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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조, 「우선권은 밤에게」 중에서

  • 작성일 2013-03-07
  • 조회수 1,517


  이신조, 「우선권은 밤에게」 중에서

 

 


   난희 여사님이 말했다.
   “나이트룸에 들어가면…… 밤이 되는 거예요.”
   낙희 여사님이 말했다.
   “밤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잠시 완전히, 예전의 언젠가처럼……”
   난희 여사님의 카디건 주머니 속에서 타이머의 알람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나이트룸에 들어갔던 손님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나이트룸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고, 정지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우선 어두웠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손을 뻗어 더듬거리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전등을 켜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켜지 않은 편이 역시 나을 것 같았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어둠과는 다른 어둠이었다.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어둠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이 어둠은 이를테면 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일까. 내 생각과 감각이 평소와는 다르게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나는 이 방을 알고 있었다.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북쪽으로 난 작은 창문, 창문을 열면 바로 낡은 담장이었다. 장독대집의 겨울, 이 방은 이 집에서 가장 춥고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이 방에서 춥고 어둡다는 것 외에 특별한 느낌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그때도 이 방은 나이트룸이었던 것일까.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방문을 등지고 벽 가까이 커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였다. 의자 팔걸이에는 이 방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차례로 사용했을 무릎담요가 걸쳐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는 순간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흔들의자였다. 나는 놀랐지만, 당황하거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의자는 소리 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적당한 속도와 적당한 기울기. 쌍둥이 여사님들이 그러하듯 ‘딱 알맞은’ 속도와 기울기였다. 나는 흔들의자의 딱 알맞은 속도와 기울기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의자가 너무도 조용하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부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의자는 이상할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의자의 부피와 무게는 상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의자는 앞뒤로 움직이면서도 아무런 소음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 조용함을 유지하는 것이 의자의 중요한 임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나이트룸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다. 3시간, 아니었다. 나는 길고 긴 잠을 잤다. 온밤 내내 잤다. 빛과 무관한 어둠처럼, 깨어 있음과 무관한 잠. 내 몸의 털 한 올, 피 한 방울,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동의하고 받아들여진 잠. 그런 잠이었다. 나이트룸에 들어가면 밤이 되는 거예요. 쌍둥이 여사님들의 말대로 나는 밤의 일부가 된 것이다. 잠시였지만 온전히, 나이트룸. 온밤 내내 자고 일어났지만, 이제 막 30분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가_ 이신조 - 1974년 태어나 1998년『현대문학』신인공모에 당선되어 등단. 이듬해 장편소설『기대어 앉은 오후』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음. 소설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새로운 천사』, 『감각의 시절』, 장편소설『가상도시 백서』,『29세 라운지』, 서평산문집『책의 연인』등.

   낭독_ 지소흔 - 배우. 연극 <판타스틱스>, 등에 출연.
                   황혜영 - 배우. 연극 <타이피스트>, <죽기살기>, 등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하모니> 등에 출연.

   출전_ 『우선권은 밤에게』(작가정신)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오래 전 관공서에서 뗀 주민등록초본을 보니 태어나 지금껏 나는 주소가 스무 번 넘게 바뀌었더군요. 물론 행정구역 조정으로 생긴 주소 변경도 있지만 고등학생이 된 후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계속 떠돌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방 들고 이사했는데, 이제는 이삿짐 용역에 의지하지 않고는 엄두가 나지 않는 살림이 되었습니다. 더러 낡은 방 얻어들 때는 방이 흡사 무슨 유기체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앞서 산 사람의 체취가 가시지 않은 방은 금방 곁을 주지 않지요. 내 생활의 냄새가 얼마간 배어야만 그제야 내 방같이 여겨지고는 했습니다. 현대인을 도시 난민으로 비유하는 건 오래된 이야기이지만,『우선권은 밤에게』는 떠도는 헐벗은 영혼을 통해 집 혹은 방의 내밀한 의미와 속성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저 처녀가 어떤 방에서 경험하는 잠이 그립습니다. 하룻밤처럼 가버린 자궁의 잠 같은 것 말이죠.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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