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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생강」 중에서

  • 작성일 2011-09-15
  • 조회수 1,414




 
천운영, 「생강」 중에서 
 
 
 
 
낯선 남자. 너무 가까이 서 있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가깝다.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며 남자의 얼굴을 본다. 침울함과 통증이 피부에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염될 것 같은 불길한 얼굴.
남자가 한발짝 앞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너 이 집 사냐?”
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대답한다.
“왜,요?”
“네 아버지가 안이냐?”
“누구,세요?”
“네 아버지가 안 맞아?”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남자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남자가 이를 악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네 아버지 어딨어!”
이를 가는 듯한 섬뜩한 음성. 낮고 조용하지만 그 속에 번득이는 살기. 몸을 뒤로 뺀다. 내가 움직이자 어깨를 짓누르는 악력은 더욱 억세진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요!”
“네 아버지 어디로 갔어! 어디로 숨겼어! 어디로! 숨긴다고 우리가 못 찾을 거 같아? 어디로 잠적했어? 말해, 어서 말해!”
남자는 내 어깨를 앞뒤로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깨가 아프다.
“아파요! 이거 놔요. 아프단 말야! 아프다고옷!”
발악하듯 소리를 지른다. 어느 순간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자신의 두 손을 낯설게 내려다본다. 무언가가 남자에게서 모든 기력을 빼앗아간 듯, 두 팔이 맥없이 툭 떨어진다. 남자가 등을 돌려 걸어간다. 풍경도 지워지고 소리도 사라진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비척이며 걸어가는 한 남자의 왜소한 등만 보인다. 남자의 등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어둠속으로 완전히 스며든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 어디로 잠적했어!
 
 
 
작가_ 천운영 -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등이 있음.
 
낭독_ 윤미애 - 배우. 〈12월 이야기〉, 〈늦게 배운 피아노〉 등 출연.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 출연.
출전_ 『생강』(창비)
음악_ 임승태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예전엔 그런 ‘아버지’들이 더러 있었지요. 초인종이 울리고 “∼씨 계세요?”라는 소리가 나면 아이들 등을 밀며 “아버지 지금 없다고 해라” 라고 시키는 아버지들 말입니다. 제가 살던 골목엔 그런 아버지들이 꽤 있었지요. 대부분 술값 외상을 독촉하러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때 그 기분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죄책감에 덧붙여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의문.
다짜고짜 자신을 붙들고 아버지 어디에 숨겼냐고, 그러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아느냐고, 어디로 잠적했느냐고 묻는 이가 있습니다. 대학 새내기가 된 딸은 무섭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찾고 있는 건 ‘우리’입니다. 지금껏 자신이 보아왔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잘못 찾아온 사람이면 좋을 텐데요.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일까요. 도대체 내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당신, 누구인가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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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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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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