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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체

  • 작성일 2015-04-27
  • 조회수 446

전이체

 6년차 신문기자 앤야가 10년 가까이 지내온 도시를 떠나 귀향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일하는 신문사에서 그녀가 고생해서 취재한 특종을 다른 동료에게 넘겨준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비중 있는 기사 말미 이름칸을 빼앗기는 것은 늘 있어온 일이다. 그녀도 평소라면 속은 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겼을 것이다. 앤야에게 기사를 넘겨받은 동료는 그녀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표했고, 편집장도 따로 치사를 했다. 그 정도면 족한 일이었다.

고생한 대가로 간만에 휴가도 받았다. 퇴근해서 방에 들어왔을 때 앤야는 약간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자니 뭔가 에 가슴 한 구석이 팍팍했다. 그것은 마치 돌덩어리처럼 가슴 어딘가에 꽉 들어박혀 있었다.

‘하아..’

모처럼의 휴가로 집에 틀어박힌지도 며칠이 지났다. 앤야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팍팍한 가슴만 붙잡고 있었다.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가슴이 꽉 막힌 이유는 어느 정도 깨달았지만, 정작 이 막힌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하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힘없이 그냥 늘어져서 가슴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특히 무기력증이 심해졌다. 좁은 창문 너머로 주룩 주룩 떨어지는 빗줄기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멍해지고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휴가는 이미 다 끝났고 무단결근이 오늘로 이틀째다. 그녀가 기거하는 이 시계탑 종루의 작은 다락방에 틀어박힌 지는 닷새가 지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이 도시에서는 그녀 같은 여자 한 명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떨어지는 빗줄기와 알록달록한 우산을 쓴 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창 너머에서 멍청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물다섯 앤야.. 신문사의 일하는 액세서리 아가씨.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 주는 이도 없다.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없다. ‘나는 여기서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꿈꾸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려 보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의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이런 종류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결국 혼자서 답을 내리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리석고 경험 없는 그녀가 혼자서 내리는 해결책은 당연히 엉터리였고 문제는 점점 이상하게 꼬여가 결국 체념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내곤 했다.

‘그만 두자.’

며칠에 걸친 고민 끝에 앤야가 내린 결론은 결국 체념이었다. 더는 잘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직장생활도 괜찮았고, 세 들어 사는 이 좁고 퀴퀴한 시계탑도 괜찮았다. 몇 차례의 실연도 괜찮았고, 단골 식당의 형편없는 음식도 머리 벗겨진 상사와 느끼한 동료의 집적거림도 다 괜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쳤다. 어째서일까? 더 견딜 수 있을 텐데, 더 잘해나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조금도 힘이 나지 않는 걸까?

앤야에게는 무기력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설령 답이 나온다 한들 엉터리 결론일게 뻔했다. 앤야는 이번에는 지름길로 가기로 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되도 않는 헛고생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체념의 단계로 미리 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끝이다. 괴로운 도시생활은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먼저 직장부터 때려치자. 가슴속에 늘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드디어 그 재수 없는 상사의 면전에 내던질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비는 그치지도 않고 퍼붓는구나.’

비는 내리고, 알록 달록한 우산의 행렬도 끊임없었다. 참 바쁘게도 움직인다. 도시란 이런 것이지..
앤야는 비가 그치기까지 사직서 제출을 좀 미루기로 했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부들거리며 사직서(항복문서)를 제출하는 패잔병 꼴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뭐 큰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모양새라는 것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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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는 앤야를 붙잡지 않았다. 남녀평등이고 어쩌고 하는 허울 좋은 구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몇 여기자를 들이기는 했지만, 이 신문사에서 구색 맞추기용 여기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기실은 일 잘하고 승진을 위해 웃음이나 몸을 팔지도 않는 그녀가 여간 껄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퇴직금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데 속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이제 사사건건 자신을 훼방 놓는 잭,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도 있는 주제에 자꾸만 집적대는 엘단, 겉으로는 친한 척 하면서 뒤로는 언제나 그녀의 험담을 늘어놓는 제시카 등 넌더리나는 수많은 인간들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시생활은 무엇 하나 진저리나지 않는 일이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이런 지저분한 인간관계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기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득실을 계산해 타인을 기만하는 사람과 사람들..
물론 앤야 역시 비슷한 부류가 아니다.. 라고는 단언할 수 없었지만, 뭐 흡연자라고 해서 옆에 흡연자가 앉아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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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고향 트웰린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농촌으로 오가는 이가 없어 기차편도 거의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었다.
그 일주일에 한번 내려가는 트웰린 행 열차도 사람이 없어 객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나마 몇 있던 이도 중간 정거장에서 다 내려버리고 남은 이는 몇 정거장 전에 그녀 옆에 앉은 단정한 외모의 아가씨 밖에 없었다.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는 나와 저 앳된 아가씨뿐인가?’

아직도 트웰린에 도착하기까지는 열 시간도 넘게 남았다. 이렇게 넓은 객실에 둘만 있자니 퍽 이상하다. 옆 자리의 아가씨는 매우 지친 기색이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잔뜩 골아 떨어져 좀처럼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릴없이 혼자 창 밖 풍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도시의 풍경은 조금씩 흐려져가고 숲과 들판, 맑은 하늘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간다. 벌써부터 고향의 정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앤야는 왠지 아련한 기분이 되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차려주는 향긋한 아침을 먹고 언니와 함께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등교한다. 등굣길에 언제나처럼 장작을 패고 있는 털복숭이 자크 아저씨께 밝게 인사하면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우리 손에 호두 두 알씩을 쥐어준다. 유치원에 가면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맘씨 고운 선생님이 그녀들을 반겨주고, 하루 종일 배우고 놀다가 집에 가면 따뜻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다. 어머니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립네.’

기억 속 고향 사람들은 모두 솔직하고 정이 많았다. 이제 더 이상 도시에서의 가식과 기만에 시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처럼, 아무 걱정 없이...

“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앤야는 옆 자리의 작은 기침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라?’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그냥 잠 든 거면 괜찮은데 앤야의 머리는 옆 자리 아가씨의 어깨에 기대 반쯤 누워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베게삼아 아주 푹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앤야는 급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사죄했다. 이런 낭패도 없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큰 실례를 하다니! 나이도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데.. 앤야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다행히 앳된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녀의 미소에 앤야는 한층 마음이 놓였다.

