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류시화, 「모란의 연(緣)」

  • 작성일 2013-07-01
  • 조회수 3,946


류시화, 「모란의 연(緣)」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시_ 류시화 -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인도 사상에 심취한 그는 여행과 명상을 통한 자기 탐구의 길을 걸으며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등을 발표했다.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엮었으며, 명상서적을 소개해 오고 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썼다.

낭송_ 신혜정 - 시인.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라면의 정치학』이 있다.

* 배달하며


어느 봄날 비운 지 오래인 집을 찾았는데 빈 집 마당에 작약이 찬란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울컥 치미는 꽃을 겨우겨우 내리 눌렀습니다. 아무 보는 이도 없는데 이토록 찬란하게 피었느냐!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저승을 다녀오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꽃들과 오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작약 철이면 앓아눕는 병이 생겼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 대신 모란꽃만 자주 보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모란이란 꽃은 오래 바라보면 그대로 그 꽃빛이 눈가에 번지는 꽃입니다. 봄날 갑자기 눈가가 붉어진 사람이 있다면 붉은 모란을 오래 바라본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 사랑은 떨어져 흩어지기 일쑵니다.
시에서도 이런 순정한 사랑시가 맥을 못 추는, 자극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디에선가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무는’ 모란을 가꾸며 저승 소식도 배우면서 살아가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출전_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정정화

프로듀서_ 김태형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3건

  • 익명

    장석남 선생님, 왜 이 시에서 최하림 선생님의 냄새가 날까요?

    • 2013-07-18 18:55:42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항상 메일로만 시배달을 받아보다가 댓글을 달기 위해 실로 오랫만에 로그인을 했습니다.^^ 이 시가 나올 무렵, 저도 사랑이라는 터널을 막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몇번을 고심하며 망설인 끝에 이 시를 모란 빛 편지지에 적어 지난사랑의 집앞에 그사람의 긴 여행을 위한 선물들과 함께 고이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오는길.. 참 많이 울었습니다. 잊을 순 없겠지만 가시돋히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이 시를 받아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모란빛으로 변하는 것이..그때의 제가 생각나 아련하고 아득해져 눈물이 핑, 머리가 띵, 아찔해지네요. 시배달 너무나 감사합니다...

    • 2013-07-05 11:48:24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꽃을 보고 슬픈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그 뜨거운 사랑이 아쉽잖아요.

    • 2013-07-01 17:55:04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