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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

  • 작성일 2021-03-01
  • 조회수 5,099

[단편소설]



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



안보윤




1



남자는 딱 한 번뿐이라고 말했다.
네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들어갔다 그 침대 위에서 딱 한 번 울고 나왔을 뿐이라고.

남자의 말은 하진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진은 자신의 집에 누구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가족들조차 하진의 집 비밀번호를 몰랐다. 아니, 하진의 집 주소를 아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남자 역시 조교 신분을 남용해 하진의 개인정보를 뒤져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었다. 남자는 하진의 대학 선배이자 학과 조교였으나 하진에겐 그저 타인이었다. 하진은 행정 조교라는 직함 외에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 남자가, 하진의 집 앞에서 불법 침입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채 하진에게 ‘네가 궁금해서 그랬다’고 말하고 있었다.
― 네가 날 한 번이라도 봐줬다면 내가 이런 짓까지 했겠냐? 내가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진짜 딱 한 번, 아무것도 안 하고 진짜 딱 한 번 울고 나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애원조였으나 내용은 정반대였다. 하진이 마지막으로 남자를 본 건 반년 전이었다. 과사무실 앞 게시판에 강연홍보물을 붙이고 있던 남자 옆을 하진이 지나쳤다. 몸을 돌린 남자가 홍보물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하진에게 말했다. 다음 학기에 이 사람이 전공 강의를 할 거다. 하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응수했다. 전 다음 학기 휴학해요. 하진은 휴학했고 연말인 지금까지 학교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짧은 대화의 어디가 ‘이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되는지 하진은 알 수 없었다.

경찰은 로맨티시스트였다. 하진에게 그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사랑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했다. 하진이 남자와는 제대로 얘기해 본 적조차 없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짝사랑은 괴롭지. 괴로우면 이럴 수 있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경찰이 뒷짐을 지고 서서 흥얼거렸다. 찬찬히 잘 봐봐요, 인연이라는 게 별거 아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다니까? 하진은 남자가 자신의 집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어딘가에 숨어서, 며칠이고 숨죽여 자신을 지켜보며 여덟 자리 숫자를 하나씩 빼내지 않았겠냐고 항변했다.
― 사랑이 그래. 사랑이, 사람을 아주 끈기 있게 만들어.
경찰이 흥얼대며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이상하게 친근하고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이한 공조가 하진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같이 출동한 경찰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말했다.
―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훌쩍거리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진이 아니라 경찰을 향해서였다.
― 정말 잘못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이 말이야.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경찰이 남자를 다독이고, 남자가 경찰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며 굽신대는 모습을 하진은 기가 막힌 채 바라보았다. 경찰이 왜 남자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왜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경찰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있을까. 하진의 집에 불법 침입이 일어났고 하진이 신고해 범인을 잡았음에도 모든 처리 과정에서 정작 하진만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 집 앞은 현장이 아니래요.
어찌 됐냐고 묻는 옆집 사람에게 하진은 말했다.
― 집 안에 들어가 있는 걸 잡으면 현장인데, 집 앞에 서 있는 건 현장이 아니래요. 내 집 도어록에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도, 그게 다르대요.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하진의 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경고 없이 훈방되었다. 상습범인데도요? 옆집 사람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침입 증거가 없대요.
옆집 사람은 어제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던 하진을 불러 세웠다. 복도에서 오래 기다린 듯 뺨이 붉게 얼어 있었다. 괜찮아요? 다짜고짜 묻는 바람에 하진은 당황했다. 옆집 사람과 마주한 것도, 말을 나누는 것도 처음이었다.
― 낮에, 너무 크게 울길래요.
하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피자집 매니저로 일했고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일주일에 세 번 과외를 했다. 휴무일에는 종일 도서관에 있었다. 그런데도 옆집 사람은 한낮에 자주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울리는 날도 있고, 고함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다고. 그런데 아까는 한 시간 넘게 꺼이꺼이 울더라고요. 그. 옆집 사람이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그, 남자분이요.
하진의 낯빛이 변하자 옆집 사람은 제일 먼저 물었어야 할 것을 뒤늦게 물었다.
― 누군가와 함께 사시는 것 아니었나요?
― 나는 아무와도 안 살아요.
하진이 후들후들 떨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에서 놓친 음식물쓰레기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꽁꽁 얼어 있는 밀가루떡과 단무지 같은 것들을 옆집 사람이 조심스레 그러모아 봉투에 도로 넣어 주었다.

