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와 짬뽕
- 작성일 201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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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와 짬뽕 지 석 동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잠자와 애호박과 바지락을 넣은 맛이 좋아 한 그릇 반이나 먹었다. 밀반죽을 미느라고 애쓴 아내한테 모처럼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
지금은 밀것을 잘 먹지만 어려서는 싫어했다. 여름이면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홍두께로 밀만죽을 밀어서 모시조개를 넣고 칼국수를 해주셨다. 고명으로 지단과 오이를 채 쳐서 얹고 구운 김 가루를 뿌려 주셨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주셨지만 밀어 놓고 밥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동생들은 잘 먹는데 너는 왜 그러느냐고 혀를 끌끌 차셨다.
아버지도 내 식성이 못마땅해 나무라셨다.
"사내놈이 입이 그렇게 까다로우니 큰일이다. 남자는 먹성이 좋아야 세상살기가 수월한데. 쯧쯧. 여보 배고프면 먹을 테니 내버려 둬요."
어느 때는 나 때문에 밥상머리가 썰렁해 동생들한테 미안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도록 대문 옆에 사시던 외가로 들고 가서 밥을 바꿔먹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당신 딸을 고생시키는 게 미워 한숨 섞인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일곱이나 되는 자식 거두느라 고생하는 걸 보면 짠한데, 힘들여서 해준 음식을 타박하니 그 속이 어떻겠니. 그러지 마라!"
국수나 칼국수가 싫었던 것은 멸치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국이나 찌개, 국수장국에 멸치가 들었으면 수저가 안 간다. 못되게 타고난 편식이지 싶다. 대개는 그렇게 심하지 않을 터인데 나는 별종인지 멍청인지 멸치 든 음식이 싫어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했고, 아내의 마음을 40여 년이나 상하게 했다.
어쩌다 팅팅 불은 멸치가 입에 들어가면, 맛있게 먹던 밥맛이 싹 달아난다. 그 밍밍한 맛이 싫어서다. 맛이 다 빠진 멸치를 건져서 상 귀퉁이에 꺼내놓는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장가들고 처가에 갔을 때, 내 식성을 본 장모님과 큰 처제가 한 말이다.
"어머! 시상에 우리 언니 워쩌면 좋댜. 밀치 골라내는 걸 봉께 우리 언니 헹부 입맛 맞추기 힘들게 생겼구먼. 안 그류 엄니?"
"그러게 마려. 저 입 맞춰가며 살려면 니 성 지례 늙겠으니 큰일이구먼!"
그 뒤로 처가에서 눈총께나 받았다. 국에 든 것은 안 먹어도 대가리를 떼어내고 똥을 발라낸 것은 먹었다. 중간크기보다 조금 작은 것을 고추장에 달달 볶거나,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멸치는 몸매가 곧고 은백색이 나는 것이 맛이 좋다. 손가락같이 큰 것은 우려서 국물 맛이나 내는 것이라 얕은맛이 떨어지고, 잘디잔 것은 볶아서나 먹는 밑반찬거리니, 멸치의 맛은 중간 크기가 으뜸이다.
밀 것 하면 잊지 못하는 곳이 있다.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자리에 있던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을 때다. 지금은 학기 초가 3월이지만 그때는 4월 초라 3월에 학생을 뽑았다. 시험을 보러 가는 날 눈이 내려 허옇게 쌓였다. 교실에 난로를 피웠지만 추워서 손이 곱았다. 그날 어머니가 따라오셨다. 내 가 시험장으로 들어가자 운동장 한쪽에서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아들이 시험 잘 보기를 빌었다. 그때는 학부모들이 많이 와서 가슴을 졸였다. 부모와 삼촌, 고모, 이모까지 온 아이도 있었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었다. 계동 부근에는 식당이 몇 안 돼 한참을 찾았다. 나는 시험 보느라 떨고, 어머니는 큰아들이 시험을 잘 보라고 축수하느라 눈 위에서 떨었다. 몸도 녹일 겸해서 들어간 곳은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중국집이었다. 하도 손님이 많아 밖에서 한참을 떨었다. 나같이 시험 보러온 애들과 학부모들이었다.
