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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 작성일 2012-04-26
  • 조회수 2,352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노인장, 윗층에서 주무실 건가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사내는 믿어지지 않다는 양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을 받았다.
  “아마 그곳에선 잠이 제대로 오지 않으실 겁니다요. 하긴 저 낫살먹은 보비가 밤이 이슥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개의치 않으신다면 일단은 눈을 붙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친구 여편네가 꼭두새벽부터 깩깩대고 악다구니를 쓸 테니까 긴잠 주무시기는 글렀다고 봐야 할 거예요.”
  사내는 여관 주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주인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 했지만 곧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렇게 되묻는 내 머릿속엔, 최근 패러데이 씨와 함께 하기만 하면 예외 없이 떠오르던, ‘나는 어떤 식이든 좀 재치 있는 말대꾸를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실상 주민들은 내 다음 말이 어이지기를 고대하며 겸손한 침묵들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상상력을 구석구석 탐색한 끝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때야말로, 닭이 울 시각이겠군요.”
  그래도 얼마간은 정적이 계속되었다. 아마 주민들은 내 입에서 좀더 노골적인 비유가 튀어나올 걸로 예상한 듯싶었다. 허나 곧 내 표정이 장난스럽게 이지러지는 것을 본 그들은, 비록 개운치는 않았으나, 슬금슬금 웃음보를 풀어놓았다. 이것을 마무리로 그들은 다시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열중했으며, 작별인사를 서로 나눌 때까지, 이들과의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다.
  처음 내가 그 재기 넘치는 답변을 생각해냈을 때는, 스스로 꽤나 대견스럽고 흐뭇하게까지 여겼으나 주민들의 반응이 기대치에 못 미쳤으므로 솔직히 약간은 실망했었다.
  근자 몇 달에 걸쳐서 나는 이 분야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왔기 때문이다. 얘기인 즉슨, ‘농담 주고받기’에 대한 패러데이 씨의 은근한 기대에 자신 있게 부응할 의도에서, 이렇듯 갈고 닦은 기량을 기존의 내 직업적 재능 속에 편입시키려 했음이다.
 
 
작가_ 가즈오 이시구로 - 1954년 일본 출생, 1960년 영국으로 이주.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나를 보내지마』 등의 저서가 있음.
낭독_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에 출연.
구본석 - 배우. 연극 <하얀 자화상>, <가마솥에 누룽지> 등에 출연.
출전_ 『남아 있는 나날』(세종서적)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김은미
프로듀서_ 김태형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얼마나 될까요? 요즘 부쩍 그 생각을 하는 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지인 때문입니다. 잠든 그의 머리맡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의 회사에서 출간하게 될 시집 목록이 적힌 메모장, 단 한 줄만 남겨둔 미완성의 시. 그는 내일 아침 등교할 아이들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하다 잠들었을지도 모르죠. 우린 정말 내일 일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어느 날이 되었든 우리 머리맡엔 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어요.
  스티븐스는 뼛속까지 집사인 사람예요. 완고한 데다 규칙을 벗어나는 걸 질색하는 그가 지금 농담이랍시고 한 마디 던졌네요. 부단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아요. 그가 농담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오직 하나 새로운 주인이 농담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고용주라면 자신이 부리는 집사에게 농담의 화답쯤은 기대할 거란 생각을 하고 의무를 다하기로 한 거죠. 이유가 어찌 되었든 농담을 하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앞뒤 꽉 막힌 노인네가 아니란 거죠. 과연 희망과 기쁨이란 게 있을까 싶은 그의 남은 나날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지금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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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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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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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건

  • chonnom

    감사합니다. 하성란 작가님, 행복했었습니다. 문장 갈피마다에 배어있는 사유의 시간들, 곧 삶이었겠지요.님의 평안을....

    • 2012-05-03 15:42:37
    chonn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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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 작가님의 끝인사에 조금 울적해지는 걸 보니 그새 정이 든 모양입니다. 작가님 소설들 찾아 읽으며 달래야겠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 2012-04-27 08:42: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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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우리가 젊거나 혹은 늙었거나, 삶의 전 과정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지금까지 좋은 글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2-04-26 18:50:1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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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그동안 좋은 글을 물어다 주시는라 고마웠습니다...애쓰셨어요...또 뵈올 날있겠지요..직접 오셔 문 두드리고,전해 주셨으면 따스한 차 한잔이라도 내어 놓았을텐데,드신 듯 하여이다.^^

    • 2012-04-26 09:41:2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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