“휴우..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네요. 전 앤야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마르티나에요. 저도 반가워요.”

트웰린까지 도착하기에는 매우 긴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그녀들은 자연스레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볍게 시작된 대화는 몇 시간에 걸쳐 끝없이 이어졌다. 앤야가 다른 사람과 이토록 길게 대화를 나눈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넓은 객실에 우리 둘 밖에 없네요. 마르티나 수녀님도 트웰린으로 가는 중인가요?”'

앤야의 말에 마르티나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제가 수녀인 걸 어떻게 알았죠?”

“간단해요. 그리고 왼손에 묶어 놓은 스카프는 묵주자국을 가리기 위해 맨 것일 테구, 나이 찬 아가씨라면 응당 있어야 할 귀걸이도, 귀걸이 자국도 없구요. 성직자 특유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몸에 배어있는 데다, 꽤 마이너한 경전 언어를 몇 차례 섞어 쓰시더라구요. 이런 거 하나 하나를 모아보면 아가씨가 수녀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와아.. 감이 좋으신데요? 제가 이렇게 차려 입으면 다들 봄나들이 나온 아가씨로 보던데.. 수녀인걸 맞춘 사람은 앤야 씨가 처음이에요.”

“에헷, 이래 뵈도 전직 기자란 말이죠.”

앤야는 짐짓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마르티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는다.

“후후 앤야 씨 말대로 전 수녀가 맞고 트웰린으로 가는 것도 맞아요. 그쪽 교회로 발령받았거든요.”

“정말요?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전 원래 트웰린 출신인데 지금까지 쭈욱 수도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오늘부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가는 거예요.”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요. 혹시 교회 다니세요?”

수녀의 물음에 앤야는 말문이 막혔다. 도시로 올라오기 전에는 꼬박 꼬박 교회에 나갔는데 도시로 올라온 후에는 교회에 간 햇수가 손에 꼽을 정도다. 이 정도면 신앙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간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아니 사실.. 도시에 거주할 때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진 않았어요. 하지만 트웰린에서는 매주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구요. 마르티나 수녀님 얼굴도 뵐 겸 해서요.”

앤야가 도시에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은 첫째로 시간이 없어서였고, 둘째로 성당에 다니는 목적이 신앙심 외에 다른 데에 있는 타산적인 도시사람들이 싫어서였다. 하지만 트웰린에서는 딱히 교회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그냥 열심히 다니면 될 것 같았다.

“저런.. 하지만 행여 신께 조금 소홀한 면이 있었더라도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잘 하시면 되죠 뭐. 후후 잘 되었네요. 앤야님이 만약 신도가 아니셨다면 트웰린에 도착하기까지 담당사제로서 귀가 따갑도록 전도를 했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담당사제라구요? 설마...’

앤야는 담당사제라는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 교단의 사제는 지금껏 머리 벗겨진 아저씨, 나이 지긋한 할머니 정도나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사제치고는 꽤 어려 보이나요? 사실 앤야 자매님보다 제가 훨씬 나이가 많을 거예요.. 서른 여덞이에요.”

“에..”

앤야는 마르티나가 그녀를 놀리나 싶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거의 이십년은 어려 보이는 셈이다.

“믿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제가 워낙 나이에 비해 젊어보여서요. 하지만 한 교구의 담당사제가 되려면 제 나이 정도의 경력은 쌓여야 해요”

앤야는 다시 한 번 마르티나의 겉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나들이 모자 밑으로 드러낸 은회색 머리카락과 백옥 같은 피부. 또렷하고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 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대단한 미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앳된 외모는 아무리 높게 봐줘도 역시 10대 후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몸집이 작아서 더더욱 그렇다.

“정말 젊어 보이시네요. 저보다도 어려 보이시는데.. 대체 비결이 뭔가요?”
“신을 열심히 섬기면 몸도 마음도 젊어지게 되요. 앤야 자매님도 이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면 오래 오래 아름다움을 간직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하 설마요..’

아직도 트웰린에 도착하기 까지는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둘이서 할 일이 수다밖에 없었으므로, 앤야와 마르티나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긴 긴 시간을 보냈다. 그녀들은 서로에 대한 신변잡기 화제 이외에 주로 트웰린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마르티나는 외지인이라 트웰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앤야가 그녀에게 트웰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다. 앤야의 기억 속 잔뜩 미화된 트웰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르티나도 지금부터 자신이 거주하게 될 트웰린에 대해 퍽 기대를 갖는 모양이었다.

“앤야 자매님 말을 듣고 보니 트웰린에서의 나날이 기다려지네요.”

“그렇죠? 하지만 수녀님은 외지인이라 약간 낯선 부분도 분명 있을 거에요. 제가 수녀님이 트웰린 생활에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릴게요.”

앤야의 말에 마르티나는 기쁜 듯한 기색이었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네요. 앤야 자매님도 혹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세요. 교단의 사제로서 당신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나이 차이는 꽤 나는 편이지만 저는 앤야 자매가 손 아래 여동생처럼 느껴지는군요.”

“아 네..”

자신보다 한참 연하로 보이는 외모의 마르티나가 그런 말을 하니 퍽 이상했다. 앤야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자. 마르티나는 자그마한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살짝 어루만졌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다음에 봬요.”

앤야는 마르티나의 손이 생각 외로 차가운 것에 깜짝 놀랐다. 앤야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녀는 손을 떼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앤야가 창가로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 너머로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가는 마르티나의 작은 모습이 보인다. 뭐 저리 바쁜 걸까? 근처까지는 동행해도 괜찮을 텐데..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지?’

앤야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첫날에 저런 좋은 인연을 만나다니 아주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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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에 한가득 짐을 들고 십 수년 전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집 앞에 서서 잠깐 숨을 가다듬는다. 집에 내려온 것은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조금도 감상에 젖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추억과 향수의 무게에 짓눌려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앤야는 짐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네 나가요.”

그리운 언니 로엔의 음성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고, 아직 젊고 아름답지만 도시생활에 시달리던 무렵의앤야보다도 지쳐 보이는 눈가에 기미가 낀 아가씨가 모습을 보인다.

“어 언니?”
“아 앤야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들어오렴.”

