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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여수』중에서

  • 작성일 2013-12-26
  • 조회수 1,213


   유용주,『여수』중에서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누군가. 쓸데없는 고집 하나라면 역발산기개세도 한수 접고 물러서던 때였으니,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죽어도 안 한다는 신념으로 주막집 외상 술값을 불려나간 장본인이다. 취한 가장의 끊어질 듯 이어질듯 왜색가요 들리는 주막집 봉창을 흘겨보며, 작은 형은 장산으로 수룡골로 올라가 나무하고 산퇘깽이 잡고 범골이나 짚은 골까지 내려가 비얌이나 깨구락지를 잡아왔다. 겁이 많은 나는 누나를 따라 강가로 내려갔는데, 강은 소리 없는 눈물이고, 눈물 섞인 애달픔이고, 애달픈 반죽 섞인 노래와 아롱지는 푸념소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습기 많은 남도창으로 흘러갔다. 관절 너덜거리는 동편제로 흘러갔다. 누나는 고동을 줍고 나는 나만큼이나 부황이 든 꽤봭쟁이들하고 돌팍을 들추고 흐르는 물을 막아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 밑에 고여 있는 물을 고무신으로 퍼내, 피라미나 중태기 땡사리나 가재를 잡아 주전자 속에 담아 오기도 했다. 그날 밤은 꼭 그만큼 손 뻘건 자식들 손가락 닮은 고추장을 퍼내어 물고기와 다른 잡것들을 대개 1대 9 정도 비율로 버무리고, 또 거기에 한 열 말들이 속 깊은 물을 붓고 천천히 고아내면, 이끼 낀 산속 온갖 벌레들의 배설물과 새의 깃털과 나무의 숨결 같은 아주 맑은 기름도 진달래 화전으로 떠올라, 땀 번들거리는 이마, 찧는 줄도 모르고 마구 처먹어대던 그런 날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날밤은 육시럽게 달이 밝아 개호주 우는 소리도 처량한데, 쇠죽 쑨 아랫목에서 호꼰하게 잠이 들면, 꼭 아까 우리가 먹었던 비릿한 물고기의 뼈 고은 탕이, 살입은 어육이, 저 여수 앞바다에서 꼬물거리고 헤엄쳐 와 하동과 구례를 거슬러 올라와 남원 요천을 힘차게 요동쳐 우리 집 앞 개울까지 오지 않았나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것은 외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바닷가의 비린내를 맡고 싶어 하는 알들의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그래, 언젠가는 내 꼭 한 번 가보고 말리라. 가서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품에 꼭 한 번 안겨보리라 다짐도 했었는데, 그것은 설핏 품은 잠 속의 꿈같은 것이었다. 꿈이 깨면 윗목은 얼어붙고 문풍지 사이로 싸락눈이 마구 비껴들고 있었다. 눈은 아까 우리가 잡아먹은 물고기의 영혼을 위로하러 온 천사의 손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살풋, 저 용소에 천년 좌선하고 있는 아무기의 흡판처럼 거대한 잠의 혓바닥이 나를 끌어당기면, 또 밑도 끝도 없는 눈 속을 한없이 걷기도 했다. 그 몽유 중에 삭다리 타는 냄새는 졸아든 뱃구레로 돌아드는데 아침이 왔던 것이다. 순백의 아침이 왔던 것이다.


   ◆ 작가_ 유용주 – 시인.1960년 전북 장수 출생. 1991년 『창작과 비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산문집『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아름다운 얼굴들』장편소설『마린을 찾아서』등이 있음.

   ◆ 낭독_ 유성주 – 배우. 연극 <그게 아닌데>, <싸움꾼들> 등에 출연.

   ◆ 출전_ 『여수작가 2013년 봄호』(여수작가)

◆ 음악_ backtraxx - corporateindustrial 3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양연식



   배달하며


   『여수작가』라는 책이 한권 왔습니다. 그 속에 유용주씨의 산문 「여수」가 들어있었습니다. 「여수」속에는 이처럼 파도 꿈틀거리는, 강물처럼 휘어져 도는 호흡이 들어있었습니다. 요즘은 보기드믄 유장한 문장입니다. 차고 넘치는, 유년의 결핍과 그리움. 맞습니다. 기억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셈이지요. 이렇듯 어렸을 때의 기억은 참으로 끈질긴 혓바닥 같은 거여서 거기에서 모든 문학은 출발합니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올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문학집배원 한창훈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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