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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 작성일 2010-12-23
  • 조회수 2,527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체사레는 얼굴이 새카맣게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수중에는 생선도 없고 돈도 없고 다른 물건들도 없었다. “나, 걸렸어.” 이틀 동안 그에게 말을 걸 도리가 없었다. 그는 고슴도치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몸을 웅크린 채 짚더미 요 위에 누워 있었고 식사 때에만 내려왔다. 평상시와는 다른 무슨 일이 그에게 생긴 것이다.
나중에, 후덥지근한 날씨의 기나긴 어느 저녁에 그는 나에게, 만약에 알려지면 자신의 사업적 명성에 손상이 갈 것이므로 다른 데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 일을 말해주었다. 사실인즉, 처음에 사람들을 믿게 만들려고 애썼던 이야기처럼 잔혹스러운 러시아 군인이 포악하게 그에게서 생선을 잡아챈 것이 아니었다. 진실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선을 선물했다고, 체사레는 부끄러움에 가득 차서 내게 고백했다.
그는 마을로 갔었다. 이전에 이미 수법을 써먹은 고객들을 피하기 위해 주도로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대신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택했다. 수백 미터를 나아간 뒤 그는 조그만 외딴집 한 채를, 아니 플레이트와 벽돌을 아무렇게나 쌓아올려 만든 바라크(막사) 하나를 보았다. 밖에는 검은 옷을 입은 마른 여자가 있었고 문지방에는 창백한 세 아이가 앉아 있었다. 체사레는 다가가서 여자에게 생선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생선을 물론 원하지만, 그 대신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과 아이들이 이틀 전부터 굶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또한 체사레를 바라크 안으로 들어오게 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개집 안처럼 짚으로 된 거적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너무나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체사레는 생선을 바닥에 던져주고 부끄러운 나머지 도둑처럼 도망쳤다.

작가_ 프리모 레비 -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으며, 유대계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제3수용소에서 노예의 삶보다 못한 나날을 지냈음.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토리노로 돌아왔고 19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며 작품활동 시작. 1947년 처녀작이자 대표작인 『이것이 인간인가』를 발표. 『휴전』『주기율표』『멍키스패너』『지금 아니면 언제?』『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이 있음. 스트레가 상, 비아레조 상, 캄피엘로 상 등을 수상함. 1987년 토리노의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함.

 

낭독_  박경찬 - 배우. <밑바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등 출연.
김근 - 시인.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등이 있음.

출전_ 『휴전』(돌베개)
음악_ 자닌토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절박하게 굶주린 사람에게 생선을 선물한 게 왜 그리 부끄러웠을까요. 체사레가 로마의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타고난 상인이라서요?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나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의 한 마을에 수용된 체사레, 그 마을의 시장에 자리까지 확보하고 물건을 사고팔지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을 주입해 무게를 불린 생선을 팔러 나간 체사레. 그가 걸려든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장사꾼인 그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지요. 이익을 남기는 게 본분인 장사꾼으로 하여금 이득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게 만든 무엇. 이 일이 체사레의 마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 궁금해집니다.

문학집배원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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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꿈 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연과의 다감한 융화(融化)가 아닐까. 자본은 융화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침탈(侵奪)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의 품속을 꿈꾼다. 특히나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메말라가는 인성 때문인지, 아니면 시멘트 문명의 염증 때문인지 모성에 흠뻑 젖고자 한다. 시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시 속에서 창출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연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데다가 그 조홧속이 천변만화(千變萬化)라 간절함만 솟구칠 뿐, 대부분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다. 시인들은 그 문턱에서 허덕이며 자기 문자속의 졸렬함이나 한탄하기 일쑤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 아닐까. 자연은 그저 말로만 자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조홧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 천변만화의 변신에 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변신이어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아닌 듯 그러하게, 그러한 듯 아니게'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침내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변신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전이라는 뜻이 가미된 변전(變轉)이어야 하지 않을까. 변전, 그렇다. 변전으로 물질적 속성마저도 달라져야 비로소 '우주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새로운 자연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전은 쉽지 않다. 특히 현대사회에 살면서 변전으로 가는 길은 산 첩첩 물 첩첩이다. 자본 문명에 매몰된 비인간적이고 척박한 욕망이 자연과의 교감을 딱 가로막고 있다.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는 이 욕망은 범주의 경계가 없다. 이성과 감성을 두루 다 말아먹고 만다. 현대인들의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 여기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변전을 주춤거리게 하는 문자의 욕망쯤은 차라리 순진하다 할 것이다. 나는 천박한 욕망의 습윤(濕潤)이 자연계로 향하는 시의 발길을 붙잡는다고 믿는다. 자연과 인간, 혹은 물(物)과 아(我)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가 드문 이유도 다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근래에 이르러 폭발적인 관심 대상이 된 시인 백석쯤이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인 아닐까.이렇게 생각할 때 같은 연대에 김사인 시와 호흡하고 있음은 다행스럽다. 그도 또한 백석처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교감의 기를 순환하고 있는 듯 비친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작가․낭독_ 정우영 - 1960년 태어나 1989년 《민중시》로 등단했다.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집이 떠나갔다』,『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시는 벅차다』등이 있다. * 배달하며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초입부터 눈도 많이 내렸죠. 겨우내 산야가 훤합니다. 북국의 정취마저 물씬하여 위뜸 살던 백석 시인의 시들이 생각납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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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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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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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건

  • 익명

    부끄러운 적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것도 의도하지 않은."나, 걸렸어." ..무게를 거짓으로 불린 생선이라니... 그것을 받은 가족은 그저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체사레의 양심은 그것으로 자신의 이득을 챙기던 때보다 더 아팠나 봅니다.

    • 2010-12-27 20:11:0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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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인간은 정말 근본적으로는 착한가봐요. 언젠가 진심을 만나게 되면 늘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지요.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 2010-12-27 04:34:1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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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숨겨져 왔던 깊은 양심에 햇빛이 거울을 투영하듯 자신의 그 무엇인 속내을 비추어 보였을 거라 보아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작든 크든 이런 경험들을 하지요..

    • 2010-12-24 15:28:2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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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평소에 적선하지 않다가 하는 것이 부끄러웠나 보다. 잠재해 있던,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면 할수록 용기가 나고 행복해질 것이다.

    • 2010-12-24 00:02:4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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