로엔은 짐을 나눠들고 앤야를 집에 들였다. 그녀는 감지 못해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헤어진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세련된 언니가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집이라지만..

“네가 처음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온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랐는데, 후후”

짐을 방으로 옮기며 로엔은 쉴새 없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 퍽 반가운 모양이다. 앤야 역시 언니가 반가웠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안타까운 몰골이 자꾸 신경 쓰였다. 도시 생활에 지쳐서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고향에서 주욱 살아온 언니는 그녀 자신보다도 지쳐보인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무슨 문제인 걸까?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형부까지 셋이 식탁에 둘러앉았는데, 앤야는 형부 한스가 어떤 인간인지 그 짧은 시간에 거즘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기자생활을 했다고 들었어. 우리 처제는 예쁜 아가씨가 머리까지 똑똑하니 대단하네.”
“아 네.”

한스는 앤야를 보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훑어보고 대뜸 반말을 꺼냈다. 식사 내내 부담스럽게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했으며 말투에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저런 종류의 인간을 수없이 많이 상대해본 앤야는 그 정도의 특징만 가지고도 칠 팔 할 정도는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물론 얼마 전 나이를 착각한 마르티나의 경우처럼 첫 인상만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금물이지만, 보통은 그녀의 판단이 맞다.

“남자 꽤나 홀렸겠네. 하지만 도시 놈들은 다 비리비리하고 약해 빠진 녀석들이고 제대로 된 남자는 하나도 없을 거야. 그렇지? 하하.”

"...."

“물론이죠. 여보. 앤야. 한스 말대로야. 도시 남자들은 다 형편없는 샌님들이라니까? 너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여기서 좋은 인연을 만나 정착했으면 좋겠구나.”

로엔 언니는 머뭇거리다 억지웃음을 띈 채 한스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리고 앤야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스 형부야 그렇다 쳐도 로엔까지 저 모양이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웃어 넘기며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하는 일 뿐이었다. 뭐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예전 어머니의 손맛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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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집에서 며칠간 지내며 앤야는 자신이 지녔던 고향에 대한 환상이 조각조각 부셔지는 안타까운 경험을 해야 했다.

그녀가 꿈꿔온 시골 특유의 느긋함이나 순박함, 정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로엔은 하루 종일 여유가 없어 보였고, 형부 한스는 매일같이 술집을 들락거리며 제 멋대로 살았다. 이웃들은 도시에서 좋은 신문사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온 앤야를 이상한 눈으로 봤고 어린 시절 그녀를 잘 대해주던 어른들은 늙어서 기력이 쇠했거나 돌아가셨거나 한 뒤였다. 옛 친구들도 다들 어디론가 흩어져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무엇을 기대한 걸까?’

밤중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어 본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 모양으로 실망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괴롭다.

뭐 앤야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무엇보다도 불쌍한 것은 로엔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남편 한스에게 잡혀 살았다. 한스는 앤야가 지금껏 봐온 사내들 중에도 최악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만한 인물로, 얼굴 반반한거 외에는 도대체 제대로 된 구석이 없었다. 일도 안하고, 손끝 하나 하지 않으면서 로엔을 부려먹기만 하는데, 기가 막힌건 로엔이 그런 한스에게 조금 도 반항하지 않고 굽신댄다는 것이었다. 로엔은 어째서 저런 남자와 결혼한 걸까?
돈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한스는 정말 봐줄 곳 하나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었지만, 부모를 잘 만난 덕에 물려받은 유산이 꽤 있었다. 집안이 가난해 혼수도 변변히 지참하지 못했던 로엔은 한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것이다.

불행하게 살고 있는 로엔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꽉 막힌다. 그것은 일을 그만두기 전 그녀가 느낀 기분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앤야는 한동안 로엔의 집에 얹혀살 생각이었지만, 로엔이 처한 형편을 깨닫고 나서는 한시 바삐 그녀의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잠이 안 오네.’

이런 저런 걱정으로 앤야는 자꾸 뒤척이기만 했다. 집을 구하는 것도 문제고,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지도 문제다.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고향에 내려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덜컹

한참 고민에 빠져있는 앤야의 귓가에 웬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밤중에 대체 누가?
끼이익

그 인기척은 대담하게도 앤야가 묵고 있는 방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앤야는 침대에 누워 자는 척 하며 침입자의 정체를 추리해 봤다.

‘로엔이 괴로운 삶을 견디다 못해 한 밤중에 내게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온 걸까? 아니면 도둑인가? 퇴직금을 은행에 맡겨놓길 잘 했네. 그도 아니면 한스? 그 양아치 같은 형부가 나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었지.’

불청객은 앤야의 침대로 다가와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앤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뭐 밤중이라 보이지는 않겠지만, 술에 취한 미친 놈이 여자의 방에 함부로 침입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처 처제..”

불청객의 입에서 신음처럼 새어나온 한 마디에 앤야는 그의 정체가 다름아닌 한스 였음을 알게 되었다.

‘미친..’

한스가 한 밤중에 처제의 방에 들어온 목적은 보나 마나 뻔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스는 거칠게 숨을 쉬며 앤야를 덥쳐드는게 아닌가?

앤야는 기가 막혔다. 한 밤중에 처제에게 몹쓸 짓을 하려 하다니, 이런 나쁜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로엔은 어째서 이런 짐승같은 사내와 결혼한 걸까? 약점이라도 잡혔나?

“저 저기. 형부. 뭐하는..”

“가만 있어!”

한스는 앤야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계속 그녀를 더듬었다. 앤야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신이 여기서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그 방법이 좋겠지?’

잠시 후 결정을 내린 앤야는 유혹적으로 미소지으며 한스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처제가 자신의 행위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한스는 용기를 얻어 더욱 게걸스럽게 그녀를 탐해온다. 그리고 앤야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한순간에 그의 목을 강하게 압박했다.

“커 컥..”

동맥을 압박당한 한스는 당황하여 버둥거렸지만 금새 의식을 잃고 앤야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종군기자 시절 배워놓은 기예가 이런 식으로 도움 될 줄은 몰랐는데.. 앤야는 기절한 한스를 옆으로 치워내고 헝크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가자.’

앤야는 자신의 침대에 엎어져 있는 한스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다. 한시라도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로엔에게 이 사실을 말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앤야는 펜을 들어 집을 나간다는 간단한 메모를 남긴 후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겨 즉시 언니의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나.’

