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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 작성일 2014-12-05
  • 조회수 1,642



“나는 탁 트인 풍경을 좋아한다. 하지만
풍경을 등 뒤로 하고 앉는 것도 좋아한다.”

- 거투르드 스타인,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중에서 -



앨리스 먼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물 나르기 말고도 아버지를 도와 내가 하는 일은, 우리 사이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명아주며 물꽈리 따위의 풀들을 베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커다란 낫으로 풀들을 베어내면 내가 갈퀴로 긁어모았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쇠스랑으로 갓 베어낸 풀들을 우릿간 지붕에 던져 골고루 덮었다. 여우도 시원하게 지내게 해주면서 햇볕을 너무 쬐면 갈색으로 변하는 여우 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일과 관련된 것 말고는 내게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엄마와 많이 달랐다. 엄마는 기분이 좋으면 온갖 이야기를 시시콜콜 해주곤 했다. 어렸을 때 키웠던 개 이름, 나중에 더 커서 데이트를 했던 남자아이들의 이름, 엄마가 원피스를 입었을 때의 모습 따위의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떤 생각 무슨 이야기들을 아버지가 남몰래 품고 있었든, 나는 아버지가 조심스러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기꺼이 일을 했고 그러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어느 날 먹이 외판원이 우리 쪽으로 내려왔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새로 고용한 우리 일꾼을 소개하지.”
나는 돌아서서 아주 열심히 풀을 긁어모았다. 좋아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절 놀리시는 거죠? 여자애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 작가_ 앨리스 먼로 - 캐나다 소설가.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시골 마을에서 출생. 웨스턴오하이오 대학 재학 중에 첫 단편 「그림자의 차원」발표.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떠남』『디어 라이프』등이 있음. 2013년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평을 들으며 노벨문학상 수상.


▶ 낭독_ 오민석 - 배우. 연극 「만파식적」, 「봄은 한철이다」, 「바람직한 청소년」 등에 출연
문형주 - 배우. 연극 「맘모스 해동」, 「칼리큘라」, 「수인의 몸이야기」 등에 출연



배달하며

여우 목장을 하는 아버지를 둔 어린 맏딸입니다. 부모가 목장 일을 남동생에게만 시키는 게, 자신이 딸이라는 이유로 집 밖의 일들에서 제외되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인정받고 싶겠지요, 우선 아버지에게.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 소설은. 모든 가족들, 하다못해 목장의 여우들에게도 각각 이름이 있는데 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행복한 그림자의 춤』(뿔, 2010.)

▶ 음악_ The Film Edge - Themes-Concepts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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