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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시장』 중에서

  • 작성일 2014-02-20
  • 조회수 1,562

이옥, 『시장』중에서








내가 머물고 있는 주막은 시장에 가깝다. 2일과 7일이면 어김없이 시장의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시장 북쪽은 바로 내 거처의 남쪽 벽 밑이다. 벽은 오래전부터 창이 없었다. 내가 햇볕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멍을 뚫고 종이창을 만들었다. 종이창 밖으로 열 걸음을 채 못가서 낮은 둑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리로 시장을 출입하는 곳이다. 종이창에는 또 구멍을 내어 겨우 눈 하나를 붙일 수 있다.

12월의 27일에 장이 섰다. 나는 너무도 무료해서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하늘에는 여전히 눈이 쏟아질 듯 하여 구름인지 눈기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대략 정오는 이미 넘긴 때였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가 있고, 닭을 안고 오는 자가 있고, 八梢魚(문어)를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들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주렁주렁 엮어서 오는 자가 있고, 煙草(담배)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가 있고, 미역을 끌고 오는 자가 있고, 곶감을 안고 오는 자가 있고, 접은 종이 한 묶음을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무명베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사람이 보이는데 그 아이의 오른손은 엿과 떡을 쥐고서 먹고 있고, 고리짝을 등에 지고 오는 자가 있고, 주발에 술과 국을 담아서 조심조심 오는 자가 있고, 치마에 물건을 담아 옷섶을 든 여자가 있고, 손을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남녀가 있고, 방갓을 쓰고 흉복을 들고 있는 자가 있고, 승복과 중모자를 쓴 중이 있고, 남자는 삿갓을 썼는데 자주색 휘항을 십중팔구가 썼고 목도리를 한 자가 십중 두셋이다.

나이 서른 이상 되는 여자는 모두 검은 조바위를 썼는데 그 중에 흰 조바위를 쓴 자는 복을 입은 사람이다. 늙은이는 지팡이를 짚고, 어린이는 손을 잡고 간다. 행인 가운데 술에 취한 자가 많은데, 가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급한 자는 달려간다. 구경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땔나무 한 짐을 진 자가 나타나 종이창밖의 담장 정면에 앉아 쉰다. 나도 그제야 안석에 기대 누웠다. 세모라서 시장은 한결 붐빈다. (부분생략)



◆ 작가_ 이옥 – 조선 후기 문인. 1760년 출생.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2년 국왕이 출제한 문장시험에 소품체(小品體)를 쓴 것이 문제가 돼 이후 군대에 끌려가고 관직 진출 마저 막혀버렸으나 신념을 지켰고 이후 창작에만 몰두했음.

◆ 낭독_ 이상구 – 배우. 연극 <리어왕>, <싸리타> <유리알눈>등에 출연.




배달하며



이옥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신이었습니다만 이런 소품류의 글을 자주 써서 정조의 눈 밖에 나버린 사람입니다. 이른바 문체파동을 겪었죠. 이 글은 1800년 설 바로 전에 쓴 것입니다. 이백 여 년 전의 시장 풍경인데 타임머신 타고 간 것처럼 손에 잡힐 듯하고 무료한 선비가 창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풍경 또한 그 쓸쓸함이 생생합니다. 사극에서 연출하는 장면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 당시 직접 보고 쓴 것이니 어째 안 그러겠습니까. 이옥은 이렇게 외곽으로 밀려나 낯선 곳에서 시간이나 때워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글을 얻게 된 우리에게는 그게 다행입니다. 낚시꾼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문학집배원 한창훈


◆ 출전_ 『이옥의 소품문 2』(현대시학 제35권 8호)

◆ 음악_ Backtraxx/nature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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