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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임꺽정』중에서

  • 작성일 2014-04-14
  • 조회수 1,450



“어느 세미나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임꺽정』 앞에서 만큼은 저는 순한 독자이고 학생일 뿐입니다.”



홍명희, 『임꺽정』중에서





꺽정이가 서림이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은 뒤 입과 손으로 피리 부는 시늉을 내고 턱으로 단천령을 가리켰다. 휘파람보다는 피리를 불게 하란 뜻이다. 서림이가 꺽정이의 뜻을 받고 단천령 옆에 와서 앉으며
“피리 신성은 익히 듣조왔지만 휘파람까지 용하신 줄은 몰랐소이다.”
하고 말을 붙이니 단천령은 휘파람을 그치고 한참 있다가
“오늘 밤 달이 좋소.”
하고 딴청으로 대답하였다.
(중략)
“오늘 밤 같은 이런 좋은 달밤에 피리를 한번 안 부시렵니까?”
“달은 좋아두 흥이 나지 않소.”
“내가 귀뜸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서림이가 갑자기 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하니
“무슨 말이요?”
하고 묻는 단천령의 말소리도 따라서 낮아졌다.
“오늘 밤 이 잔치의 속내를 아십니까?”
“내가 알 까닭이 있소?”
“대장이란 사람이 피리가 듣구 싶어서 일부러 이 잔치를 차렸습니다. 가야고 끝난 뒤에는 필경 한 곡조 듣자구 청할 테니 처음에 좋은 낯으루 청할 때 선뜻 허락하십시오.”
“그 청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 모양이오.”
“아까 잔치 차릴 공론을 할 때 일껀 잔치까지 차렸다가 피리를 안 불면 어떻게 하랴 말이 났었습니다. 오복전 조르듯 조르자구 말하는 사람두 있었구 한 달이구 두 달이구 붙들어두었다가 그예 한번 듣자구 말하는 사람두 있었는데, 대장이 이말저말 다 듣구 나서 하는 말이 한번 불래서 불지 않으면 창피하게 조를 것두 없구 또 나중 듣자구 붙들어둘 것두 없구 피리를 다시는 불지 못하두룩 입술을 짜개서 쌍언청이를 만들구 두 손의 손가락을 끊어서 조막손이를 만들어 놔보내겠다구 합디다. 이런 불호광경(不好光景)이 나지 않두룩 조심하십시오. 저녁 전에 잠깐 가서 뵙구 말씀을 해드리려구 한 것이 틈이 없어 못 갔습니다.”
서림이의 소곤소곤 지껄이는 말이 단천령 귀에는 우레같이 울리었다. 단천령이 송구한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고 한참 생각하고 있다가
“여러 사람이 모두 피리를 듣구 싶어하우?”
하고 물었다.



▶ 작가_ 홍명희 - 소설가. 언론인, 정치가. 1988년 충북 괴산 출생. 1928-40년 조선일보, 조광 등에 장편소설 임꺽정 연재. 동아일보 편집국장, 오산학교 교장, 신간회 부회장, 해방이후 월북, 북한 초대정권 부수상 역임 등.


▶ 조주현 - 배우. 연극 <감포사는 분이>, <사랑, 지고지순하다> 등에 출연
▶ 임형택 - 배우. 연극 <염쟁이 유씨>, <만선>, <농담> 등에 출연. 극단 작은신화 단원.
서진 - 배우. 연극 <안티고네>,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등에 출연.



배달하며

단천령은 종실(宗室) 사람으로 피리를 아주 잘 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신변 보장되는 계급이면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참 걱정 없는 한량이었죠. 이 양반이 가야금 뛰어나다는 영변 땅 초향이와 재미나게 놀고 한양 돌아오는 길에 청석골에 잡힙니다. 자존심 높은 사람이라 튕기는데 그러다 이 말 한 마디에 곧바로 피리를 불게 됩니다.
소설『임꺽정』의 의미에 대해서는 새삼 되풀이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만 말하자면 벽초 선생은 봉건 지배층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계급적인 각성을 시키기 위해, 그러니까 잘났다고 뻐기는 양반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네 번을 정독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소설 같았습니다. 이 내용은 「화적편 3 」에 있습니다.

문학집배원 한창훈


▶ 출전_ 『임꺽정』(사계절출판사)

▶ 음악_ Backtraxx/nature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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