집 안은 서늘했다. 하진은 창문을 모조리 열어 12월의 바람이 집 안을 휩쓸도록 내버려두었다. 실내는 이미 엉망이었다. 어제 옆집 사람의 얘기를 들은 뒤 하진은 집 안 모든 곳을 뒤졌다. 선반 위와 책장 안, 싱크대 위와 수납장 안의 사물들을 전부 끄집어냈다.
하진은 전등갓을 벗겨내 안팎을 살폈다. 가전제품을 일일이 뒤집어 보고 선반 아래를 더듬었다. 화장실과 옷이 걸려 있는 행거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벽지가 들떠 검게 벌어진 구멍과 가구에 박힌 나사못을 손톱이 뒤집힐 때까지 긁고 떼어내고 돌려 봤다. 어디에서도 카메라가 나오지 않자 하진은 잠시 안도했으나 이내 새로운 불안에 휩싸였다. 그럼 대체 누가? 왜? 무엇을 하느라 어디에, 얼마나 머무른 거지? 하진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지금 하진은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경솔했다. 남자는 엉망이 된 집 안을 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어제의 하진이 오늘의 남자를 현장에서 도망치게 해준 셈이었다.
정신 차려. 하진은 집 안을 정리하며 곳곳에 말을 심었다. 정신 차려, 서하진. 증거를, 증거를 잡아야 해. 하진은 수납 상자 안에서 구형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CCTV 어플을 깐 구형 핸드폰을 책장 꼭대기에 설치하며 하진은 입술을 꼭꼭 물었다. 내일은 외부용 CCTV를 사서 현관 앞에 달자. 남자가 다시 이 집에 침입한다면, 그래서 핸드폰에 증거가 남는다면 하진은 이것을 사랑 운운하던 경찰 면전에 집어던질 작정이었다. 카메라를 눈치 채고 남자가 핸드폰을 부수거나 훔쳐가 버린다면 침입 정황은 오히려 확실해진다. 하진은 카메라 각도가 잘 맞는지 수차례 확인하며 핸드폰 위치를 조정했다.

그러다 문득, 하진은 책장 꼭대기에 매달리듯 기대 있던 몸을 뗐다. 딛고 선 의자가 덜걱거렸다. 다시, 다시라고? 하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가 정말로, 또 이 집에 침입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내가 없는 한낮이 아니라 내가 잠들어 있는 새벽에 저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선다면? 의자에서 내려서던 하진이 크게 비틀거렸다. 침대에 무릎이 닿자 하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가 여기, 이 침대에 앉아서 울었나?
여기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나? 저 의자에 발을 얹고 누워 고함을 질렀을까?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돌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남자의 흔적이, 체액이, 지문과 체온과 축축한 숨 같은 것이 남아 집요하게 하진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집 안 모든 곳에.
현장을 잡겠다는 오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곳은 현장 같은 게 아니라 하진의 공간이었다. 하진이 무방비하게 몸을 펼치고 시간을 부리고 일상을 누비던, 하진과 완전히 밀착된 삶의 공간이었다. 하진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속에서 깨달았다. 남자의 침입으로 인해 하진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상실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진의 공간을 완전히 훼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딱 한 번의 침입만으로.

비명을 지르며 집에서 뛰쳐나온 하진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옆집 사람이었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음에도 복도에서 오래 기다린 듯 뺨이 붉고 입 언저리가 푸르게 얼어 있었다.
― 나도 집에 도둑이 든 적 있어요.
옆집 사람은 집으로 도로 뛰어 들어가지도, 자신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가지도 못하는 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거실에 새카만 발자국이 몇 개나 찍혀 있는 거예요. 사라진 물건도 없고 어디를 뒤지거나 망쳐 놓은 흔적도 없었어요. 그냥 발자국만 남아 있었죠. 근데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내 집 천장과 사방 벽이 통째로 뜯겨 나간 기분이랄까. 한 달 넘게 집에 들어가질 못하다가 결국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어요.
옆집 사람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다는 듯 하진과의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벌려 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자기 집 현관문을 가리켰다.
― 우리 집으로 올래요?

옆집 사람은 답답하다 싶을 만큼 느리게 움직였다. 현관문을 열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하진에게 슬리퍼를 내주었다. 정작 자신은 맨발이었다. 하진은 여러 개의 쿠션과 좌식 테이블이 놓여 있는 거실 안쪽에 앉았다. 하진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뒤에야 옆집 사람 행동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하진은 옆집 사람이 내놓은 구운 귤을 바라보았다. 가로로 두껍게 잘라 표면이 바삭해질 때까지 구운 귤이었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뜨거운 물 한 잔과 구운 귤. 하진은 어느 것에도 손대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하진은 다시금 십 분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경솔했다. 옆집 사람에게 아무와도 살지 않는다는 얘길 왜 해버렸을까.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친절한 건 뭔가를 숨기기 위함이 아닐까. 대체 왜 나를 기다렸나. 애초에 이 사람은 내 집에서 나는 소리에 왜 그렇게까지 귀를 기울였지?
빠르게 잔가지를 뻗는 의심 속에서 하진은 망설였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틀림없이 익숙했다.
환한 집 안에 들어와서야 정확히 마주한 옆집 사람 얼굴은 분명 하진의 기억 속에 있었다. 흐리고 끝이 둥근 눈썹과 동그랗게 여문 코끝. 납작한 물음표 모양의 귀가 머리통 쪽으로 바짝 누운 것도, 미묘한 각도의 주걱턱도 분명 기억에 있었다. 어디서 봤지. 하진은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졌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 노지귤이라 달지 않길래 좀 구웠어요. 불에 구우면 단맛이 강해지거든요.
옆집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하진과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표정과 움직임이 전부 노출되는 데 비해 하진에게 곧장 손을 뻗을 수 없는 위치였다. 시선이 어긋나도록 상체를 돌려 앉은 통에 하진은 길고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위험하지 않아. 네게 손대지 않을게. 자신의 호의가 우월감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듯한 저런 태도를, 하진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상대방을 배려해 주던 행동. 그러나 어딘가 무례할 정도로 천진하고 거침없던 호의. 수십 개로 조각나 있던 기억이 달칵,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얼굴과 장면과 이름이 동시에 떠올랐다.
― 유영?
옆집 사람 얼굴에 경계의 빛이 서렸다. 순간적으로 새어 나온 날것의 감정에 하진은 비로소 안도했다. 저 사람도 나를 경계하고 있어. 하진은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조금씩 풀었다. 상대방의 날선 경계가 지나치게 견고한 선의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상대방과 비로소 동등해진 느낌이었다.
구운 귤을 향해 손을 뻗는 하진에게 옆집 사람이 물었다.
― 나를 알아요?

