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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 「바람 부는 저녁 ―안토니를 위하여」

  • 작성일 2014-12-29
  • 조회수 1,460




하일지, 「바람 부는 저녁 ―안토니를 위하여」

바람 부는 저녁
할머니는 내 서랍 속에서 잔다
내 제비들과 함께
바람 부는 저녁이면
내 제비들은 열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열이 있기 때문이다
푸른 열
나선형의 열

바람 부는 저녁에
모든 오리나무들은 울고 있고
모든 양귀비들은 시들어 가고 있고
모든 뱀들은 차가운 흙 위에서
경마장을 회상한다
알래스카에서 열린 공의회처럼
허공에 펄럭이는 경마장
내 어린 제비들은 밤새 기침을 한다

바람 부는 저녁에는
아무도 길을 나서지 않는다
길모퉁이에는 오직
여윈 이방인 한 사람만이
낡은 아코디언으로
이국의 선율을 연주한다

시베리아로 떠나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난 뒤로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조금씩 바람은 잦아든다
내 어린것들의 기침 소리도
그리고 내 식물원 위로는
천천히 새벽이 다가온다
그러나 내 서랍 속 어디에서도
할머니는 찾을 수 없다
제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할머니는
벌써 스무 해 전에
내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 시_ 하일지 - 하일지(1955~ )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1990년 장편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 여러 권을 펴내고, 시집으로 『내 서랍 속 제비들』도 있다.

▶ 낭송_ 강정 - 시인. 시집으로 『처형극장』 『키스』 등이 있다.


배달하며
하일지 씨는 소설가이면서 미국과 프랑스와 한국에서 각각 시집을 한 권씩 낸 시인이지요. 바람 부는 저녁,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나’와 어린 제비는 몸에 열이 있군요. 오리나무들은 울고, 양귀비들은 시들고, 뱀은 차가운 땅에서 경마장을 회상하네요. 계절은 겨울, 그러니까 밤새 기침을 하는 어린 제비들의 안부를 걱정하겠지요. 할머니는 ‘나’와 제비들을 근심하며 “서랍 속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는 벌써 스무 해 전에 떠났다고 하네요. 삶에는 얼마나 많은 “바람 부는 저녁”들이 있고, 그런 저녁마다 얼마나 우리 마음은 스산함으로 떨었을까요?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영구적인 미제사건(未濟事件)인 삶의 어느 구체적인 국면을 만진 듯 제 손이 서늘하네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 출전_ 『내 서랍 속 제비들』(민음사)
▶ 음악_ Backtraxx - Loser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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