차가운 밤바람을 맞고 있자니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참 처량하고 외롭기 그지없다. 고독한 도시생활에 질려서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정작 고향에서도 그녀는 혼자였다.

결국 앤야 스스로가 문제였던 것이다. 도시고 시골이고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의지박약에 멍청하고 한심하고 사회성도 없고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갈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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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밤을 해메이다 결국 앤야가 도달한 곳은 교회였다. 늦은 밤 중이라 당연히 교회 문이 닫혀있을 줄 알았는데, 안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아직 주무시지 않는 모양이네.’

이 시간에 교회에 남아있을 사람이라면 마르티나 수녀 뿐이었다. 무심코 가까이 다가가니 오르간 소리가 마음을 두드린다. 앤야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음악이라니..’

심야에 교회에서 퇴근도 하지 않고 오르간을 치고 있는 마르티나도, 양 손에 한가득 짐을 든 채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도 퍽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음악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르간 선율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절절하게 앤야의 마음에 저며들었다.

‘...돌아가자’

오르간 소리가 그치자 앤야는 이내 힘없이 돌아섰다. 도무지 마르티나에게 하루 밤 재워달라고 할 용기가 안 난다. 역전이라도 가서 대합실에서 눈을 붙여 볼까? 날이 밝으면 다시 도시로 올라가야지. 다시 신문사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겠지만, 단골 식당의 웨이트리스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나..

“누구시죠?”

“에..”

문득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마르티나가 있었다. 그녀는 앤야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바쁘게 다가왔다.

“앤야 자매님 아니세요? 이 밤중에 어쩐 일이세요?”

“그 그게..”

“일단 따라와요. 날도 추운데 이게 무슨 꼴이에요?”

마르티나는 다짜고짜 앤야의 짐을 빼앗아 들고 앞장섰다. 짐을 빼앗긴 앤야는 어쩔 수 없이 마르티나를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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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가 앤야를 데려간 곳은 교회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전임 사제가 살던 아담하고 깨끗한 집을 그대로 이어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 내외와 싸우고 한 밤중에 집을 나오게 되었다구요?”

“네. 홧김에 짐을 들고 나오기는 했는데,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어요. 오갈 곳 없는 처지에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교회까지 오게 되었네요.”

“잘 하셨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저를 찾아오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마르티나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지으며 앤야의 손을 살짝 감쌌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다 신의 인도하심 아니겠어요? 오늘은 피곤할테니 일단 눈부터 붙이세요.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앤야는 손을 감싸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마르티나 수녀가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지만 그녀의 손은 객실에서 처음 손이 닿았을 때처럼 여전히 서늘했다. 어디 병이라도 있는 걸까?

“잠은 제 침대에서 자면 되요.”

“고마워요. 하지만 그러면 마르티나 사제님은 어디서 주무시고..”

“전 작성해야 할 서류가 많이 남아 있어요. 일하기 싫어 교회에서 오르간이나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일해야죠. 당장 잘게 아니니까 걱정 말고 주무세요.”

“네..”

아닌게 아니라 무척 피곤했다. 그 난리통을 겪고 나니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마르티나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 종이 뭉치를 앤야는 마르티나 말대로 염치불구하고 그녀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아.. 이게 무슨 꼴이람..’

마르티나 수녀에게는 그냥 로엔 내외와 사소한 문제로 다퉜다고 적당히 둘러댔지만, 사실 앤야는 형부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 하고 도망쳐 나와 생판 남의 집 남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오늘은 다행히 마음씨 좋은 마르티나 수녀 덕에 묵을 곳이 생겼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눈 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로엔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는 노릇이고, 딱히 갈 곳도 없는데.. 역시 다시 도시로 올라가야 할까?

끝도 없이 떠오르는 걱정을 품고 앤야는 괴롭게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도, 잠든 후에도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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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아..”

새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잠이 깬 앤야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정오 무렵이다. 남의 침대에서 이렇게나 푹 자다니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콜록 콜록..”

문득 들리는 작은 기침소리에 돌아보니 그녀 옆에는 마르티나 수녀가 몸을 웅크리고 골아 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침대를 차지하면 마르티나는 어디서 자나 걱정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침대는 꽤 커서 여자 두 명이 잠을 자기에 충분한 사이즈였다. 앤야는 마르티나의 몸에 시트를 끌어올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떻게 한다..’

앤야는 하릴 없이 넓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마르티나의 방은 꽤 넓었지만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는데, 마르티나의 평소 언행을 생각하면 퍽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흐음.. 이건 뭐지?’

책상에는 어제 마르티나가 밤새 끄적거린 서류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 잘 보이는 곳에 놓인 작은 메모지에는 ‘오후 3시쯤에 꼭 좀 깨워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꽤나 늦게 주무신 모양이구나..’

메모 밑에 쌓여있는 서류를 들춰보니 교회의 회계출납과 관련된 복잡한 내용이 가득했다.

‘담당 사제도 쉬운 일이 아니네.’

그녀가 알기로 교단에서 트웰린과 같은 작은 마을에 파견하는 인력은 오직 담당사제 한명이었다. 즉 마르티나는 혼자서 주말 예배, 시설관리, 총무등 교회 운영을 도맡아 할 뿐 아니라 식사, 빨래, 청소 등 집안일까지 해내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 두시 밖에 되지 않았다. 앤야는 하루밤 신세진 보답을 할 겸 마르티나 수녀의 집안일을 좀 거들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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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빨래, 다림질.. 앤야가 대충 집안을 정리하고 식사 준비까지 끝마쳤을 때는 벌써 오후 세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앤야는 이마에 땀을 닦고 메모에 적힌 대로 마르티나를 깨우러 갔다.

마르티나 수녀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는 것이 조금 꺼려졌지만, 반드시 깨워 달라고 했으니까..

“저.. 마르티나 수녀님?”

“으음..”

“일어나세요. 오후 세 시에요.”

“.....”

“수녀님?”

“아.. 절 깨워주세요. 세 시에. 맛있었어요. 그림. 산호초.”

마르티나는 눈을 반쯤 뜨고 의미불명의 단어를 몇 마디 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이 오후 세 시라구요. 어서 일어나세요.”

“으음..”

