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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라이팅 클럽」 중에서

  • 작성일 2011-06-23
  • 조회수 1,705




 
강영숙, 「라이팅 클럽」 중에서
 
 
 
 
글을 쓰고 싶은 순간엔 그 특유의 모드가 있는 것 같다. 그 모드에 접속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모드가 바뀌는 순간도 있다.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처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느꼈던 순간. 안채 할머니의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입안을 데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홧홧거리는 입안의 통증과는 관계없이 몸에서 약간 힘이 빠지며 몽롱해진 한 순간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졌던 것 같다.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이라는 게 있을까. 금방 생각나는 건 일단 날씨가 너무 더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날씨와 소설은 누가 뭐래도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너무 배가 불러도 안 되고 너무 배가 고파도 안 된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한다.
그리고 이것 또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는 공공장소에 있을 때 더 잘 써진다. 누군가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척추를 똑바로 하고 노트북을 뚫어져라 노려보게 된다. 북카페에 나와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익명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게 이런 느낌을 가져다준다. ‘어쭈!’ 다만, 디스크 예방에 좋은 의자가 있고 노트북 도둑만 없다면 북카페, 도서관, 아이스크림 가게까지도 모두 다 괜찮다.
그다음 조건은 좋은 의자보다도 더 중요하다. 깊고 깊은 내장 속까지의 복수심, 배신감, 허무 따위의 복잡한 감정들로 꽉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성 정맥기능부전 현상처럼 혈관 여기저기가 커다란 슬픔으로 꽉 막혀 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조건들과 더불어 한두 시간은 복수심으로, 또 한두 시간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또 한두 시간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자각에 의해 세 날의 칼을 번갈아 내밀 듯하면, 글은 써진다. 써지긴 개뿔! 누군가 거짓말 말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 할머니네 집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혀를 데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하나의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칼에 벤 듯 아픕니다. 내 상처는 파랗습니다. 나의 영원한 쟈-앙.’ 그 문장을 여러 차례 곱씹고 허공에 대고 발음하고 또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고통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 다른 감정으로 전이된 것 같았다.
 
 
 
 
◆ 작가_ 강영숙 -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8월의 식사」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06년 첫 장편소설 『리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2011년 단편 「문래에서」로 김유정문학상을, 같은 해 장편소설 『라이팅 클럽』으로 백신애문학상을 수상함. 소설집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가 있음.
 
낭독_ 문지현 - 배우 및 성우. 연극 〈경숙, 경숙아버지〉 등에 출연.
출전_ 『라이팅 클럽』(자음과모음)
음악_ 박세준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극중에서 소설가 역을 맡은 배우가 마당으로 뛰쳐나옵니다. 소설을 쓰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단어가 당최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물론 시청자인 저는 알고 있었지요. 바로 메뚜기떼. 그 장면 때문일까요. 글을 쓴 뒤로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놓고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들 무렵 떠오른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종이에 적어두려는 거지요.
물론 지금도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비몽사몽. 처음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획도 정확치 않은데다 글자들이 마구 겹쳐 있었지요. 그 뒤로 생각한 것이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두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리 괴발개발이어도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겠다는 일념으로. 하지만 일어나보면 여전히 알아볼 수 없거나 알아본다 해도 왜 써놓았는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일 때가 많습니다. 어젯밤엔 분명 멋진 이야깃거리였는데 말이죠.
아무튼 글쓰기의 모드에 접속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구요. 그러니 늘 메모할 수첩과 연필을 준비해두세요. 입천장을 데일 듯, 찾아올 당신의 첫문장, 궁금합니다.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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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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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감사해요좋은글

    • 2011-06-26 00:29:5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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