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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도르프만의 「독자」중에서

  • 작성일 2012-05-24
  • 조회수 1,226




 
 아리엘 도르프만의 「독자」 중에서
 
 
 
 
  알바로 빠라다는 혼돈 그 자체라고 할 만큼 어지러운 서류더미에 둘러싸여, 열렬한 기대감에 충만한 손가락 끝을 고색창연한 레밍턴 타자기에 올려놓은 채 탁자에 앉아 있었으나, 바라지 않던 방문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타자키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돈 알폰쏘를 보고는 일어서서 맞이하기는커녕 “잠깐만요!” 하고 소리친 후,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막 쓰고 있던 문장에 겁나게 달려들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는 계속 중얼거리면서 반쯤 채워진 페이지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는 마치 피아노를 치듯 혹은 타자기와 사랑을 나누듯, 돈 알폰쏘나 가족들의 존재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타자기에만 몰두했다.
  “제가 방해가 된다면……” 돈 알폰쏘는 과감히 말문을 텄지만 그의 조바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 남자가 놀랄 만한 격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저토록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여인과 아이들 옆에 서서 지켜보면서 묘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마치 죽음같이 싸늘한 겨울날 버스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버스 안은 따뜻한데 밖의 거리에는 비가 오고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싶은 느낌, 아니 영원히 내리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버스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감각에 몸을 맡긴 채 그냥 졸음에 빠지고 싶은 느낌이었다.
 
  (중략)
 
  그 남자는 탁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됐소.” 남자는 그와 악수를 하고는 참하게 고쳐놓은 오래된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어떤 생각을 완전히 마무리해놓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이해하시죠? 단어들이란 무자비하죠.”
  “그럼 인물들은요?” 돈 알폰쏘는 왼쪽 귀를 긁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물었다.
  “인물은 더하지요.” 그 남자가 말했다. “인물들은 용서하는 법이 없죠.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공동묘지의 한 장면과 거기 묻히는 사람의 아들이 태어나는 장면을 섞으려 했죠. 내가 마땅히 써야 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으면, 그 친구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닐 거요. 자유를 주지 않으면 인물들은 끔찍하게 나오는 법이지요.”
 
 
 
  작가_ 아리엘 도르프만 - 1942년 아르헨티나에 태어나 칠레에 정착하여 작가로 활동하다가 피노체트의 쿠테타로 미국으로 망명함. 칠레의 척박한 현실을 다양한 장르로 다루었고 대표작으로 시집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희곡『죽음과 소녀』, 『독자』, 장편소설 『과부들』, 『콘피덴쯔』 등이 있음. 희곡 「죽음과 소녀」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
 
  낭독_ 박웅선 -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에 출연.
      서민균 - 배우. 연극 〈혜화동파출소2〉, 〈관객모독〉 등에 출연.
  출전_ 『우리 집에 불났어』(창비)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신분을 속인 채 가난한 작가의 아파트를 찾아온 돈 알폰쏘. 그는 독자입니다. 엄청난 독자입니다. 그는 정보부 출판물 심의기구에서 이십 년 동안 악명을 떨친 베테랑 검열관이지요. 그는 첫 장만 봐도 정권 비판이 노골적인 원고를 읽다가 소설에 빠져들고 심지어 등장인물과는 동일시하기에 이릅니다. 검열하다가 독자가 된 형국입니다. 급기야 작품 후반부의 궁금증을 못 견뎌 작가를 방문하기에 이릅니다. 작가는 한 주에 단 하루, 직장도 쉬고 그나마 집이 조용해지는 토요일에 창작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설의 결말에 대해 물었을 때 작가는 “우리 글쟁이들의 황금률을 아시죠? 책이 나오면 사봐라.”고 합니다. 이제 이 소설은 알폰쏘 자신을 위해서도 출판 인가를 내야 합니다. ‘모가지를 건’ 독자에 의해 책은 시민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검열관은 마치 서점에서 제 책을 몰래 관찰하는 작가처럼, 그보다 더 전율합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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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꿈 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연과의 다감한 융화(融化)가 아닐까. 자본은 융화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침탈(侵奪)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의 품속을 꿈꾼다. 특히나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메말라가는 인성 때문인지, 아니면 시멘트 문명의 염증 때문인지 모성에 흠뻑 젖고자 한다. 시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시 속에서 창출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연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데다가 그 조홧속이 천변만화(千變萬化)라 간절함만 솟구칠 뿐, 대부분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다. 시인들은 그 문턱에서 허덕이며 자기 문자속의 졸렬함이나 한탄하기 일쑤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 아닐까. 자연은 그저 말로만 자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조홧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 천변만화의 변신에 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변신이어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아닌 듯 그러하게, 그러한 듯 아니게'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침내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변신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전이라는 뜻이 가미된 변전(變轉)이어야 하지 않을까. 변전, 그렇다. 변전으로 물질적 속성마저도 달라져야 비로소 '우주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새로운 자연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전은 쉽지 않다. 특히 현대사회에 살면서 변전으로 가는 길은 산 첩첩 물 첩첩이다. 자본 문명에 매몰된 비인간적이고 척박한 욕망이 자연과의 교감을 딱 가로막고 있다.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는 이 욕망은 범주의 경계가 없다. 이성과 감성을 두루 다 말아먹고 만다. 현대인들의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 여기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변전을 주춤거리게 하는 문자의 욕망쯤은 차라리 순진하다 할 것이다. 나는 천박한 욕망의 습윤(濕潤)이 자연계로 향하는 시의 발길을 붙잡는다고 믿는다. 자연과 인간, 혹은 물(物)과 아(我)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가 드문 이유도 다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근래에 이르러 폭발적인 관심 대상이 된 시인 백석쯤이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인 아닐까.이렇게 생각할 때 같은 연대에 김사인 시와 호흡하고 있음은 다행스럽다. 그도 또한 백석처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교감의 기를 순환하고 있는 듯 비친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작가․낭독_ 정우영 - 1960년 태어나 1989년 《민중시》로 등단했다.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집이 떠나갔다』,『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시는 벅차다』등이 있다. * 배달하며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초입부터 눈도 많이 내렸죠. 겨우내 산야가 훤합니다. 북국의 정취마저 물씬하여 위뜸 살던 백석 시인의 시들이 생각납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

  • 웹관리자
  • 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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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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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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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어떤 생각을 완전히 마무리해놓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자유를 주지 않으면 인물들은 끔찍하게 나오는 법이지요. 메모가 너무 쌓이기만 하는 것 같아서 쉬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2-05-29 16:30:4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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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글의 힘이란, 작가의 힘이란, 바로 이 순간 나를 '독자'의 독자가 되게하는, 그래서 독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운 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 2012-05-24 08:24:2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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