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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

  • 작성일 2013-02-04
  • 조회수 3,510


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 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 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 풀처럼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시_ 허수경 - 1964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장편소설 『모래도시를 찾아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등이 있음.

낭송_ 천수호 -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이 있음.
출전_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몇 사람인가 일행과 함께 화자는 해질녘 빈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저만치 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어쩌면 두서너 마리가 뒤뚱거리며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엷어지는 긴 그림자를 끌고, 노을로 붉은 서녘 하늘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까마귀와 사람 들. 어쩌면 까마귀는 이내 푸드덕 날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지는 해의 역광으로 불그스름 물든 까마귀가 해 지는 쪽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뒤태를 보는 순간 화자는 죽음의 행렬을 떠올린다.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고, 죄를 져도 죽고 죄 없이도 죽는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은 그 자체가 폭력이지만, ‘해 뜰 무렵해를 향해 걸어갔던 이들’에게는 더 폭력적이다. 시에서 ‘해 뜰 무렵’은 이중적으로 쓰인다. 생명의 따뜻한 빛인 해가 몸에 막 깃든 햇생명의 시간, 그리고 실제로 일출 무렵.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아이들!
환하게 밝은 하늘 아래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두려움도 없이 벌인, 군인들의 그 무자비 무차별한 살상의 결말을 시인은 분노와 슬픔을 가누며, 공들여 염하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그린다. 신들도 부모도 그 누구도 보호해 주지 못한 어린 목숨들…….
독일에서 오랜 시간 ‘고대 근동고고학’(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을 공부한 시인이 여름이면 두어 달씩 발굴을 목적으로 가 있던 유적지 마을이 시의 배경일 테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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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10609류태오

    처음 이 시의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해'가 보통의 시처럼 화자의 이상이나 동경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해'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새로웠습니다. 해 질 무렵의 해를 향하여 걸어간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해 뜰 무렵 죽은 사람들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일 것입니다.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들이 폭탄과 맞바꾼 어린 생명들이 참으로 안타까웠기에 더욱 돋보였던 시입니다. 이 시를 옮겨오신 집배원 분은 독일의 유적지 마을이 배경일 것이라 하셨는데, 저는 떠오르는 해가 죽음을 상징한다 하니 떠오르는 다른것이 있습니다. 바로 떠오르는 해를 표현한 일본의 전범기, 욱일기입니다. 일본이 20세기에 저지른 범죄에 죽어나간 사람들,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감추고 숨겨야 할 자신들의 치욕을 당당히 꺼내드는, 그들을 비판하는 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시였습니다.

    • 2018-10-31 11:14:47
    10609류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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