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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여자는 몸의 물기를 닦는다」

  • 작성일 2014-01-20
  • 조회수 2,102

이원, 「여자는 몸의 물기를 닦는다」



목욕탕의 대형 거울이 알몸의 여자를 정면으로 비춘다 여자의 왼쪽 유방이 있어야 할 자리가 납작하다 유방을 들어낸 자리에 가로로 흉터가 나 있다 뜨거운 시간에 닿았었는지 살이 오그라들었다 뜨거운 시간은 밀봉되는지 흉터가 달라붙은 입 같다 두 개의 유방을 가진 여자들은 재잘거린다 힐끔힐끔 여자의 시간을 빨아 먹는다 이내 뱉어버린다 여자는 수건을 들어 몸의 물기를 닦는다 왼쪽 유방이 있던 자리에서 여자의 손이 멈칫한다 여자는 없는 왼쪽 유방이 무겁다 없는 왼쪽 유방이 출렁거린다 유방을 도려낸 시간으로 여자는 뜨겁게 출렁거린다 유방을 남겨둔 시간으로 여자는 차갑게 출렁거린다 펄펄 끓는 손의 기억으로 여자에게 유방이 솟아오른다 오른쪽 유방이 제 그림자를 왼쪽 유방의 자리에 가만가만 드리워준다 왼쪽 유방이 머물던 자리가 불빛을 둥글게 담는다 빛과 어둠으로 빚은 달항아리가 여자의 몸에서 탄생한다


◆ 시·낭송_ 이원 – 경기도 화성 출생.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불가능한 종이의 역사』가 있음. 현대시학 작품상, 현대시 작품상을 수상함.


배달하며

왜 모든 여자는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가슴이 있을까 궁금한 때가 있었습니다. 왜 모든 여자들은 어여쁘게도 다 가슴이 있는 것인가! 아무리 살펴도 그랬으니까요. 세상에 사랑을 주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러니까 남자들이란 대개 받는 것들입니다. 사랑도 받고 눈물도 받고.

헌데 여기 한 여자의 유방 한쪽이 없습니다. 철조망 같은 것이 그 가슴 안쪽 마음에 엉켜 있을 것만 같습니다. ‘펄펄 끓는 손의 기억’을 따라가면 그의 없어진 한쪽 가슴도 한때는 ‘달항아리’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는 그것이었습니다. 헌데 그것이 지금은 폐허가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전율 같은 슬픔이 쏟아져 나옵니다.
자기 몸의 상처와 자기 마음의 흉터에 대하여 무한한 위로를 보내야 할 때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 출전_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문학과지성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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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여우같은북극곰공주

    엄마가 생각나요. 울엄마도 유방암으로 왼쪽 유방을 들어냈지요. 귀천하신 엄마가 한없이 보고 싶습니다.

    • 2014-02-02 10:41:25
    여우같은북극곰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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