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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서울역」중에서

  • 작성일 2013-01-31
  • 조회수 2,068


   서울역은 나하고도 인연이 옅지 않은 정거장이다. 1925년에 문을 연 서울역을 내가 처음 드나들어본 것은 1927년, 그리고 상해로 떠나올 때도 바로 그 서울역에서 차에 올랐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서울역을 나는 여러 번 드나들었고 또 40여 년 후에 서울나들이를 가서도 역시 그 서울역을 드나들었다.(……)
역대 서울역장 중에는 불명예스럽게 퇴임을 한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직까지 일화로 남아 있다.
대합실 한쪽 구석지기에 그림 한 폭을 걸어놓았는데 여객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이 그림이 실은 꽤나 값이 나가는 그림이었다. 문제의 역방분이 생각하기를
― 가게기둥에 입춘이지!
얼마 지나서 또 생각하기를
― 돼지우리에 주석자물쇠지!
마침내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맹과니들이 보고도 모르는 그림을 괜히 걸어놓을 건 없지.
결론에 도달하는 즉시 그는 역원들을 시켜 그림을 바꿔 걸었다. ‘빛 좋은 개살구’로 대체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나 미술적 가치는 하잘것없는 그림을 대신 갖다 걸게 한 것이다.
한데 여기까지는 괜찮았으나 그 다음 처사가 문제였다. 이 분이 그 떼어낸 그림을 슬그머니 착복을 해버린 것이다.
일이 안 될 때라 마침 아침저녁으로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승객 한 분이 미술애호가로서 구석지기에 걸린 ‘주석자물쇠’가 하루아침에 ‘빛 좋은 개살구’로 바뀌어버리니(……) 발벗고나서서 추적한 결과 역장님이 착복했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들춰내기에 이르렀다. 이 분이 역장을 괘씸스레 여기는 마음이 골똘한 김에 이 사실을 해당기관에 투서를 했더니 그것이 또 어떡하다 대통령 박정희의 귀에까지 입문이 됐다.
화가 난 박정희가 손에 잡히는 종이에다 아무렇게나 한 조각을 쭉 찢어가지고 몇 글자 끄적거리더니 곧 비서관을 불렀다.
“이 쪽지 그 역장녀석 갖다줘.”
청와대의 비서관이 직접 갖다 전하는 글쪽지를 받아보고 그 역장이 당장에 까무러치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제자리에 갖다놔. 박정희’
그 쪽지에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몇 글자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역장이 당일로 그림을 제자리에 갖다 걸고 그리고 사표를 제출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이 ‘제자리에 갖다놔.’도 명언에 속한다면 좀 무리일까? 아무튼 데살궂은 박정희의 성격이 확 끼치는 듯한 말투임에는 틀림이 없다.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을 돋을새김하려면 이런 말투를 잘 포착해야 할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 작가_ 김학철 - 1916년 원산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담해 생전에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다가 10년간 옥고를 치르고 24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2001년 별세했다. 소설집 『무명소졸』, 장편소설『격정시대』,『해란강아 말하라』, 자서전『최후의 분대장』,산문집『나의 길』등이 있다.

• 낭독_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에 출연.

• 출전_ 『김학철 문집 4권 나의 길』(연변인민출판사)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작년 봄에 옛 서울역사(驛舍)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복원되어 공개되었습니다. 80여 년 동안 서울 관문이었던 사적지입니다. 제게는 이상(李箱)과 박태원의 경성역으로 이미지가 강렬합니다. 2층 그릴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갓진 시간을 보내던「날개」의 주인공, 무료하고 답답할 때면 삼등대합실을 찾아 여객 구경을 하던 박태원의 구보 씨 생각이 나서 복원된 역사를 둘러보았습니다. 2004년 문을 닫을 무렵과는 내부가 사뭇 달랐습니다. 비잔틴풍의 높은 돔과 유리화로 치장한 창, 거대한 벽시계, 샹들리에, 그리고 대리석과 벽난로로 치장한 귀빈실, 경성 멋쟁이들이 출입하던 이발소가 본래모습을 찾았더군요.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던 「날개」의 숨결을 따라 기웃거리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거기에 묵은 건물이 있었지만 제가 만난 건 시간이며 그 틈새를 메우며 쌓인 이야기였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 말입니다. 어디 이상과 박태원만 그곳에 흔적을 묻혔겠습니까. 먼 나라에서 생을 마감한 김학철의 서울역도 한 이야깃거리 되지 않습니까.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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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은 수많은 무엇들, 다 제자리에 갖다놔. 늘 내 딸에게 하는 잔소리.

    • 2013-02-03 22:41:0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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