2

하진의 중학교 시절은 참혹했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참담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진은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뼈가 부러지거나 피부가 뭉개졌다면 하진은 손쉽게 이해받았을 것이다. 보호받고 치료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진의 고통은 하진만이 알았다. 하진은 사춘기라는 단어를 경멸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아무나 손쉽게 내뱉는 무책임한 단어가 하진을 정의하는 게 싫었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사춘기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제멋대로 납득하며 등을 돌렸다.
― 거짓말 아니니?
보건 교사가 하진을 불러다 그렇게 물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었다. 보건 교사는 검사결과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하진에게 물었다. 장난으로 쓴 건 아니지? 사람들한테 관심 끌고 싶어서 이런 건 아니지? 정말, 진지하게 대답한 거 맞니? 하진은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한 심리검사에서 위험 등급을 받은 사람은 하진의 학년에서 모두 네 명이었다. 두 명은 장난이었다고 떠들고 다녔으므로 오히려 화제가 되지 않았다. 하진과 3반의 누군가를 두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그럼 쟤 자살하는 거야? 하진은 수업 시간 도중 자신을 불러낸 보건 교사를 저주하며 복도를 걷고 수업을 듣고 화장실에 갔다. 안 죽어, 안 죽는다고. 하진은 노트에 빼곡히 그런 글자들을 써넣었다. 누가 죽어 줄 줄 알고?

보건 교사는 하진의 담임선생에게, 담임선생은 하진의 부모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보건 교사는 청소년심리상담센터로 하진을 보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엄마가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다. 상담실에서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센터장인지 의사인지 단지 직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남자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니? 그럴 기분이 아니야? 하진의 엄마가 하진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하진을 달랬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선생님한테 다 얘기해 보렴. 하진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질문을 견뎠다. 어휘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남자는 전문 병원에서 정기적 상담을 받으라고 권했다. 여기서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라고.
상담실을 나온 하진은 노란색과 파란색 벽으로 둘러싸인 대기실에 앉았다. 의자 여남은 개가 놓여 있을 뿐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엄마는 직원에게 무언가를 묻고 어디론가 부산하게 전화를 걸었다. 분한 마음이 솟은 건 그때였다. 분명 자신의 의지로 침묵했음에도 누가 입과 숨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하진이 작게 헐떡이며 상체를 구부렸다.
― 웃기지도 않아. 부모하고 같이 상담을 받으라니.
누군가 하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발목을 돌리고 발끝을 까닥였다. 3반의 유영. 하진은 유영을 알았다. 아이들이 그만큼 수군대면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 애초에 부모 때문이 아니면 내가 이런 델 왜 오겠냐고. 안 그래?
유영이 투덜거리며 동조를 구하듯 하진을 바라봤다. 상담, 받았어? 하진이 묻자 유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가 안 왔어. 부모 없인 상담 못 받는대.
둘은 앞을 보고 앉아 가만히 숨을 골랐다. 복도에 울리는 하진의 엄마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명치께가 다시금 꽉 조여 왔다. 하진이 숨을 몰아쉬자 유영이 하진의 손을 잡았다.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영의 손은 아주 희고, 뼈마디가 가늘고, 손톱이 아주 짧게 잘려 있을 것이었다. 거스러미가 뜯긴 자국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었다. 유영은 하진을 돌아보거나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노랗고 파란 벽의 이음매를 살피듯 그저 앞만 보고 있었다.

엄마는 딱 한 번뿐이라고 말했다.
너를 죽이려 한 건 딱 한 번의 실수였다고.

