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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목욕 가는 날」중에서

  • 작성일 2013-04-04
  • 조회수 2,814




어머니의 주름진 몸은 비누칠 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십 겹으로 늘어진 뱃살이 밀가루 반죽인 양 밀렸다.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아이, 비누칠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야. 혼자 헐란다. 이따 등이나 쪼깐 밀어주면 돼야."

나는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뿌리쳤다. 살 한 겹을 한 손으로 붙잡아 한것 당긴 후에야 비누칠을 할 수 있었다. 나와 언니가 이 뱃속에서 열 달을 머물렀다. 있는 대로 팽창하여 두 생명을 품었던 뱃가죽이 팽창했던 그만큼 늘어진 것이리라. 한 겹 한 겹 젖혀가며 정성스레 비누칠을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또한 내 벗은 몸을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당신 몸에서 생명을 얻어 알몸으로 세상에 나온 딸이 당신 못 보게 몸도 마음도 꽁꽁 싸매고 저 혼자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어머니는 적적했을까, 쓸쓸했을까.  같은 어머니가 되고도 나는 아직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머니 눈길은 때를 미느라 출렁이는 내 가슴을 향해 있었다.

"아이, 인자 니도 늙은 티가 난다이. 허기서 니가 올해 마흔여섯이제? 아이고, 징허게도 오래 살았다. 하도 몸이 안 좋아 니 국민학교 입학하는 것이나 보고 죽을랑가 어쩔랑가. 방긋방긋 웃는 니 얼굴만 보면 애가 탔는디 니가 벌써 마흔여섯이여이?"

내 손길이 허벅지를 향하자 어머니가 움찔 다리를 오므렸다.

"아이, 인자 됐다, 내가 할란다, 이?"

갱년기 증상이 심해 여성호르몬을 복용한다는 언니는 애도 안 난 사람처럼 가슴이 풍만했다.

"언니는 시집 한 번 더 가도 되겄네. 나 처녓적보담도 낫구만."

"썩을 년! 부작용이 월매나 심헌디. 돈도 수월찮아야."

언니는 때 미는 사람처럼양손에 때수건을 끼고는 짝짝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등이나 대그라. 엄마도 돌아앉으씨요. 나는 야 밀고 야는 엄마 말고, 그러믄 쓰겄네."

망설이다가 나는 돌아앉았다. 누구에게 맨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니의 손끝도 제법 야무졌다. 샤워타월로 대충 혼자 닦기만 했던 등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워매! 가시내야. 니는 때도 안 밀고 사냐? 무슨 놈의 때가 국수가닥도 아니고 우동면발이네그랴."

"그만, 그만허소. 아파 죽겄네."

언니가 착 소리가 나게 내 등짝을 후려쳤다. 때수건을 물에  헹구고 다시 한 번 손뼉을 친 언니가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엄마, 둘째 때 미는 솜씨가 워떻소? 나보다 낫소? 하기사 물어 뭣해. 뭔들 나보다 못하겄어? 엄마 죽고 못 사는 둘짼디. 헹, 나만 찬밥이제 이날 입때껏."

"아녀. 때 미는 솜씨는 니가 낫다. 둘째는 먼 길 오니라 힘들어 그렁가 영 힘이 없어서 못 쓰겄다."

주름진 살이 밀려 아플까 조심한 것인데 어머니는 시원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리라 짐작했던 어머니 마음이 오늘처럼 늘 헛다리를 짚었던 건 아니었을까. 알몸인 탓인지 시선 둘 데 없이 민망했다. 언니가 내 등짝을 두 번 탁탁 두드리고는 사내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가시내야, 오늘은 니가 찬밥이란다. 비켜라."





정지아,「목욕 가는 날」중에서

● 작가_ 정지아 - 1965년 태어나 1990년 자전소설『빨치산의 딸』을 출간하고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행복』『봄빛』『숲의 대화』
● 낭독_ 성경선 - 배우. '한여름밤의 꿈', '가내노동' 등에 출연.
● 천정하 - 배우. '청춘예찬', '남도1' 등에 출연.

● 출전_ 『숲의 대화』(은행나무)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정지아는 인물의 삼각구도를 잘 활용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지만 「봄날 오후, 과부 셋」이라든가 「혜화동 로타리」같은 소설은 인물 셋이 나와서 말발을 세우고 인생을 견주고 잇기도 합니다. 현대소설은 둘 사이에 하나 뛰어들어 파탄 내기를 즐겨하는 못된 버릇이 있는데 정지아 소설에서는 딴판입니다. 서로 다른 삶들이 조화롭게 만나는 진경이 펼쳐지지요. '이것이 인생이다'는 감상이 절로 솟죠. 그리고 대중목욕탕에서 때 미는 세 여자의 수다가 맛깔나서 이 소설을 더 아끼게 됩니다. 러시아 소설에서 화자들이 보드카 한 잔 놓고 쉴 새 없이 떠드는데, 어떤 화자는 몇 페이지에 걸쳐 침을 튀기잖아요. 인물에게 그렇게 말을 맘껏 시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화적 토양이 참 부러웠는데, 이 소설을 읽다보니 우리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공중목욕탕이 있잖아요. 저도 언젠가는 탕에 앉은 사내들이 대여섯 쪽에 걸쳐 성생활 걱정, 정치 걱정, 우주 걱정까지 맘껏 지껄여대는 소설을 써보고 싶군요.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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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정말 찡하여요... 어쩜 너무 실제 풍경을 보는 것 같아요... 슬프고도 기뻐요...

    • 2013-04-22 12:03:4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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