앤야는 몇 차례 마르티나를 불러봤지만, 그녀는 살짝 뒤척이기만 할 뿐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조금씩 앤야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꿈 속 마르티나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피곤하신가?’

이렇게까지 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앤야는 마르티나의 작은 몸을 붙들고 양 옆으로 살짝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마르티나 수녀님!”

“네. 네. 깨워주세요.. 산호초니까.”

“일어나세요!”

일어날 의지 없이 의미 불명의 잠꼬대만 해 대는 마르티나를 보고 있자니 왠지 화가 났다. 앤야는 마르티나를 붙든 양 손에 힘을 조금씩 더했지만, 아무리 강하게 흔들어도 마르티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요!!”

“.....”

세상에! 이렇게 깊게 잠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 삼십분이다. 즉 잠자는 마르티나와 씨름한지 삼십분이 지났다는 것이다. 이미 앤야가 정성껏 만든 음식은 전부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일어나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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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도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 여기저기 고개를 돌렸다.

“앤야님? 어째서 여기에..”

“어제 제가 수녀님 방에서 신세를 졌잖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오후 세시는 한참 넘었다구요.”

“이런..”

마르티나는 슬픈 듯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 침대로 엎어지려 했다. 마르티나가 다시 잠을 자려 하자 앤야는 깜짝 놀라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서 끌어냈다. 마르티나는 몸이 작아서 끌어내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배고프시죠? 아침.. 아니 저녁에 가까운 점심을 차려 놨어요. 벌써 오후 네 시니까요.. 부엌으로 가시죠.”

“으음..”

마르티나는 여전히 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린다. 앤야는 마르티나를 질질 끌고 식탁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스프는 금방 데울게요. 일단 샐러드와 빵을 드세요.”

“으음..”

마르티나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 식탁에 차려진 빵을 물어뜯었다. 몇 차례 우물거리던 마르티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에 빠져든다.

‘정말 어디 병이라도 걸린 건가?’

앤야는 그녀가 빵을 입에 문 채 또다시 골아 떨어지자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하긴 처음 트웰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봤을 때도 그녀는 낮부터 하루 종일 잠에 취해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앤야는 마르티나가 언제까지 자나 두고 보기로 했다. 마르티나는 졸다가 씹던 빵을 마저 삼키고, 다시 졸다가 빵을 베어 물고 다시 졸고.. 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결국 의자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와당탕

“에? 수 수녀님?”

앤야가 깜짝 놀라 마르티나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손을 들어 앤야를 제지했다.

“이제 괜찮아요.”

“아 네..”

앤야를 올려보는 마르티나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그걸로 앤야는 마르티나가 제 정신을 차렸음을 이해했다.

“후우.. 못 볼꼴을 보였네요. 제가 잠에 좀 약하다보니..”

“아니에요. 저도 늦잠을 잤는걸요.”

정신을 차린 마르티나는 얌전히 앤야가 차린 식사를 들었다. 앤야는 이미 오래 전에 식사를 마친 후라 그저 마르티나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도시에서 혼자 살았나요?”

“아 네..”

“혼자 살면 보통 요리가 늘게 되죠. 아주 맛있네요. 뭐 저는 아무리 혼자 살아도 요리치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말이죠.”

“아 그건..”

앤야는 괜한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음식을 잘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식사를 마치고 마르티나의 방으로 돌아와 차를 들며 그녀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어쩌실 거죠?”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시 언니 집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

“가족 간에는 싸우는 거 아니에요. 갈 곳도 없는데 어쩌시려구요. 언니랑 화해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 안 되요.”

형부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 하고 집을 나온건데 어떻게 다시 거길 들어간단 말인가? 앤야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집안 사정이니 제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네요. 하지만 어쩐다..”

“마르티나 수녀님이 아니었다면 하룻밤 묶을 곳도 없었겠죠. 하아.. 사실은 새벽 열차편으로 도시에 다시 올라가려고 했어요.”

“정착하려고 내려왔다고 했잖아요. 일을 그만두고 내려올 정도면 나름 생각이 있었을 텐데 고작 이정도 문제로 다시 올라가는 것은 옳지 않아요. 방법을 생각해 봐요.”

앤야는 마르티나가 그녀의 일을 마르티나 자신의 문제처럼 고민해 주는 것이 눈물날 정도로 고마웠다. 가족도 아니고 생판 남이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 그냥 도시생활에 지쳐서 고향은 뭔가 다르려니 하고 무작정 내려온 거예요. 충동적으로 일을 결정한 대가를 받는 거죠. 도시에 올라가서 단골 식당 웨이트리스로 취직이라도 할까 봐요.”

“음.. 그러지 말고, 저랑 일해 볼래요? 숙식도 해결해 드릴게요.”

“네?”

앤야는 깜짝 놀라 마르티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와 일한다고?

“역시 마음에 내키지 않으신가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수녀님처럼 좋은 분과 함께한다는데 싫을 이유가 없죠.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죠? 교회에서 하는 일인가요?”

“으음..”

마르티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유치원 교사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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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는 트웰린 교구의 담당사제로서 지역봉사 및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교회에 부설 유치원을 설립할 생각이었다. 트웰린의 몇 안되는 미취학 아동은 일하느라 바쁜 부모들에게 큰 부담이었으므로 꽤 괜찮은 생각이기는 했다. 시설 문제도 교회 건물을 그대로 쓰면 되는 것이, 어차피 주말 예배를 제외하면 교회는 주중에 완전히 비게 되므로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앤야가 교회 유치원의 전담 교사가 되는 것이다. 가끔 시간 날 때 마르티나 수녀도 일을 도와준다고 했다.
마르티나 수녀의 제안은 아주 괜찮았다. 숙식은 그녀의 집에서 함께 해결하자고 했고 월급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아이를 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거의 접해본 적도 없다.

‘유치원 교사라니..’

아이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앤야는 오랜 기자생활로 웬만한 사람들의 성격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녀의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이유 없이 울어재낀다. 한없이 천사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아무 감정 없이 개구리를 짓밟아 죽이기도 한다. 앤야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하루 종일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퍽 부담을 느꼈다.

“뭐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하셔도 되요. 하지만 삼일 안에는 답을 주세요. 앤야 자매님이 하지 않겠다면 저도 교단에 사람을 신청해야 하니까요.”

“아뇨.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할게요.”