아빠가 집을 나간 것이 도화선이 되었으나 이전에도 그들은 사이좋은 부부가 아니었다. 하진의 부모는 집 안 모든 곳에서 모든 문제를 두고 다퉜다. 끊임없이 서로의 자존심을 뭉개고 비난하고 이기죽거렸다. 니 부모, 너네 가족, 니 딸, 네 잘난 자존심, 네까짓 게 어디서 감히, 같은 말들을 주로 썼다. 싸움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때면 그들은 화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하진을 불러 다그쳤다. 네가 말해. 너 아빠 따라갈 거야? 엄마랑 살 거야? 너 지금 저딴 인간이랑 살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은 년이로구나! 하진이 울음을 터뜨리면 그제야 그들은 할일을 다 했다는 듯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누구도 하진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하진의 아빠는 철저한 사람이었고 가출 역시 그러했다. 옷가지와 가방, 넥타이는 물론 장식장의 양주들과 거실의 운동기구까지 빠짐없이 챙겨갔다. 신발장 위에 늘어놓았던 향수와 서재의 만년필 보관함까지 전부. 아빠가 챙겨가지 않은 건 하진뿐이었다. 하진의 엄마는 물건이 빠져나간 빈 공간의 문을 죄다 열어 두었다. 하진이 실수로라도 문을 닫으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하진의 엄마는 직장 권유로 휴직계를 냈다. 아빠 직장에 불쑥 찾아가 로비를 서성였고 아무 병원이나 찾아다니며 아프다고 호소했다. 약 봉투가 쌓여 갔으나 엄마는 어떤 약도 먹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모가 집으로 들어와 엄마와 하진을 돌봤다. 언니가 정신 차려야지 하진이는 어쩌려고 이래. 이모는 때로 엄마를 다그쳤다. 이 모든 과정을 하진은 빠짐없이 목격했으나 누구도 하진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넌 방에 들어가 있어. 하진의 엄마도 이모도 하진에겐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에도 엄마는 아빠와 끝없이 싸웠다. 하진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는 엄마의 말만을 들었다. 너,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 거야. 네 새끼 죽여 버리고 나도 콱 죽어버릴 거야!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했다.
하진은 자신의 방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깨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하진은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뒤척이다 잠들었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깼다. 엄마는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거실 불빛이 방으로 새어들어 하진은 바들거리는 눈꺼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가 옆에 앉았는지 침대에 누운 하진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마에 닿은 엄마 손에서 선득한 냉기와 물기가 흘렀다. 눈을 뜰까 말까. 하진이 고민하는 사이 엄마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하진이 눈을 번쩍 뜨자 엄마는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손을 떼진 않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엄마가 상체 힘을 실어 하진의 목을 눌렀다. 하진은 돼지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정신없이 할퀴고 잡아 뜯느라 엄마 손이 아니라 자신의 목과 뺨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몰랐다. 이모가 뛰어 들어와 엄마를 끌어낼 때까지도 엄마는 양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힘을 주느라 가운데로 한껏 몰린 눈코입이 튀어나올 듯 붉었다. 오 분, 어쩌면 삼 분도 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하진은 구역질을 하다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침대 모서리에 코가 찍힌 다음에야 비로소 고통이 밀려들었다.

뒤늦게 엄마는 하진을 잡고 오열했다. 하진의 코피를 닦아 주고 오줌으로 젖은 잠옷 바지와 속옷을 벗겨 주었다. 하진을 욕실로 데려가 따뜻한 물에 몸을 씻겨 주며 엄마는 계속 울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너무 괴로워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이모가 불안한 얼굴로 활짝 열린 욕실 문 앞을 서성였다. 그러나 엄마를 하진에게서 떼어 놓진 않았다. 엄마는 하진의 뜯기고 긁힌 뺨과 검붉게 멍이 올라오기 시작한 턱 아랫부분에 소독약과 연고를 발라 주었다.
― 엄마가 하진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거벗은 하진을 엄마가 꽉 끌어안는 바람에 다시금 오줌을 지리면서도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 한 번만 용서해 줘. 응?
몸이 식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진이 대답했다. 응. 엄마. 괜찮아요. 나도 사랑해.
다음날 엄마는 태연한 얼굴로 하진의 학교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진이 심한 장염에 걸려 일주일 정도 결석하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기묘한 생기가 돌았다. 엄마는 하진에게 떡볶이를 해주고 하진의 옆에 붙어 앉아 같이 동화책을 읽었다. 주말에만 허락하던 닌텐도를 꺼내 텔레비전에 연결해 주고는 ‘엄마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 하진의 귀에 속삭였다. 엄마는 정말이지 괜찮아 보였다. 하진은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없이 떡볶이를 토했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고 하진을 사랑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든 잠든 하진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그것 역시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목에 든 멍이 사라지는 데는 꼬박 삼주가 걸렸다. 노랗게 흐려진 멍을 폴라티로 가리고 하진은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니 집 안의 빈 곳이 모두 채워져 있었다. 이모 대신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가 하진을 맞았다. 우리 딸 보고 싶었어. 아빠가 미안하다. 그런 식의 사과를 하진은 엄마에게도 이모에게도 받았다. 하진은 달리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의 부모는 평범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등산복을 맞춰 입고 주말마다 산과 절을 찾아다녔다.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 몇 시간이고 차를 달렸다. 하진의 피아노 발표회와 초등학교 졸업식에 커다란 꽃을 들고 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었다. 하진은 그들이 하는 대로 잘 따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선 잠들기 전 몰래 방문을 잠갔다. 하진은 끝이 뾰족한 작은 머리핀을 머리맡에 두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누군가 갑자기 목을 조르면 얼른 손가락을 끼워 넣으라는 말 따위를 공식처럼 외웠다. 모로 누워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고 잤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상냥한 얼굴의 엄마가 아주 빠른 걸음으로 하진을 뒤쫓는 꿈을 꾸었다.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하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잠금장치를 몰래 풀어 두는 일을 그만두었다. 하진을 깨우러 온 엄마가 덜컥, 작지만 단호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이 좋았다. 엄마가 묻는다면 하진은 무슨 말이든 쏟아낼 작정이었다. 딱 한 번의 실수였다니, 살인과 실수만큼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조합이 또 있을까. 하진은 무엇도 잊지 않았고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했고 쉽게 숨이 엉켰다. 성난 기색에 예민했고 말을 더듬었다.
― 어머, 얘가 벌써 사춘기인가 봐.
엄마는 잠긴 문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진은 참담한 기분으로 사춘기를 경멸했다. 노트에 몰래 쓰던 말들을 심리검사지에 쏟아 놓은 건 그 때문이었다.

