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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연,『돌의 말』중에서

  • 작성일 2014-05-30
  • 조회수 1,652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묶어 두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 존 A. 셰드 (교육자) -



오수연,『돌의 말』중에서






내가 들고 있는 찻잔 바닥에도 하나의 바다가 고여 있다. 이 남은 차가 누군가에게는 망망대해일 테니. 내가 지금 배를 타고 건너는 이 망망대해는, 누군가의 차 한 잔. 내가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 적 있듯, 누군가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빌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큰가, 작은가?
(중략)
해는 바다에서 검은 기둥 같은 신기루를 끌어올릴 정도로 강하다. 수평선에 황금빛 테두리가 쨍 둘린다. 흰 구름의 나라가 임한다. 불탄다. 검은 구름의 나라가 임한다. 지상에 한때 출현했던, 그리고 앞으로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형태들이 밀려온다. 불탄다.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다.
해가 검은 공 되어 튄다. 해로부터 나까지 똑바로 뻗어 있던 일직선 길이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한다. 어스름이 하늘하늘 타올라 훌쩍 뛰어, 해 위에 또 한 줄기 생긴다. 해 떨어진다. 어스름 풀풀 날리며 해 떨어진다. 수평선에 둘렸던 황금 테두리가 양쪽에서 움츠러들어 해와 겹쳐진다. 수면 한 뼘 위에서 해 가라앉는다. 누군가 저 뜨거운 해를 두 손으로 받았다.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다.
오빠, 우리는 모습을 입고 태어나 시간을 알아버렸지. 우린 길가메시에게 속아 삼나무 숲을 빼앗겨버린 후와와, 신전의 네 귀퉁이에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용쓰며 천장을 떠받치는 고르곤, 캄캄한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고 견뎌 마침내 나와서는 화살을 맞아버린 곰. 저주 받았어. 그런데 오빠, 그래서 우리가 만났잖아. 꾸준히 숨 쉬고 먹고 싸서 서로를 볼 수 있었고, 손도 잡을 수 있었어. 오빠는 문틈에 보릿대를 꽂고 입에 머금은 물을 뿜어, 내게 물을 먹여줄 수 있었어.
“이거 먹고, 꼭 살아!”
나는 받아먹을 수 있었고. 영원 속에서 단 한순간, 우린 같이 있었어. 우린 동창, 동반자, 자살한 신들. 사랑하는 오빠, 걱정 마. 나는 이미 저 앞에 가고 있으니까. 나는 아주 멀리 가 있으니까.
바다가 거칠 때는 수평선이 솟아올라. 바다가 깔때기 모양으로 우묵해져서 사방에서 파도가 데굴데굴 배로 굴러내려와. 흰 머리카락 흩날리며 죽 달려오는 파도, 백파(白波)는 폭풍의 전조라지. 무엇이 이 바다를 부글부글 끓게 하는가. 지금 한꺼번에 솟구쳐서 바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찰나간 멈춘, 모든 파도를.




▶ 작가_ 오수연 - 소설가. 1964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난쟁이 나라의 국경일』,연작소설『황금지붕』,소설집『빈집』,르뽀집 『아부 알리, 죽지 마-이라크 전쟁의 기록』등이 있음. 한국일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 수상


▶ 낭독_ 전현아 - 배우. 연극 <쉬반의 신발>,<베니스의 상인>,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 등에 출연.



배달하며

휘몰아치는 문장입니다. 싸안아 압박하면서 강렬하게 이끌고 갑니다. 작가는 분명 진짜 바다, 넓고 깊은 먼 바다 위에 떠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만난 ‘바다의 문장’들을 해안에서 거닐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고 수평선으로 지는 노을을 보고 불현듯 낯선 이성을 만나고 생선회를 안주로 술 마시고 무언가를 추억하거나 간혹 여관으로 가는 것 말입니다. 설사 주인공이 운다 하더라도 그저 바다가 배경일 뿐입니다. 그러나 대양은 다릅니다. 존재를 존재로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아픔도 범인류적이 됩니다.

문학집배원 한창훈


▶ 출전_ 『돌의 말』(문학동네)

▶ 음악_ crank city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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