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불 때

 

윤진현(문학박사)




「기적 불 때」는 궁핍한 기층 민중의 삶을 다룬 것으로서 온 가족이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도시빈민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교한 무대 설정과 자연스러운 일상어의 사용, 현실적인 사건 재현 등 이 작품을 본격 사실주의 극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극적 사실주의란 단순히 무대나 인물의 설정이 개연성 있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김정진 작품의 사실성은 상황을 ‘관찰’하는 기자 김정진의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작품은 공장의 노동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뚜-’하고 울리기를 전후하여 철로 공사장에서 일하다 다쳐 움직이지를 못하는 화실이 아기를 업고 궐련갑을 바르는 손녀 옥순과 함께 아들 내외와 손자를 기다리며 시작한다. 아들은 한강으로 얼음을 뜨는 일을 하러 나갔고 며느리는 젖먹이를 떼어 놓고 공장에 갔으며 총명하고 착실한 손자 복만이마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연초 공장으로 벌이를 나갔다. ‘뚜-’소리가 울리고 한참이 지나 경삼 내외가 돌아오지만 복만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공장 사역과 함께 일하는 아이가 등장하여 복만의 사고 소식을 전한다. 복만이 기계에 끼어들어가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복만을 살피러 달려 나가고 혼자 남은 화실은 자책하며 양잿물을 마신다. 돌아온 아들 경삼은 크게 놀라 의원을 청하지만 거절당하고 화실은 결국 숨이 끊어지고 만다.




서울 변두리 삶을 옮겨다 놓은 듯한 이 비극적 사건은 기자 김정진의 눈으로 포착된 것이다. 물론 김정진이 영향을 받은 시마무라 호오게쯔는 자연주의적이며 객관적인 묘사를 중시했고 이것이 김정진의 극작 태도에 반영되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기층 민중의 일상을 취재하고 관찰하는 기자로서의 직업의식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실성의 획득은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의 세밀한 무대지시문은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의 결과로 보인다. 놀랍도록 사실적인 무대 지문은 당시의 도시 빈민의 주거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실(史實)에 가깝다.




당대 빈민의 암울한 삶을 기록하는 김정진의 극작 태도 또한 제작자의 것이라기보다 관찰자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실로 무대효과를 들 수 있다. 「기적 불 때」의 중요한 무대 효과로 ‘눈’이 내리고 있다. 흐렸던 하늘에서는 화실의 며느리 김성녀가 돌아올 무렵, ‘풋득풋득’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경삼이 돌아올 때는 더욱 쏟아진다. 복만이가 다쳤다는 소식이 당도할 즈음에는 눈이 퍼붓듯이 내리며 이는 화실이 죽고 막이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점점 더 쏟아지는 눈은 화실 일가의 곤경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무대 위에서 재현할 것인가? ‘눈’을 표현할 만한 소품을 ‘퍼붓듯이’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퍼붓는 눈이 아니라면, 눈이 쏟아지며 깊어지는 위기와 그 시각적 차단 효과에서 비롯되는 암울한 시간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절망, 눈을 통해 확산되는 그 비극적인 냉기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퍼붓는 눈이 없다면 「기적 불 때」의 암울한 분위기는 훨씬 반감될 것이다. 이점에서 「기적 불 때」의 사실성은 확실히 ‘연극적 사실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인물 간의 갈등이 부재하는 사건 구도 또한 극적이기보다는 산문적이다. 화실 일가는 서로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다투는 일 없이 완벽하게 헌신적이다. 화실은 가족의 고생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자식 내외와 손자, 손녀를 가엾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옥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젓하게 할아버지를 위로한다. 경삼 내외는 물론이고 어린 복만까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 벌이를 묵묵히 감내한다. 이처럼 완벽하게 화해롭고 희생적인 삶은 사실 관념적으로 상상된 것으로서 이들 기층민중의 진정한 생활감정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듯 민중적 삶의 바깥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상상하는 데서 추상적인 거리가 발생한다. 김정진은 암울한 현실의 근원을 일상의 바깥에 배치하고 인간들이 소통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철로 공사장에서 일하다 다친 화실, 공장 바퀴에 치여 크게 다친 복만이를 비롯한 직공들의 문제가 이 작품의 주요 갈등 요인이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돈 많은 놈들’에 대한 분노가 소수 자본가 계급이 이윤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전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치게 하는 ‘공장’에 대한 부정, 즉 근대 문명 일반에 대한 부정에 귀착되고 만다. 이러한 도착된 세계인식으로는 ‘복만의 사고’라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능한 대책을 모색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러한 한계로 인해 화실의 자살이란 자의적 결말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김정진의 희곡은 정교한 무대묘사와 개연성 있는 사건 등 특출한 드라마투르기로 자연주의적 현실 재현에 있어 주목할만한 문학사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특출한 현실재현은 신문기자로서의 산문의식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었으며 일차적으로 이러한 재현을 문학적 욕망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김정진의 후천적인 의식적 노력과 성찰이 근대 지향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촌양반 출신이란 신분에서 비롯된 인식적 한계로 말미암아 근대의 중심을 돌파하는 근대의 비극적 세계관으로의 확장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정당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 갈등과 파국에서는 핵심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김정진 연구는 새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단절과 지속 속에서 현재를 위한 의미층을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역사 – 문학사의 임무라면 이제 우리는 김정진의 이 ‘부정의 세계관’의 실질적인 내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근대의 천박성을 간파하고 그 속으로는 동화해 들어갈 수 없었던 김정진의 고민의 일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문장》

 

-서연호,『한국근대희곡사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양세라,「운정 김정진 희곡 연구」, 연대 석사학위논문, 1998. 12.


-윤진현,「운정 김정진 연구」, 연극사학회 편, 『한국연극연구』 3집, 2000. 10.


-윤진현,「김정진 희곡의 사랑과 연애?결혼 양상」, 『한국학연구』 12집, 2003. 11.


-유민영,『한국현대희곡사』, 기린원, 1988.


-이미원,『한국 근대극 연구』, 현대미학사, 1994.


-최병우,「운정 김정진의 희곡 연구」, 『강릉대 인문학보』8집,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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