재검사는 보건실에서 이루어졌다. 2교시부터 3교시가 끝날 때까지, 하진과 유영은 보건용 침대에서 검사지를 작성했다. 얇고 질긴 커튼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3학년은 재검이 너무 많아서 시청각실에서 본대. 유영이 소곤거렸다. 보건 교사가 성교육 수업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유영은 커튼을 냉큼 치워버렸다.
― 이거 볼래? 나 이거 어제 생긴 거야.
유영이 교복 셔츠 소매를 끌어올렸다. 팔꿈치 위쪽으로 검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두껍고 각진 형태의 멍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멍 가장자리가 새까맣고 곳곳에 둥근 점 같은 게 찍혀 있었다. 이런 거 등에도 있어. 볼래?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 그래서 어제는 종일 엉덩이만 떠올렸어.
― 엉덩이?
― 오다기리 조의 엉덩이.
하진은 유영의 머릿속에도 검붉은 멍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애들이 수군대는 것처럼 정말 정신병자인 게 아닐까. 정신병자, 관심종자, 자살중독자. 아이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들을 전부 유영과 하진에게 빗대어 쓰고 있었다. 하진의 의심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유영이 짧게 웃었다.
― 나 영화 좋아하거든. 집에서는 계속 영화만 봐. 지난주에 웃기는 영화를 봤는데, 히미코라는 사람이 만든 요양원이 배경이었어. 히미코는 늙은 오카만데, 너 오카마 알아?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장남자 같은 건가 봐. 암튼 히미코가 요양원을 만들어. 가족에게 버려졌거나 사회에서 밀려난 게이나 여장남자들이 거기서 늙어 가는 거야. 서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되게 친하고 서로 엄청 챙겨 줘. 가족보다 훨씬 더 가족 같아. 거기서 히미코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어. 히미코를 사랑하는 젊은 게이 역할이 오다기리 조야.
유영의 설명은 너무 어지러웠다. 쾌활한 말투 때문에 귀에는 잘 들렸지만 머릿속까지 내용이 닿지 않았다. 하진은 검사지 문항을 읽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그 오다기리 조가 엄청 타이트한 바지만 입고 나오는 거야. 영화 속에서 누가 죽고 누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누구는 버려지고, 암튼 점점 심각한 얘기가 나오는데, 내 눈에는 오다기리 조 엉덩이만 보이는 거지. 흰 바지에 꽉 낀 엉덩이, 번들거리는 광택 천에 꽉 낀 엉덩이. 멜빵을 해도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바지를 위로 치켜 입고 말이야. 엉덩이가 저렇게까지 바지를 씹어 먹었는데 아무도 얘길 안 해줬나? 저게 콘셉인가? 누가 저 바지를 좀 내려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만 드는 거야, 영화를 보는 내내.
유영이 검사지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진이 흠칫 놀라자 괜찮아, 라고 말했다. 열심히 써서 내나 대충 써서 내나 결과는 똑같아. 유영이 동그라미를 한 개 두 개 더 그렸다.
― 어제 아빠가 나를 혼내는데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 누가 손을 뻗어서 반 뼘만 바지를 내려 주면 저 엉덩이가 숨을 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오다기리 조 바지를 반 뼘 내려 주는 상상을 했어. 영화 내내 꽉 끼어 있어서 그런지 잘 안 되더라고. 계속, 계속 엉덩이만 생각했어. 그랬더니 상황이 끝나 있는 거야. 이게 남긴 했지만.
유영이 이번에는 작은 사각형을 그린 뒤 새까맣게 칠했다.
― 그러고 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가 무슨 말을 하든, 뭘 집어 들고 휘두르든 오다기리 조 엉덩이만 떠올리고 있으면 되겠구나. 이제 그렇게 해야지, 그런 다짐을 했어. 너는? 너는 그럴 때 뭘 생각해?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진은 생각했다. 나는 너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아. 너처럼 살고 있지는 않아. 하진은 동조를 구하듯 하진을 향해 내밀어진 유영의 얼굴을 보았다. 미묘한 각도의 주걱턱과 벌름거리는 콧방울, 납작한 물음표 모양의 귀가 머리통 쪽으로 바짝 누운 게 한눈에 보였다. 하진은 얇고 질긴 커튼을 끌어다 유영과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엄마는 딱 한 번뿐이라고 했어. 미안하다고 했어. 내게는 잡히는 대로 물건을 휘두르는 아빠도 없고 사각형의 멍도 없어. 나는 그냥 사춘기일 뿐이야. 나는 너만큼, 불쌍하지 않아.
하진은 검사지에 그럴듯한 말들을 골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가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번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이 달의 용돈)에 대해서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혼자 남겨졌을 때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재검사 이후 하진은 어디에도 불려가지 않았다. 보건실로 불려가는 일도, 상담센터로 가 무기력한 질문들을 견디는 일도 없었다. 유영과는 어디에서도 마주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상이었다.

