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모란의 연(緣)」
- 작성일 201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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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모란의 연(緣)」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 시_ 류시화 -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인도 사상에 심취한 그는 여행과 명상을 통한 자기 탐구의 길을 걸으며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등을 발표했다.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엮었으며, 명상서적을 소개해 오고 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썼다.
● 낭송_ 신혜정 - 시인.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라면의 정치학』이 있다.
* 배달하며
어느 봄날 비운 지 오래인 집을 찾았는데 빈 집 마당에 작약이 찬란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울컥 치미는 꽃을 겨우겨우 내리 눌렀습니다. 아무 보는 이도 없는데 이토록 찬란하게 피었느냐!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저승을 다녀오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꽃들과 오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작약 철이면 앓아눕는 병이 생겼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 대신 모란꽃만 자주 보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모란이란 꽃은 오래 바라보면 그대로 그 꽃빛이 눈가에 번지는 꽃입니다. 봄날 갑자기 눈가가 붉어진 사람이 있다면 붉은 모란을 오래 바라본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 사랑은 떨어져 흩어지기 일쑵니다.
시에서도 이런 순정한 사랑시가 맥을 못 추는, 자극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디에선가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무는’ 모란을 가꾸며 저승 소식도 배우면서 살아가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 출전_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
●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정정화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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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장석남 선생님, 왜 이 시에서 최하림 선생님의 냄새가 날까요?
항상 메일로만 시배달을 받아보다가 댓글을 달기 위해 실로 오랫만에 로그인을 했습니다.^^ 이 시가 나올 무렵, 저도 사랑이라는 터널을 막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몇번을 고심하며 망설인 끝에 이 시를 모란 빛 편지지에 적어 지난사랑의 집앞에 그사람의 긴 여행을 위한 선물들과 함께 고이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오는길.. 참 많이 울었습니다. 잊을 순 없겠지만 가시돋히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이 시를 받아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모란빛으로 변하는 것이..그때의 제가 생각나 아련하고 아득해져 눈물이 핑, 머리가 띵, 아찔해지네요. 시배달 너무나 감사합니다...
꽃을 보고 슬픈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그 뜨거운 사랑이 아쉽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