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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붉은 눈」

  • 작성일 2013-08-05
  • 조회수 2,891



안도현, 「붉은 눈」

부엌,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잘 슬퍼져요 부엌은 늙거나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덩달아 부엌, 이라는 말도 떠나가겠죠? 안 그래도 외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더는 고등어를 굽지 않아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아궁이 생각나요? 아아, 나는 어릴 때 아궁이 앞에서 불꽃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돼, 하면서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우는 소리로 밥이 익는다고 생각했어요 알아요? 아궁이는 어두워지면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이 되어주었지요 참 크고 붉은 눈이었어요 이제 아무도 자신의 붉은 눈을 태우지 않아요 숯불 위에 말이 쓰러져요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




● 시_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 이수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송_ 정숙지 - 시인. 2001년 《시현실》로 등단.

● 출전_ 『북항』(문학동네)
● 음악_ SHK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부엌이 집의 전체이던 때가 있었죠. 저 먼 시대는 불을 피우면 그곳이 부엌이었고 집이었겠죠. 어쩌면 우리말의 부엌이라는 말이 '불'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부엌은 여전히 집의 심장이지요. 거기서 식구들의 생명은 공급되는 것이니까요. 부엌이 가동되지 않으면 집은 식어가지요. 아궁이에서 말 달리던 불꽃은 이제 조용하고 푸른 가스 불로 바뀌었죠. 그마저도 쉬는 날이 많아졌죠. 부엌이 시무룩한 날들이 많은 집은 생기가 없는 집이죠. 비린내도 나야 하고 된장 냄새도 나야 해요. 끓어 넘치는 것이 있어야 해요. 부엌은 한 집안의 광장이지요. 거기서 집회가 있어야 해요. '식구'라는 말, 같은 부엌의 같은 불과 같은 솥의 음식을 먹는다는 말이지요.
크고 튼튼한 솥을 걸고 싶어요. 무든 집의 부엌 불이 환하고 따스한 나라의 백성이고 싶어요.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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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아궁이를 바라보던 그 눈이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 2013-08-10 14:55: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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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 왜 그런 걸까 묻고 싶어지네요. 저 같은 경우엔 분노할수록 제 자신이 더 아파져서 그럴 텐데. 시인께서는 다른 마음으로 쓰셨을테니.

    • 2013-08-09 15:46: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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