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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꽃과 그림자」

  • 작성일 2013-04-29
  • 조회수 3,278



오규원, 「꽃과 그림자」



앞의 길이 바위에 막힌 붓꽃의

무리가 우우우 옆으로 시퍼렇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시_ 오규원 -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남. 시집 『분명한 사건』『순례』『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사랑의 감옥』『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두두』,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 시론집 『현실과 극기』『언어와 삶』『날이미지와 시』, 시 창작 이론서 『현대시 작법』 등이 있음. 2007년 작고함.

낭송_ 성경선 - 배우. <청춘예찬>, <남도1> 등에 출연.

출전_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정정화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대개 붓꽃은 무리지어 피어 있다. 바람이 불면 우, 흔들리며 시퍼렇게 번진다. 붓꽃이 한 송이, 두 송이, 아홉 송이, 그리고 무더기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 스침과 번짐을 시인은 실제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로 펼쳐 보인다. 이 색채감과 리듬감! 세포를 확 깨우는 듯 감각의 호사를 누리게 하는 시다. 느리게, 빠르게, 흔들리는 붓꽃들과 그 그림자 속으로 독자는 빨려 들어간다.

이 짧은 시에 ‘그러나’가 다섯 번 나온다. 문단이 바뀔 때마다 ‘그러나’다. 언어에 어지간히 자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이럴 수 없다. ‘그러나’가 한 번 나올 때마다 음조는 고조되고 색조는 진해진다. 앞의 걸 부정함으로써 점점 빠르게, 강하게, 상승하는 ‘그러나’의 크레셴도! 그에 독자는 시의 풍경에 더욱 몰입된다. 거장의 솜씨다. 그림이면서 음악인 시!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시의 여운이 댕댕거린다. 붓꽃과 바람이 스치고 흔들리며 시퍼렇게 번지던 감촉이 살갗에 오소소 번진다. 열린 감각이 파르르 떨린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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