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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수증기」

  • 작성일 2013-07-08
  • 조회수 2,917


박성준, 「수증기」





내일 오후, 애인이 떠나면서 선물한 벽지로 그는 도배를 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던지는 평서문에 대해 고민을 하는가

선량하다 이악스럽다 해맑게 억세다 삐뚤빼뚤 피가 흐른다? 무슨 말을 시작해야 좋을까

다정한 주름 밖으로 성대를 잘라낸 개처럼 편안하게 웃는 것, 그들에겐 부족한 것은 없는가

목이 마를 때면 송곳으로 방바닥에 애인은 그의 이름을 긁어주곤 하는지

그들은 서로에게 무능해서 착한 사람들

왜 이별은 가벼워지기 위해 뿌리가 길까



• 시·낭송_ 박성준 -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가 있다.

• 출전_ 『몰아 쓴 일기』(문학과지성사)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여기 맹물을 끓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 건더기 없는 백탕을 끓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후, 불어 끄면 그만인 불 위에 솥을 얹고 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그것도 어긋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모든 사랑은 아마 어긋난 상황일 겁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수증기가 오릅니다. 물은 물이 아닌 것이 되어 허공 바깥으로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아직 불이 꺼지진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해서 끓고 있습니다. 불을 끄면 사랑이 아니요 그냥 두면 모두 증발해 버리는 것, 그게 사랑이지요.

애인이 떠나면 마음의 새 단장을 해야지요. 그러나 그건 침침한 어둠의 도배지일 것이고 성대도 없는 개가 웃듯 방바닥에 이름을 파며 가짜 웃음을 웃어야 할 것입니다. 이별은 뿌리가 깁니다. 수증기가 천지에 잔뿌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맹물 다 끓어 사라지고 남은 빈 솥, 그 솥에 밥을 끓입니다. 눈물 그렁그렁한 채 아귀아귀 밥을 먹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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