하지만 앤야는 마르티나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장 갈 곳도 지낼 곳도 없는데, 숙식 제공에 괜찮은 봉급까지 준다고 한다. 대체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조금 더 숙고해 보는게..”

“괜찮아요. 할게요.”

“그럼 당장 계약서를 쓰죠!”

마르티나는 책상에 쌓인 서류 뭉치를 뒤적여 종이 한 장을 꺼내왔다. 노동계약서였는데,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은 마르티나가 말한 것과 똑같았고, 하단에는 앤야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거기 서명만 하면 되요.”

“에.. 미리 만들어 놓으신 건가요?”

“네. 앤야 자매님이 적임자니까요. 꼭 저와 함께해 주셨으면 했어요.”

앤야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걸로 그녀는 팔자에 없는 유치원 교사가 된 것이다. 그녀가 서명을 끝마치자 마르티나가 환하게 웃으며 앤야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의 손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아마 저혈압이라도 앓고 있는 듯 했다.

“고마워요. 개원은 사흘 뒤니까 그때까지는 느긋이 있어도 되요. 그.. 언니와도 화해 하시구요. 구인 문제가 해결 되서 무척 기뻐요.”

“네. 저도 기뻐요.”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 몇 시죠?”

“여섯 시요.”

“이런 늦었네요. 막차에 늦겠어요. 저 출장 좀 다녀 올테니 집좀 지키고 있으세요.”

“출장이요?”

“네. 교구 인수인계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한 이틀정도 집에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집 잘 보고 계세요. 앞으로 같이 살게 될 거니까 내 집처럼 생각하면 되요.”

“네 수녀님.”

마르티나는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손가방을 챙겨 바쁘게 집을 나섰다. 앤야는 그녀가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뭔가 정신이 없네.’

그럴 만도 했다. 로엔 집에서 나와 마르티나 수녀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고, 유치원 교사가 된 데다가, 마르티나와 동거하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24시간 안에 이루어 진 것이다. 그리고 마르티나 수녀는 그녀를 혼자 집에 놔두고 출장을 가 버렸고

‘그래도 잘 된 일이야. 수녀님처럼 좋은 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뭔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방향은 나쁘지 않다. 불편한 언니의 집을 나왔고 숙식이 해결되었고 직장도 잡았다. 무엇보다 다시 도시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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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이 개원하기 전 앤야는 로엔의 집을 방문해 그녀에게 사정을 전했다. 로엔은 한밤중에 쪽지 한 장 남겨두고 집을 나간 동생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기에, 사정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무작정 내려 왔다기에 꽤 오래 놀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일을 찾아서 다행이야. 우리 한스도 너처럼 일자리를 잡아 성실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앤야는 그 양아치 같은 한스 형부가 그녀에게 한 짓에 대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그 일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묻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스도 아마 술에 취해 실수를 한 것이리라.

“집에 있을 때 잘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하구나. 가끔 찾아오렴.”

“응 언니. 다음에 봐.”

헤어질 때 로엔은 웃는 낯으로 앤야를 배웅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앤야는 언니가 퍽 걱정스러웠지만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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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 수녀는 출장에서 돌아온 후 곧 부설 유치원을 개장하고 주말 예배에서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앤야와 마르티나는 한동안 개원 준비로 꽤 바빴지만, 입학식 근처 쯤 해서 무난하게 준비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무료로 아이들을 돌봐 준다는데 농삿일로 바쁜 트웰린의 젊은 부부들이 마다할 리가 없다. 그래서 입학식 날에는 교회에 트웰린에 있는 일곱 살 미만의 미취학 아동은 전부 모이게 되었다. 인구가 워낙 적은 도시라 다 모아봐야 채 열 명도 되지 않았지만, 유치원 교사 일이 처음인 앤야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숫자였다.

“앤디.”
“네”
“프랭크.”
“네..”
“니키”
“...”
“니키?”
“너 부르잖아.”
“...네..”
“레오나”
“네!”
...

‘앤디, 프랭크, 니키, 레오나. 마엘. 루루. 피오나. 카타리나.’

앤야는 올망 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한 명의 아이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런 아이가 여덞 명이나 있다. 과연 자신이 이 애들을 잘 돌봐줄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겠어요. 전 앤야 리즈릿이라고 해요. 앞으로 여러분의 선생님이 될 거에요.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

“네에에엣!”

“앤야 선생님!”

“와아!”

아이들은 마치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앤야는 아이들의 저마다 지저귀는 소리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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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부모가 와서 아이들을 데려간 후에야 간신히 앤야는 유치원 선생님으로서의 첫 일과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가니 마르티나 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에야 일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와 잠옷 차림이었다.

“어때요. 오늘 괜찮았나요?”

“네. 그럭 저럭이요.”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앤야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괜한 걱정이나 실망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뭐 앤야 자매님은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오늘 온 아이들 중에 좀 이상한 아이가 있었나요?”

“네에?”

마르티나는 태연한 체 지나가듯 말했지만, 감이 좋은 앤야는 그녀의 기색에서 웬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아니 그러니까, 느낌이 이상한 아이요.”

마르티나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앤야는 무척 당황했다. 이상한 아이라니? 대체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죄송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애들은 애들일 뿐이지 이상한 애가 어디 있어요?”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잘 찾아보면..”

“네? 그걸 마르티나 수녀님이 어떻게 아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는 도통 모르겠어요.”

“....”

분명 마르티나 스스로도 자신이 말이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손사레를 쳤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이들은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착한 아이도 있을 거고 말썽쟁이도 있을 거에요. 그 중에서도 앤야 자매님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아이가 있으면 제게 아려주세요. 교육적 목적에서 특별 관리가 필요하니까요.”

‘마르티나 수녀님이 왜 저러시지?’

마르티나는 이런 저런 부연설명을 늘어놨지만, 앤야는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예전에 특종을 찾아다니던 시절 같았으면 그녀가 숨기는 사실이 무엇인지 샅샅이 조사해 봤겠지만, 앤야는 이제 기자가 아니다. 여기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알겠어요. 그런 아이가 있으면 보고 드릴게요.”

“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유치원의 책임자로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려는.. 뭐 하여튼 알겠죠?”

