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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 『저지대』중에서

  • 작성일 2014-06-26
  • 조회수 1,231



“내가 벽 속으로 손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너에게 닿았을 거야.”

- 줌파 라히리, 단편「일생에 한 번」중에서 -



줌파 라히리, 『저지대』중에서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는 일의 위험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실제로 위험에 빠뜨린 것은 그 경찰관의 피였다. 그 피는 그 경찰만의 피가 아니었다. 우다얀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경찰관이 골목에서 죽어 쓰러졌을 때, 우다얀은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피가 쏟아질 때를 기다려왔다.
몇 분의 1초 동안 총알의 폭발음이 폐를 찢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솟구치는 물소리나 몰아치는 바람 소리 같은 소리였다. 이 세상의 불변하는 힘에 속하는 소리, 이 세상에서 그를 꺼내가는 소리……. 정적은 이제 순수하고 완전했다. 간섭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우리가 그 앞에 복숭앗빛 사리를 입고 서 있었다. 그녀는 약간 숨을 헐떡였다. 블라우스의 겨드랑이 부분이 땀에 젖었다. 화창한 오후, 영화관 밖, 중간 휴식시간이었다. 그들은 영화의 1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한낮에 그를 만나러 왔다. 아내보다는 훨씬 더 낯설지만, 어둠 속에서 함께 앉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싶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지 않는 그 무게를 느끼고 싶었다. 빛이 그 머리카락에서 반사되어 거울처럼 반짝이면서 희미하지만 완벽한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애를 썼다. 손가락에서 담배를 떨구며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는 그녀에 맞추어 몸을 가누었다. 고개를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울였고, 햇볕으로부터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려고 손을 올려 둘 사이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오직 정적뿐. 햇볕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 작가_ 조해진 -줌파 라히리 - 1967년 런던,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남.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재학 중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함. 소설집『축복받은 집』『그저 좋은 사람』, 장편소설『이름 뒤에 숨은 사랑』『저지대』가 있다. 오헨리 문학상, 펜/헤밍웨이 문학상, 퓰리처상 등 수상,


▶ 낭독_조경란 - 소설가. 쓴 책으로 『불란서 안경원』『악어이야기』『복어』등이 있음



배달하며

글쓰기나 영화의 기법들 중에 ‘슬로우 모션’이라는 게 있습니다. 주인공의, 생의 특별했던 한 순간을 마치 시간을 정지시킨 듯 독자들에게 가깝고 상세히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지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그 순간은 상처나 고통을 받았을 때, 슬픔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가슴 떨리던, 잊을 수 없는 찰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지금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우다얀이라는 청년과 처음엔 그의 아내였다 훗날 형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가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첫 데이트를 하는 날, 뒤늦게 온 그녀의 얼굴을 햇볕으로부터 가려주려고 손차양을 만들어 올리는 수줍은 청년. 저에게는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빛나는 마지막 장면이 돼버렸습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저지대』(마음산책)

▶ 음악_ The Film Edge/underscores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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