾼들과 관심 없는 소수와 빈 광장을 차지하게 되어 신이 난 꼬마들뿐이었다. 예나와 로아는 손을 잡은 채 그대로 한참 있었다. 예나가 툭 말을 던졌다.
“우린 가지 말자.”
예나 말에 로아가 돌아보았다.
“생각해 봤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빨간 구두 같은 건 없는 것 같아. 지금까지 어떤 구두도 진짜가 아니었다며.”
로아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아. 그냥 최고가 된다는 거, 사실, 말이 안 돼.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
예나가 씩 웃었다. 예나는 갑자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땅을 딛자 시원하고 보드라운 흙이 예나의 발바닥을 간질였다.
폴짝. 예나가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올랐다. 발바닥에 닿은 흙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훌쩍! 예나는 더 크게 뛰어올랐다가 땅에 내려딛었다. 맨발에 닿는 흙과 바람이 괜찮았다.
“너도 해봐. 이거 무지 기분 좋다.”
“진짜?”
로아도 웃으며 한 짝만 걸치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로아도 예나처럼 따라했다. 폴짝. 훌쩍! 로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우리 그냥 이렇게 춤출까?”
“맨발로?”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아도 맞받아 끄덕였다. 예나가 활짝 웃었다. 로아도 해맑게 웃었다.
“그래. 우리 맨발로 추는 거야. 빨간 구두 필요 없어. 우리는 그냥 얼마든지 멋지게 출 수 있어. 그치?”
두 아이는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옛 교회당 쪽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한갓 기념품 상점들만 교회당 앞에 그득 들어차 하릴없이 법석거리기만 하는 곳. 사람들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신, 빨간 구두는 정말 거기에 있을까.
두 아이는 잠시 소란한 소리를 들어 보다 다시 서로를 바라보고는 반대편 개울 길로 나풀나풀 뛰어갔다. 서로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벗어든 낡은 신발들을 든 채. 두 아이는 간간이 뛰던 발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아이들의 춤은 세상 누구도 출 수 없는 힘차고 아름다운 춤이었다.


얼마 뒤 빨간 구두가 먼 남쪽 나라 어느 도시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다 북쪽 고산 지방에서 보았다는 소문도 들렸다. 마을의 몇몇 사람들이 짐을 싸 고산 지방으로 떠났다. (*)














작가소개 / 임어진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다른 어떤 일도 이만큼 재미있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숲도 좋아한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밀려들면 이야기하고만 논다. 『델타의 아이들』, 『너를 초대해』, 『괜찮아신문이 왔어요』, 『아니야 고양이』, 『사라진 슬기와 꿀벌 도시』, 『영우의 비밀친구』, 『이야기 도둑』, 『또도령 업고 세 고개』, 『보리밭 두 동무』, 『이야기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사라진 악보』, 『오방색이 뭐예요?』, 『말과 글은 우리 얼굴이야』, 『가족입니까』(함께 씀), 『광장에 서다』(함께 씀) 등 여러 권을 썼다.


삽화가 소개 / 조경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전공. 미디어아티스트이자 감독.
영상,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만들고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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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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