중국 옷을 입은 키 작은 중년의 여자가 뒤뚱뒤뚱 다가와서 서툰 우리말로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눈으로 물으시자, 얼른 벽에 붙은 메뉴를 보고
"엄마 짬뽕이 뭔지 몰라도 한번 먹어볼께요."
"그래 추운 때는 따끈한 게 좋아. 여기 짬뽕 두 그릇 주세요."
주문을 받은 여인이 올 때처럼 뒤뚱뒤뚱 가서 주방에 대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쏼라 댔다. 그때만 해도 화교들 중에는 전족을 한 여인들이 많았다.
짬뽕을 먹겠다고 한 것이 은근히 후회됐다. 친구한테 짜장면이 맛있다는 소릴 들었는데 괜히 짬뽕을 시켰나 싶어서였다. 중국음식을 처음 먹게 된 날의 고민이었다. 지금이야 걸음마를 하기 전에도 중식을 먹는 엄마 덕에 탕수육도 맛보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중국집에 가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내가 처음 먹어본 짬뽕 맛은 환상이었다. 어머니가 멸치 넣고 끓여 주는 밀것의 맛과는 달랐다. 면발도 쫄깃쫄깃해서 좋았고, 오징어와 홍합도 어찌나 맛있던지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단무지와 춘장도 그때 처음 먹어봤다. 그득했던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불러 걸음을 걷기가 거북했다.
어머니가 멋이 어떠냐고 물으실 때, 만족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엄마, 먹어 본 것 중에 최고야!"
"그래, 맛있게 먹었다니 됐다. 배도 찼으니 오후 시험도 잘 봐야 해."
"네, 잘 볼게요. 근데 엄마, 나 변소에 가야 할 것 같아."
내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 눈에서 불빛이 반짝했다. 그러고 얼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했다. 그건 기대에 어긋났을 때에 낙담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짬뽕을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장래 판검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흐뭇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잔뜩 먹여 놓은 것을 내놓겠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니? 무게가 덜 나가면 점수도 덜 줄 터인데 떨어지려고 그래? 조금만 참았다가 신체검사나 하고 나서 가도 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선체검사 끝날 때까지 참느라고 진땀을 흘리며 인상을 수없이 썼다.
오후 시험은 체육시험을 보고 신체 검사를 했다. 체육시험은 달리기, 턱걸이, 던지기, 멀리뛰기 등을 했다. 모두가 힘을 써야 하는 운동이라 힘을 주면 금세 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턱걸이를 세 번이나 했고, 달리기는 손으로 뒤를 받치고 뛰느라 꼴찌를 했지만 100미터를 완주했다. 내가 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나의 고통을 모르고 배꼽을 잡았을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내가 과식한 것은 생각하지 않으셨다. 오직 먹인 것을 배설하면 몸무게가 적게 나가 시험에 떨어질까 싶은 걱정뿐이었다. 너나 없이 못 먹어 영양이 부실했던 시절 체중이 덜 나가면 많이 나가는 아이한테 밀려 떨어질 것으로 아셨던 거다.
가끔 계동을 지날 때면 근 60년 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눈 쌓인 3월 초 어느 날, 변소에 가겠다는 아들 말에 난감해 하시던 어머니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먹은 짬뽕이 맛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해주시던 칼국수처럼 멸치가 들어있지 않아서 맛이 좋았던 것 같다. 설령 멸치로 국물 맛을 냈다고 해도 해물이나 맛내는 조미료에 가려서 행세를 하지 못했던 것 아닌지.
임종하실 때까지 당신을 모두 주시려고 애쓰시던 어머니.
이 추운 겨울에 감기 한번 안 앓는 건강이 고마워 고개를 숙인다.
201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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