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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탕약

  • 작성일 2018-04-01
  • 조회수 1,190

목련탕약(木蓮湯藥)

유형진


목련 꽃망울이 가지 맨 끝 솜털 속에 자고 있다
이 아파트 단지엔 목련이 유난히 많다
목련꽃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온 천지에 탕약 달이는 냄새
집 안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폐병 환자가 있는 듯


잎도 없이 알몸으로 봄을 앓는
목련이 흰 촛대 같은 꽃망울을 들면
마침내 뿌리 끝 탕기에 불이 오른다
검게 젖었던 탕기는 차츰 달구어지다
가장 서럽게 어두운 날,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곤로 탕기 위 훈김에
서성이는 봄눈들이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 어느 하늘처럼
하루 종일 저녁같이 깜깜한,
그런 날을 골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촛대에 올린 흰 빛을 터트리고 마는데


흰 종이에 쌓인 약 한 재 모두 달일 쯤
꽃잎 터질 때처럼 흙색 꽃잎들
무거워 멀리 날지도 못하고 곧장 바닥으로 툭,
아무나의 발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천지에 목련탕약 냄새는 더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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