3

― 예전에 같은 중학교를 다녔는데…….
하진이 말끝을 흐렸다. 중학교? 무언가를 가늠해 보던 유영의 표정이 부서질 것처럼 건조해졌다. 그럼 아마 기억 못 할 거야. 하진이 삼킨 말끝을 반말로 알아들었는지 유영이 말을 놓았다.
― 그즈음 기억이 왔다 갔다 하거든. 사고 때문에.
― 사고?
― 교통사고나 추락사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게 아니라면.
유영이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어 열었다. 정수리부터 왼쪽 귀 뒤쪽까지 길게 찢어진 흉터가 드러났다. 울퉁불퉁한 선홍색 단면이 어느 부분은 부스럼처럼 솟아 있고 어느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 머리가 이만큼이나 찢어지는 일이, 일상에서 생길 리 없잖아.
나를 아는 사람이란 말이지. 유영이 작게 중얼대더니 차라리 잘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신원이 보증되었으니 이제 커피나 차를 내주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 무서워할까 봐 맹물을 줬거든. 내 등장이 이래저래 수상했으니까.
유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어 보였다. 보건실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말갛고 어딘가 바보스러운 웃음이었다. 유영이 나무껍질과 배 향기가 나는 차를 우리는 동안 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진의 집과 똑같은 구조일 텐데 파스텔톤을 많이 사용한 유영의 거실은 느슨하고 포근해 보였다. 푸른색 암막 커튼 사이로 얇고 부드러운 시폰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하진은 유영을 모르는 채 있기로 했다. 상담센터 대기실에서 네가 손잡아 준 사람이 나라고, 보건실에서 냉정하게 커튼을 쳐버린 사람이 나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라진 기억이 유영의 의지라면 하진은 그걸 존중할 생각이었다.

유영이 영화 자막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하진은 놀라지 않았다.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져도 취향은 변하지 않는구나 정도를 떠올린 게 전부였다.
― 내가 영화 좋아하는 것도 알아? 혹시 우리 많이 친했니?
유영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물었으므로 하진은 냉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건 또 그것대로 겸연쩍은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라고 하기엔 페이가 너무 적지만. 유영은 자신이 초벌 작업을 한 몇몇 영화 제목을 댔다. 하진은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영화들이었다. 주로 동물이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독립영화야. 영화관에서 개봉 못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 유영이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며 하진을 이리저리 끌었다. 하진더러 찻잔과 접시를 씻어 달라고 한 뒤 거실에 접이식 매트리스를 펴고 이불을 깔았다. 여기 수압이 쎄서 설거지를 하면 꼭 윗옷이 젖는다. 그치? 유영은 하진에게 코알라가 그려진 커다란 원피스를 내주었다. 방에서 갈아입고 나오자 새 칫솔과 수건을 내밀었다. 하진은 얼결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유영이 시키는 대로 매트리스에 누웠다. 목 아래까지 끌어올린 이불에서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 내일 CCTV 단다고 했지? 설치하는거 같이 봐줄게.
―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 우리 집이 복도 안쪽이니까 네가 설치하면 우리 집도 안전해지는 거잖아. 아, 그것도 달자. 밖에서 해제 안 하고 문고리 당기면 삐용삐용 소리 나는 거.
― 그런 건 그냥 눈속임이잖아. 잠깐 울리고 끝나는 게 무슨 소용이야.
― 왜 소용이 없어. 경보음이 울리면 내가 바로 뛰어갈 텐데.
유영이 꼼질꼼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이 빼곡했으니 거실이 원래 잠자리인 모양이었다. 그건 나랑 같네. 하진은 거실 벽면에 바짝 붙여 설치한 자신의 침대를 떠올렸다. 평온하게 몸을 누일 수 있었던 그 침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통증이 하진을 짓눌렀다. 훅훅 숨을 몰아쉬는 하진의 팔꿈치를 유영이 가만히 잡았다. 가만히 그저 잡고만 있었다.

하진은 생강 냄새에 잠에서 깼다. 거실 안쪽까지 햇빛이 제법 밀려들어 있었다. 너 잘 자더라. 유영이 구운 배와 꿀을 탄 생강차를 내주며 놀리듯 말했다. 너는 배도 구워 먹는구나. 그렇게 말하려는데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하진은 잠자코 생강차를 마셨다. 하진이 토스트와 구운 배를 먹는 동안 유영은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었다. 숱이 적은 단발머리를 뒤로 빗어 단단히 묶는 동안 유영의 뒷모습과 거울에 비친 얼굴이 동시에 보였다. 유영의 신체지만 유영만이 보지 못할 어떠한 각도에 대해 생각하다 하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진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어제부터 유영은 하진에게 가족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가족에게 연락해 보라든가 가족 중 누구를 불러 도움을 청하라는 식의 권유 역시 하지 않았다. 하진은 유영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집어내던 유영이 싱긋 웃었다.