마르티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계속해서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럴수록 앤야의 의심만 살 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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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흘러, 앤야가 유치원 교사를 맡은 지도 석 달여가 지났다. 별로 어려운 일은 없었고 비슷한 하루가 계속 반복되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앤야는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고 그녀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이들의 기특한 모습은 꽤나 앤야를 즐겁게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앤야는 유치원 교사가 퍽 재미있었다. 여전히 앤야는 아이들의 난해한 순수성과 의외성은 꽤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이 무척 좋아졌다. 매일 일에 치여 살던 기자시절의 생활에 비하면 유치원 교사 생활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일과를 마치면 그녀는 가끔 로엔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고(물론 한스가 있을 시간은 피했다.) 교회 근처를 산책하기도 했다. 집에는 왠만하면 늦게 들어가는 편이었는데, 어차피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한창 꿈 속에 빠져있을 마르티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그녀의 잠을 방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르티나 수녀는 낮 밤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낮에 깨어 있는 하루는 일주일에 한 번 미사가 있는 주말 뿐이었다. 주말에 그녀는 오후까지 억지로 깨어 있다가 미사를 끝마친 후 바로 잠자리에 쓰러져 스물 네 시간을 잠으로 보내 다시 낮 밤을 뒤바꾼다. 앤야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마르티나의 믿어지지 않는 동안이 이런 기괴한 생활 패턴에 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니까 나름 일리는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마르티나의 이런 기괴한 수면패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뭐 앤야로서는 집안일이 줄어서 편하기는 했다. 퇴근한 후 마르티나가 저녁에 일어나서 들 식사만 준비하면 그녀가 맡은 집안일은 끝나니까.

유치원 일은 즐거웠고 마르티나 수녀와의 동거생활도 무척 좋았다. 앤야는 ‘이정도면..’하고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 물론 그녀가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올 때 가졌던 처음 기대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는 면도 있었지만, 지금의 삶에는 최소한 ‘여유’라는 것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던 도시의 생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마르티나가 그녀에게 당부한 ‘이상한 아이가 보이면 보고하라’는 말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는데도 마르티나의 말은 마치 주술처럼 앤야의 뇌리에 틀어박혀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자꾸 떠올랐다. 이상한 아이라니?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뭐가? 마르티나 수녀님이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왜 하필 유치원을 설립한 거지?

의심은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의심을 물어왔고 그것은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앤야는 아마 너무 오래 기자생활을 한 탓에 의심병에 걸려있는 듯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리면 되는 말인데 쓸데없이 마르티나의 말에 집착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상한 아이라..’

아닌게 아니라 있기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티나의 말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겠지.. 혼자서만 다른 아이들과 눈빛이 다른 아이. 돌맹이를 쥐고 땅에다 이상한 낙서를 그렸다가 쓱쓱 지워버리는 아이. 필요 이상으로 아이처럼 행동하는 아이.

그리고 그런 이상한 행동들은 모두 한 아이가 하는 행동이었다. 프랭크 네싱워리..
프랭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꽤 잘 생긴 소년으로 성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했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앤야는 달랐다. 앤야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행동의 동기나 과정 등을 이해하는게 퍽 힘들었지만, 웬일인지 프랭크의 행동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저 아이가 어째서 저렇게 행동하는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아이들과 프랭크의 차별화된 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해가 힘든데 프랭크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프랭크가 어른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이 아이를 가장하는 것 처럼 행동한다.
지나친 생각일까? 프랭크를 타인의 시점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 아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섯 살 사내아이와 같이 사고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앤야의 주관을 통해 프랭크를 관찰하면, 프랭크는 분명히 이상한 아이였다. 예를들면, 그가 그리는 그림이 그렇다. 땅바닥에 돌맹이로 그림을 그리는 것 정도는 어느 아이든 할 수 있지만 스치듯 살펴본 프랭크가 그리는 그림은 왠지 특별해 보였다.

앤야가 프랭크가 바닥에 그리는 그림을 자세히 확인해 볼라치면 아이는 싫증을 내며 그림을 재빨리 지워 버리곤 했다. 마치 앤야가 그 그림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 하도록 숨기려는 듯 보였다.

‘프랭크..’

프랭크가 아이를 가장하는 행동은 무척 그럴듯해서 아마 마르티나의 당부가 없었더라면 앤야는 전혀 그의 이상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르티나의 당부가 괜한 프랭크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도 된다.

그래서 앤야는 프랭크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머리를 흔들어 떠오른 생각을 지워 버리곤 했다. 너무 아이처럼 행동해서 이상하다니, 기도 안찬 이야기다.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다. 당연히 마르티나에게도 프랭크에 대한 일을 보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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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는 여느 때처럼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앤야는 기척을 죽이고 살그머니 그의 뒤에 다가가 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관찰했다.

산과 강, 구름등이 간략하게 표현된 풍경화다. 삼각형, 사각형, 타원 등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이는 그 중간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는다. 눈 코 입을 점으로 찍어서 표현한다. 그리고 그림 주변을 원으로 감싼 후 가장자리에 점을 찍어 이상한 각도로 잇는다.

‘설마..’

앤야는 점의 위치에 주목했다. 그리고 도형에 주목했다. 점은 별자리였고 도형은 기하학을 응용한 형태였다. 만약 아이가 그림의 우하단에 작은 삼각형을 그린다면 아이가 그린 그림은 그 유명한 피리어드의 점성술을 묘사한 그림이 될 것이다.

‘아니 조금 달라.’

아이는 그림의 우하단이 아닌 좌상단에 원을 그렸다. 그림 전체적으로 봤을때 그 원은 해를 묘사하는 듯 했지만, 앤야는 그 원을 해가 아닌 상징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원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아이의 그림은 피리어드의 점성술보다 더욱 완벽해졌다. 그림에서 마치 빛이 나오는 듯 하다.

그리고 다음순간 프랭크는 그림을 쓱쓱 지워버렸다. 그림의 신비를 좇고 있던 앤야는 깜짝 놀라 헛 숨을 들이켰다.

“에? 서 선생님?”

순간 인기척을 눈치챈 프랭크가 황급히 앤야를 돌아봤다. 앤야는 프랭크의 맑은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무척 당황했다.

“아 으.. 그 그게..”

“나 그림 그리는거 보고 있던 거야?”

“아니..”

“칫. 재미없게. 난 내 그림 누가 보는거 싫어. 선생님도 싫어요!”

