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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무인칭의 죽음」

  • 작성일 2013-06-17
  • 조회수 3,004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一)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변기통에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시_ 최승호 -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7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세속도시의 즐거움』,『그로테스크』,『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고비』,『아메바』등이 있고, 그림책으로는『누가 웃었니?』,『이상한 집』,『하마의 가나다』,『수수께끼 ㄱㄴㄷ』,『구멍』,『내 껍질 돌려줘!』가 있다. 동시집으로는『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1(모음 편), 2(동물 편), 3(자음 편), 4(비유 편), 5(리듬 편)』,『펭귄』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_ 이혜미 - 시인. 1988년 경기 안양 출생.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이 있다.



* 배달하며


수수만년 인간이 걸어온 과정에서 각자에게 이름이 붙은 것은 겨우 일주일 전입니다. 게다가 거기 인칭의 계급이 생긴 것은 엊그제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제 인칭을 높이자고 모두가 힘겨워하는지 모릅니다. 인간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처럼 허망한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이름, 장관, 국회의원, 변호사, 판사, 목사, 인권운동가, 사회사업가, 회장님, 사장님, 화가, 시인, 작가…… 높고 낮다는 각각의 이름 앞에 얹은 모자들.
이건 어떨까요? 꾀꼬리, 파랑새, 벌, 나비, 목련, 수련, 해바라기…… 그래도 꾀꼬리가 제일 낫겠다고요? ‘꾀꼬리…… 해바라기’에 가장 가까운 직업은 뭘까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자 하나 지키며 살자는 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 무인칭의 생이 있었으니 이러한 생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종교로 열리는 질문입니다. 죄 짓지 않은 생애, 죄 지을 틈도 없었던 생. 어쩌면 죄 지을 틈은 있어야 인생 아닐까요? 치욕스런 시라도 지어야 시인이듯이.



문학집배원 장석남


출전_ 『진흙소를 타고』(민음사)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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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건

  • 강영롱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한 아이,무인칭의 삶을 아주 잠깐 살고 죽어버렸다. 변기통에 똥처럼 버려져서 무섭고 힘든걸 생각하면 너무 슬프다. '생일이 곧 기일이다'라는 말이 인상깊었다.

    • 2018-05-28 01:38:37
    강영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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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진이

    90년대 대학 때 읽었던 시집인데 배달된 시를 보니 어제 본 기사처럼 여전히 유효한 시. 그래서 가슴이 아픈 시. 아기를 낳은 지금 읽으면 더욱 아픈 시. 핏덩어리 생명이자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 2013-07-12 03:06:44
    어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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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우같은북극곰공주

    16개월 된 아들을 둔 엄마예요. 아침 출근길에 이 시를 보고는 눈물이 주르륵. 그 아이... 열달을 품고 있던 엄마의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하고 차가운 변기에 똥처럼 버려진 슬픈 아기...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요? 가슴이 미어지네요. ㅠㅡㅠ

    • 2013-06-21 12:36:53
    여우같은북극곰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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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이는 동물로 일생을 마감했다. 인간의 거죽만 가지고 다시 하늘나라로 갔다.

    • 2013-06-19 10:58: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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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눈 감고 들었는데 정말 슬프네요

    • 2013-06-18 00:15:2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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