CCTV 설치는 금세 끝났다. 외부로 드러난 카메라 케이블을 갈무리하던 설치기사는 사이렌 센서 설치에 대해 묻자 손사래를 쳤다. 그건 상점에서나 쓰는 거예요. 주거 시설 안에다 설치하면 이틀도 못 가서 떼달라고 할걸요. 유영은 설치기사가 돌아갈 때까지 하진의 집에 머물렀다. 단 이틀 만에 집은 냄새조차 낯설게 변해 있었다. 하진은 유영이 집 안 곳곳을 좀 더 부산하게 오가기를 바랐다. 선반을 건드려 책을 쏟는다든가 식탁에 컵 자국을 남긴다든가 신발장에 무심코 장갑을 두고 간다든가 하길 바랐다. 유영의 흔적이 눈에 보이면 남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유영은 외부 CCTV 실시간 화면을 볼 수 있는 어플을 자신의 핸드폰에도 깔았다. 화소도 낮고 단조로운 기능뿐인 카메라였지만 좁은 복도를 비추기에 충분했다. 유영은 지구대에 전화를 걸어 아파트 근처에 수상한 남자가 기웃대니 순찰 횟수를 늘려 달라고 요구했다. 남자가 다시 나타날 리 없다든가 경찰이 도와줄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조심하라고 경고하거나 집 안팎을 초조하게 서성이지도 않았다. 유영은 천천히 사물을 쓰다듬고 하진의 침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다 일어섰다.
― 내가 자주 살펴볼게. 놀러도 오고.
유영은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책상 앞에 앉은 뒤에야 하진은 자신이 코알라 원피스를 아직도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옷을 세탁해 돌려주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하진은 여러 통의 전화를 걸었다. 피자집 점장은 하진의 집에 스토커가 침입했다는 말을 전부 믿진 않았지만 하루 더 쉬게 해달라는 부탁은 한숨을 쉬며 들어주었다. 과외 일자 변경은 어렵지 않았다. 학과장은 하진의 얘기를 여러 번 되물으며 들었다. 하진의 학번과 이름을 확인하고, 어느 지구대에 언제 접수된 사건인지 물었다.
― 징계위원회를 열어 주세요. 그리고 다른 학생들 개인정보에 더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당장 조교직에서 해임해 주세요.
하진은 똑같은 소리를 학과장뿐 아니라 지도교수, 학생회장, 과대표, 행정처 직원에게도 했다. 휴학한 뒤로 들어가 보지 않았던 학과 커뮤니티에도 게시글을 올렸다. 통화를 거듭할수록 목소리는 또렷해지고 서사는 간명해졌다. 그러나 하진은 하진의 집 현관문과 텅 빈 복도를 비추고 있는 CCTV 화면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인데도 자꾸 자신이 없어졌다. 남자는 조교직에서 해임되면 그뿐이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해도 기껏해야 경고일 게 뻔했다. 그것에 비해 하진이 각오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남자는, 하진의 집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너무 여러 곳에 전화를 걸어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교수들과 의논한 뒤 다시 연락을 주겠다던 학과장일 수도, 다른 피해 사례가 더 있는지 알아보겠다던 학생회장일 수도 있었다. 하진은 전화를 받았다.
― 너,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남자의 목소리에 하진은 CCTV 화면을 돌아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 현관에는? 엘리베이터에는? 아래층 복도에도 정말 아무도 없나? 계단에도? 골목에도?
― 미안하다고 했잖아. 딱 한 번뿐이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냐, 어?
하진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4

여파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왔다.
― 너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니?
하진의 엄마는 전화를 걸어 대뜸 그렇게 다그쳤다. 하진의 본가로 전화를 건 남자가 다시금 사랑 운운하며 하진의 부모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한 하진은 본가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하진을 제외한 채 하진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만 용서를 빌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도 하진의 개인정보를 멋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 경찰에 신고도 했다며. 그럼 된 거지 그걸 또 왜 학교에 알리니.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 그 사람이 내 집에 몰래 들어왔어요. 나를 스토킹해서, 내 비밀번호를 훔쳐서요.
― 딱 한 번이었다면서.
하진의 엄마가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은 것처럼 냉기가 스몄다.
― 반성하고 있다고,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울면서 빌더라. 너를 쫓아갔다가 정말 우연히 비밀번호를 알게 된 거래. 조교 그만두고 휴학도 하겠단다. 사람이 한 번 실수할 수도 있지 굳이 징계까지 해서 원한 살 일이 뭐가 있니. 요즘 흉흉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집으로 와. 집에 와서 얘기하자. 여기 와 있는 동안 새로 집 구해서 이사하면 되잖아.
― ……이사한 집에 그 사람이 또 찾아오면요?
하진이 말했다. 물기가 흐르는 선득한 손이 이마에서 뺨으로, 턱으로 움직였다.
― 딱 한 번 실수한 거라면서 다음 집에도, 또 다음 집에도 찾아오면요?
하진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 그러다 그 사람도 엄마처럼, 딱 한 번만 나를 죽이려고 하면요?

하진은 세탁한 코알라 원피스를 들고 유영의 집 벨을 눌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던 말처럼 유영은 금세 문을 열었다. 선뜻 옷을 받아 주지 않아 어영부영하는 사이 유영은 하진을 끌어다 자신의 거실에 앉혀 놓고 구운 호떡을 가져왔다. 정말 뭐든 구워 먹는구나. 웃으려다 말고 하진은 자신의 얼굴이 이상한 형태로 굳어 있음을 깨달았다. 뺨과 입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빠르게 실룩였다.
―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하진의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나서는 곧바로 쇳소리를 내며 하진을 비난했다. 그런 옛날 일을, 지금껏 한마디도 않고 있던 일을 왜 이제 와서 끄집어내는 거야? 너도 엄마 다 이해한다고 했잖니, 사랑한다고, 전부 다 용서한다고 그랬잖아!
― 책임을 물을 사람이 분명해지는 느낌.
― 책임?
― 영화에서 보면 그런 거 있잖아. 지워진 기록을 찾지 못하게 꼭꼭 감추는 놈이 범인인 거.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는 소리야.
― 그럼 넌 누가 범인인지 안다는 거네.
아마도, 라고 유영은 대답했다. 표정 없이 견고해진 얼굴이 구운 도자기 같았다.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터무니없이 쉽게 깨지는 흙색의 도자기 가면. 하진은 구운 호떡을 들고 조금씩 베어 먹었다. 잠깐 사이 안에 든 설탕이 미지근하게 굳어 서걱거렸다.
그런 건 용서가 아니야. 하진은 엄마에게 말했다. 십 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엄마, 내 침묵은 용서가 아니야. 내 침묵은 나를 위한 거였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가 지금까지는 침묵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나는 계속, 계속. 하진이 호떡을 씹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나는 계속, 늘, 엄마가 두려웠어요. 정말이지 엄마가 끔찍했어.

