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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도루마 슌, 「물방울」 중에서

  • 작성일 2013-03-28
  • 조회수 2,387


   메도루마 슌, 「물방울」 중에서

 

 


   “이시미네.”
   귓전에 대고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그의 입에 볼을 가까이 대자 미약하게나마 호흡이 느껴졌다. 도쿠쇼는 몸을 미끄러뜨려 이시미네의 몸을 눕혔다. 배를 감은 각반이 밀리며 스으윽 하는 소리가 났다. (……) 수통의 물을 손바닥에 받아 하얀 이가 보이는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입 밖으로 넘친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도쿠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통에 입을 댄 채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수통은 텅 비어 있었다. 물의 입자가 유리 가루처럼 콕콕 쑤시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도쿠쇼는 무릎을 꿇고, 늘어져 있는 이시미네를 내려다보았다. 어둠과 흙탕물이 스며들어 이젠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방공호 안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텅 빈 수통을 이시미네의 허리 부근에 놓았다.
   “용서해도, 이시미네…….”
   도쿠쇼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와 나뭇가지에 얼굴이 부딪치는 줄도 모르고 숲을 빠져나왔다.
   (……)
   나흘 후 도쿠쇼는 섬의 최남단 마부니 해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정신을 잃고 해안가 근처를 떠다니다 구조된 것이었다. 그 뒤로 수용소 안에서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나 누군가가 불현듯 이시미네를 방공호에 버려두고 온 놈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움에 떠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이시미네는 도쿠쇼의 다리를 쓰다듬듯 손바닥으로 발목을 감싸고 열심히 물을 마셨다. 시원한 바람이 방으로 들어온다. 창밖 바다 저편에서 해가 떠오르는 기운이 느껴진다. 평소대로라면 벽으로 사라지고 남을 시각이다. 풀어 헤쳐진 잠옷 사이로 술의 양이 늘어난 이후 퉁퉁해진 뱃살이 보인다. 배꼽 주변에만 털이 난 허여멀건 배와 동과처럼 퉁퉁 부은 오른 다리의 흉측함. 도쿠쇼는 이제부터 빠르게 늙어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침대에 누운 채 50여 년간 숨기기 급급했던 기억과 죽을 때까지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이시미네, 용서해도……”
   흙빛이었던 이시미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술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입을 닦고 일어선 이시미네는 열일곱 살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면을 바라보는 속눈썹이 긴 눈에도, 홀쭉한 볼에도, 빨간 입술에도 미소를 띠고 있다.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이 50년을 내가 얼매나 마음고생하며 살았는지 니가 아나?”
   이시미네는 미소 지으며 도쿠쇼를 쳐다볼 뿐이었다.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도쿠쇼에게 이시미네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고마워. 이제야 갈증이 해소됐어.”
   이시미네는 완벽한 표준어로 그렇게 말하더니 미소를 거두고 거수경례를 한 다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벽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번 다시 도쿠쇼를 돌아보지 않았다.

 

 

   작가_ 메도루마 슌 - 1960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1983년 류큐신보 단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 태평양 전쟁이 남긴 오키나와의 비극과 오키나와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작품활동. 소설집『평화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으며』,『물방울』,『혼 불어넣기』(『브라질 할아버지의 술』로 국내번역) 등.

   낭독_ 윤광희 - 배우. 연극 <러닝머신 타는 남자의 연애갱생 프로젝트>,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 등에 출연.
                   지소흔 - 배우. 연극 <판타스틱스>, <2011 세종 갈라쇼> 등에 출연.
   출전_ 『물방울』(문학동네)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평북 정주 땅은 백석으로 말미암아 낯설지 않고, 충남 보령 사람들은 이문구와 맺어져 친근합니다. 피츠제럴드의 뉴욕이나 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파묵의 이스탄불, 카다레의 알바니아 고원도 그렇지요. 작가와 지방을 연관 지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요. 5년 전 국내에 번역된『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이라는 소설집을 읽은 후 오키나와에는 메도루마가 있지, 하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의 소설을 통해 오키나와인들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집단자결을 종용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미군정 치하 27년 동안에는 달러를 사용했고, 그들은 마당을 흰 모래로 덮는 걸 좋아하며, 마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구령에 맞춰 국민체조도 했더군요. 당시 작품목록에서「물방울(水滴)」을 보고 읽었으면 했는데 마침 작년에 번역되어 반가웠습니다. 이 소설은 전쟁의 상처를 그린 소설입니다. 시골에서 아내와 사는 농부 도쿠쇼는 어느 날 오른다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엄지발가락 끝에 물방울이 듣습니다. 밤이면 과거 전우들의 유령이 찾아와 그의 발가락에서 갈증을 풀고 갑니다. 메도루마는 환상기법을 통해 오키나와의 비극을 끌어내는 데 특장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 중 환상적인 것 같습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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