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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폴란드’라는 시간을 통과하였다」중에서

  • 작성일 2014-01-03
  • 조회수 1,317

조해진, 「‘폴란드’라는 시간을 통과하였다」중에서




그런데 폴란드의 겨울은 단순히 춥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의 겨울이 맑고 가볍게 춥다면 폴란드는 흐릿하고 무겁게 춥다고 해야 할까. 마치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의 차이처럼 말이다. 아무려나 10월 초에 폴란드에 도착한 나는 삼주가 지나기도 전에 길고 긴 겨울의 초입으로 떠밀려들어가게 된 셈이었는데, 이때는 오후 4시가 되기도 전에 어둠이 스미고 모든 관공서와 상점들도 일찍 문을 걸어잠근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학교를 나서면 벌써부터 밤의 한 자락이 발밑에 도달해 있는 날들이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업이 끝나도 곧바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노붐의 한국어학과 사무실에서 어둠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그래서 온 도시가 우주 속으로 침잠한 듯 캄캄함과 고요함이 창밖을 촘촘히 에워쌀 때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름은 학과 사무실이었지만 사실 그곳은 텅 빈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조교는 커녕 컴퓨터도 없었고 전화기나 팩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건 책상 두 개와 책이 꽂혀 있지 않은 책장 하나가 전부였다. 초라하다면 초라할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내가 폴란드에서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성숙해졌다면 그 시간을 마련해준 공간은 아마도 그 학과 사무실이었을 것이다.

보통 오후 5시 정도만 지나도 노붐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복도는 세상의 마지막 방공호의 비밀통로처럼 쓸쓸해진다.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스피커에 엠피스리를 연결하여 음악을 트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창가에 기대서서 자판기에서 뽑아온 쓰고 뜨거운 커피를 맛있게 마셨고, 종이컵이 다 비워질 즘엔 노트북을 켜고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수업을 준비할 때도 있었고 학생들의 출결이나 숙제를 체크할 때도 있었다. 소설을 쓴 날도 있었지만 전날 쓴 문장들을 몽땅 지운 날도 그만큼 많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몇 권 안되는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도 있었고 폴란드어 책을 펼쳐놓고 ‘나는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중앙역은 어디입니까?’ 같은 문장을 외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간혹, 입술을 틀어막고 곰처럼 울기도 했다. 지갑은 얇고 추억은 빈약했지만 나는 늘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 작가_ 조해진 – 소설가.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지은 책으로 소설집『천사들의 도시』, 장편소설『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등이 있음.

◆ 낭독_ 서진 – 배우. 연극 <안티고네>, <모든 것에게 모든 것> 등에 출연.

◆ 출전_ 『누구나 이방인』(창비)

◆ 음악_ - The Film Edge/ reflective-slow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양연식



배달하며
누구나 살면서 혼자 울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며 어디인지도 중요하지만 최소한 한번 이상은 혼자 울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죠. 이렇게 낯선 이국의 밤, 아무도 없는, 심지어 책이 없는 책장이 배경이면 울기 좋은 곳이 되겠지요. 존재의 고독이 운명처럼 똬리 틀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영혼의 진화를 시도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프고 난 아이가 부쩍 자라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눈물이 나올 때마다 타인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울 곳은 광야에 준비되어 있다. 거기서 울고 돌아오라.’

문학집배원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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