하진은 기이한 소란함에 잠에서 깼다. 엎드려 잠든 건 잠깐이었는지 먹다 남은 호떡이 여전히 테이블 위에 있었다. 철판에 대고 발을 구르는 것 같은 소리가 위에서 옆에서 번갈아 울렸다. 무슨 소리야? 방에서 뛰어나오는 유영에게 하진이 물었다. 유영의 손에 두꺼운 패딩 점퍼가 들려 있었다.
― 사실은 저거 때문이었어.
유영이 점퍼 소매에 팔을 끼우며 빠르게 설명했다.
― 보통은 헤드폰을 끼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가 나도 잘 모르거든. 근데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저런 소리가 들리는 거야. 윗집에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언니 혼자 살아. 토리라고,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온 새까맣고 늙은 개인데, 개가 저런 소리를 낼 리 없잖아? 경찰에 신고해도 별일 아니라고 그냥 돌아가 버리고. 지난주에도 신고했는데 부부 사이 일은 간섭할 수 없다면서 사랑은 불가항력이라느니 개소리만 하더라고. 너네 집에서 나는 소리도 그래서 알았어.
유영이 설명하는 방식은 중학교 때와 똑같이 엉망이었다. 하진은 몸을 일으키려다 바로 위에서 울리는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천장이 울릴 정도로 둔탁하고 커다란 소리였다. 전등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흔들렸다. 이렇게 심한 건 처음이야. 112를 누른 유영이 다급히 주소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 가보려고?
― 가봐야지.
유영이 내던지듯 슬리퍼를 벗고 신발에 발을 밀어 넣었다. 신고했으니까 경찰이 갈 거야! 하진이 다급히 유영을 붙잡았다. 머리 위에서 크고 작은 것들이 부서지거나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사람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개가 짖거나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나는 저 소리가 뭔지 알아. 저게 뭘 의미하는 건지, 나는 알아.
유영이 말했다. 하진이 유영의 팔을 끌어안듯 붙잡고 주저앉는 바람에 유영이 휘청거렸다. 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 위에서는 너무 많은 것이 부서졌고 더 많은 것이 깨졌다. 사물은 쓸모없어졌을 것이고 공간은 결코 안전할 리 없으며 그 안의 누군가는, 그 안의 누군가는. 가지 마. 하진은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혐오에 몸을 떨면서도 유영을 붙잡았다.
― 나는 그때, 매일매일 기다렸어.
유영이 하진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말했다.
― 누가 나를 도와주기를, 누가 딱 반 뼘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봐 주기를. 비명을 지르면 더 많이 맞으니까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매일 생각했어. 제발 누구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나를 숨겨 달라고.
유영의 목소리가 읊조리듯 작아졌다. 하진에게서 몸을 빼낸 유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밀려들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낮인데도 복도는 어둡고 건조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하진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 나는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너는.
유영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다른 걸 떠올리고 있어. 오다기리 조 엉덩이 같은 거라도. 

* 제목은 중세 스콜라 학파의 논쟁 “바늘 끝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나”에서 따왔다.











안보윤
작가소개 / 안보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 7의 고백』, 중편소설 『알마의 숲』,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이 있다.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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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알파벅스

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

  • 관리자
  • 2024-04-01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김나현 1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룸 안에서 그 냄새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결국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수프는 메인 재료가 양파와 토마토가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동그란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돼지고기에 붙은 비계 때문이거나 양파를 볶을 때 버터가 들어간 탓인 듯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야.” 제 맛?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에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혹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프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땐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곤 했다. 여유랄 게 없을 땐 몇 조각의 고기만 들어간 야채수프에 가까웠다. 그 수프는 마녀 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다른 집 엄마들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특기로 내세울 때, 엄마는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주력으로 삼았다. 깊은 맛의 토마토 수프, 따뜻한 쌀밥,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특별히 다른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수프에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냉장고 안의 남은 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끓일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수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종종 그것을 토마토가 들어간 양파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가 먹어 본 어떤 수프도 엄마가 만든 수프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웃들이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마의 장기이자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그 수프가 이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 겹겹이 쌓인 냄새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떤 냄새든 밀폐되면 지독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방 후드의 환풍기를 켜고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자 어딘가 모르게 매캐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웃집에서 흘러온 담배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공기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변 오피스텔은 어쩔 수 없었다. 미세먼지가 있든 없든 주위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흐릴 때가 많았다. “그만 내려와. 상이나 펴.”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엄마와 마주 앉으니 다섯 평 원룸이 꽉 차는 듯했다. 받침대에 냄비를 내려놓은 엄마는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편안히 수프 맛을 음미하기에는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집보단 낫지 않아?” 그 집은 방충망에 벌레가 자주 들러붙었다. 작은 날벌레도 아니고 엄지만 한 크기였다. 그게 집으로 날아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주택의 2층집에 딸린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부엌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부엌도 딸려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는 그 돈을 갖고 겨우 이런 곳밖에 구

  • 관리자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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