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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삼포 가는 길』중에서

  • 작성일 2014-05-01
  • 조회수 1,992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 아나톨 프랑스(작가)-



황석영, 『삼포 가는 길』중에서





마을 하나를 지났다. 그들은 눈 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을의 가게 유리창마다 성에가 두껍게 덮여 있었고 창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마을을 지날 때엔 눈발이 차츰 걷혀갔다. 그들은 노변의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깠다. 속이 화끈거렸다.
털썩,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끔씩 들리는 송림 사이를 지나는데, 뒤에 처져서 걷던 영달이가 주춤 서면서 말했다.
“저것 좀 보슈.”
“뭣 말요?”
“저쪽 소나무 아래.”
쭈그려앉은 여자의 등이 보였다. 붉은 코트 자락을 위로 쳐들고 쭈그린 꼴이 아마도 소변이 급해서 외진 곳을 찾은 모양이다. 여자가 허연 궁둥이를 쳐들고 속곳을 올리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오머머!”
여자가 재빨리 코트 자락을 내리고 보퉁이를 집어들면서 투덜거렸다.
“개새끼들 뭘 보구 지랄야.”
영달이가 낄낄 웃었고, 정씨가 낮게 소곤거렸다.
“외눈 쌍까풀인데 그래.”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더라니······”
여자는 어디가 불안했는지 그들에게로 다가오기를 꺼리며 주춤주춤했다. 영달이가 말했다.
“잘 만났는데 백화 아가씨, 찬샘에서 뺑소니치는 길이구만.”
“무슨 상관야, 내 발루 내가 가는데.”
“주인 아줌마가 댁을 만나면 잡아다 달래던데.”
여자가 태연하게 그들에게로 걸어나왔다.
“잡아가 보시지.”
백화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길을 걷느라고 발갛게 달아 있었다. 정씨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행선지가 어디요? 이 친구 말은 농담이구.”
여자는 소변 보다가 남자들 눈에 띈 일보다는 영달이의 거친 말솜씨에 몹시 토라져 있었다.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 작가_ 황석영 - 소설가. 1943년 만주 출생. 고교시절인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지은 책으로 소설집『객지』『삼포 가는 길』장편소설『오래된 정원』『손님』『무기의 그늘』『개밥바라기 별』『낯익은 세상』『장길산』등이 있음. 단재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등 수상.


▶ 낭독_ 전현아 - 배우. 연극 <쉬반의 신발>,<베니스의 상인>,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 등에 출연.
이현배 - 배우. 연극 <환상동화>, <억울한 여자>, 드라마 <대풍수>등에 출연.
이갑선 - 배우.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 <안티고네>, <키친> 등에 출연.



배달하며

한국 문학사의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TV문학관을 보신 세대라면 문오장, 차화연, 안병경 세 사람이 김영동의 곡을 배경으로 스산한 겨울 시골길 걷는 장면을 기억 하실 겁니다. 우린 사실 얼마 전까지 이렇게 살았죠.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아주 난감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때 이 작품을 베꼈습니다. 첫 페이지를 그대로 원고지로 옮기는 순간 강렬하게 다가왔던 느낌은 지금도 선연합니다.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구나, 싶은 거였죠.
그러나 저러나 우리 주변의 그 숱했던 백화와 영달, 정씨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몹시 늙어있거나 몇몇은 죽기도 했겠죠.

문학집배원 한창훈


▶ 출전_ 『삼포 가는 길』(창비)

▶ 음악_ The Film Edge / Casual-Every Day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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