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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중에서

  • 작성일 2013-05-09
  • 조회수 2,302





“우리들이 되도록 독자를 작가 쪽으로 끌어올려야지, 작가가 독자 쪽으로 내려가지는 말 아야죠. 우리 작가들도 데모 한 번 해야 돼요. 독자를 상대로.”

-박상륭vs한창훈 대담(문장 웹진 2008년 9월호)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중에서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 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사막을 사는 약대나, 바다 밑을 천년 한하고 사는 거북이나처럼, 업(業) 속에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로써, 운산이나 눈뫼나 비골을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이리의 무리는 눈벌판에서 짖으며 사는 것이고,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고, 신들은 그렇지, 그들은 어째도 구름 한자락 휘감아 덮지 않으면 잠을 설피는 것이다. - 처음에는, 자기에게 마땅스럴 장소를 물색하겠다고 여기저기로 싸돌아 다니다가, 찾기는 커녕 마음에 진공만 키워 버린 뒤, 타성에 의해서 그 진공 속을 몸 가지고 밖으로 한없이 구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아흔 살은 되었음직한 그 중의 얘기대로 하자면, 그러하다. 즉슨, 모든 고장들이 다 그곳대로의 아름다움과 그곳대로의 고통을 지니고 있었다.

“토생원에게는 풍류인 여산의 새벽달이며 무릉의 가을 바람도 별주부에게는 고통일 뿐인 것이지.”

그 늙은 중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_ 박상륭 – 소설가. 1940년 전북 장수 출생. 1963년《사상계》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 소설집 『열명길』, 『아겔다마』등


● 낭독_ 임형택 – 배우. 연극 <염쟁이 유씨>, <만선> 등에 출연. 극단 ‘작은신화’ 단원.

● 조주현 – 배우. 연극 <감포사는 분이>, <사랑, 지고지순하다> 등에 출연.

● 출전_ 『죽음의 한 연구』(문학과지성사)

● 음악_ the film edge / magical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도전해 보셨습니까? 세계 곳곳의 철학 사유와 종교 교리가 질서 있게 혼재된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선종(禪宗) 제6조 혜능(慧能)과 예수가 두 마리 뱀처럼 뒤엉킨 주인공이 유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완성시켜가는 그 지극한 과정을. 과학이 된 샤머니즘을.

넌더리를 치며 나가떨어지는 독자를 저는 여럿 보았습니다. 빠르고 간결한 문장, 충분한 여백,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결코 숙제를 내주지 않는 작품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보기엔 보통 깐깐한 게 아니죠. 저도 그랬습니다. 문자 이전의 음성언어 같은, 득도 직전 주화입마 같은, 늙었으되 총기 가득한 노인네가 끝없이 홍알거리는 말들로 가득 찬 이 잡설체 소설이 제 가슴을 뒤흔들기 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특히 이 도입부가 눈에 쑥 들어오던 날의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히 조언 한마디 하자면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대충 훑어보면 읽히는 단락이 한 두 개 나옵니다. 거기만 읽고 그만 둡니다. 다음에 그곳을 찾아 그 앞과 뒤를 조금씩 더 읽어봅니다. 이렇게 부분 부분을 거점 삼아 키우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감정의 풍랑과 도저한 감동을 만나게 되죠. 성과 속이 어떻게 뒤섞이는지, 연꽃 피어난 자리가 왜 하필 진흙탕 속인가도 배우게 됩니다. 보증합니다. 솬티 솬티 솬티.



문학집배원 한창훈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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