프랭크는 씩씩대며 그네 쪽으로 가 버렸다.

‘뭐지?’

앤야는 프랭크가 그가 앤야 이상으로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프랭크의 과장된 행동에는 전에 느끼지 못한 그의 진심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틀림없이 진짜로 화났다. 그리고 프랭크가 화를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프랭크는 지금까지 몇 번 아이들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화를 낸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앤야가 아이들 사이를 중재했지만, 사실 프랭크는 단 한번도 진짜로 화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씩씩대고 화난 척 했지만, 그의 눈은 마치 귀찮다는 듯 먼 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프랭크의 맑은 눈동자는 앤야를 똑바로 향해 있었고 약간의 살의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기자시절 부패한 정치가와,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엉터리 마법약의 피해자 등과 인터뷰하며 몇 번이고 받아온 그 느낌이..

‘설마.. 그냥 착각이겠지.’

하지만 이대로 덮어 버리는 것은 왠지 석연치 않다. 앤야는 프랭크와 독대를 통해 자신의 의혹을 확실히 풀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앤야는 프랭크를 따로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냈다. 프랭크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뾰투룽한 표정으로 그녀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왜. 선생님?”

앤야는 프랭크를 지그시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프랭크. 네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해 보고 싶구나.”

“무슨 논의?”

“.....”

앤야는 프랭크가 자신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데 주목했다. 앤야는 프랭크에게 어려운 어휘를 사용해서 다른 어른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말을 건넸는데, 프랭크는 별 의문 없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앤야의 침묵에 프랭크도 금방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듯 보였다. 아이의 순진한 표정에서 살짝 당황의 기색이 스쳐간다. 볼수록 이 아이는 수상한 점 투성이다.

“그 그림.. 분명 피리어드의 점성술에 나오는 유명한 연성진이지. 나는 한때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했기에 잘 알고 있다.”

“??”

프랭크는 앤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빤히 앤야를 바라봤다. 하지만  앤야 생각에 여기서 아이들의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앤야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무시하고 원래대로 화를 내는 것이다. 프랭크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집착한 나머지 지금 자신이 앤야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깜박한 것이다.

“프랭크. 난 단지 사실을 알고 싶은 거야. 그렇게 어린애인 척 굴 필요 없어.”

“무슨 말이에요?”
“아니.. 휴우 됐다.”

앤야는 몇 마디 더 덧붙이려다 포기했다. 더 말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지금까지의 프랭크의 행적이 이미 프랭크에 대한 자신의 가설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굳이 이 아이에게 그 사실을 확인받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만 가보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럼 내 그림 앞으로 보지 마! 나 그런거 싫어.”

“응 선생님이 잘못했다.”

프랭크는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아마 저 아이도 앤야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저렇게 당황해서 다리를 떨고 있지.
프랭크는 어딘가 다르다. 도저히 다섯 살 난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지능과 인격을 갖췄다.
고작 다섯 살에 웬만한 어른들을 훌쩍 뛰어넘는 지능과, 어디서 익혔는지 모를 복잡한 점성진을 그릴 줄 아는 지식과 응용력. 그리고 자신의 뛰어남을 철저히 감출 줄 아는 교활함 까지 갖추었다니. 생각하면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앤야는 프랭크와 같은 아이가 세간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뭐 천재라는 거겠지.’

세상은 넓고 각양 각색의 사람이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고 있다. 걔 중에는 어려서부터 특출난 지능을 보유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필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천재가 그녀가 맡은 유치원에 다니게 된 것 뿐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천재성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는데, 앤야 생각에 이러한 프랭크의 방식은 아주 현명한 태도였다. 프랭크는 다만 스스로 자신의 천재성을 책임질 수 있을 나이가 될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앤야가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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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했는데, 앤야는 마르티나에게 어느 날 이 사실을 무심코 밝히고 말았다. 마르티나가 지나가듯 넌지시 예의 ‘이상한 아이’에 대해 묻자 앤야도 별 생각 없이 대답한 것인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프랭크의 정체를 밝히게 된 것이다.

“이상한 아이요? 흠.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마르티나는 반색하며 앤야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 아이죠? 어떻게 이상하죠?”

“뭐 별건 아니에요. 이상하다기보다는 뛰어나다고나 할까.. 머리가 정말 좋은 아이가 있어요. 프랭크라고.. 다섯 살인데 스물 다섯 살인 저보다도 머리가 좋아 보여요. 나중에 크게될 것 같아요.”

“머리가 좋다구요?”

그 말을 듣자 마르티나에 화색이 돌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앤야는 깜짝 놀랐다.

“그 그 프랭크라는 아이는 어떤 식으로 머리가 좋다는 거죠?”

마르티나는 그녀답지 않게 높은 톤의 음성으로 급히 되물었다. 앤야는 자신이 뭐 실수라도 한 것인가 무척 당황했다.

“아 그게.. 그냥 어른스러워요. 생각이나 행동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어떻게 어른스럽다는 거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죠?”

“.....”

앤야는 마르티나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퍽 난감했다. 프랭크가 머리가 좋다는 것은 전적으로 앤야의 주관일 뿐 딱히 증거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뭐..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하네요. 겉보기에는 그냥 애에요. 저한테 설명을 듣는 것 보다는 직접 만나 보시는건 어때요?”

“아 안돼요!”

마르티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 알아 볼 수도 있어요. 아니 반드시 알아 볼 거예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요!”

“즈 증거는 없어요. 그냥 제 생각일 뿐이에요.”

“그 생각이 중요해요. 앤야 자매님은 감이 좋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되요. 자 말해주세요. 어째서 앤야 자매님은 그 아이가 이상하다고 여겼죠?”

무언가 대화의 방향이 어긋나는 것 같다. 마르티나는 대단히 흥분해서 앤야의 어깨를 짚고 대답을 재촉하고 있다. 어깨를 짚은 그녀의 손은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무척 차가웠다.

“그.. 그냥 감이에요. 사실 프랭크는 행동 자체는 다섯 살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는데 그게 다 연극처럼 생각 되어서요. 어른이 아이의 몸을 하고 아이인 척 하는 거죠. 하하 완전 엉터리죠?”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마르티나는 앤야를 똑바로 노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되었어요. 역시 앤야 자매님을 선택한 것은 정답이었네요.”

“네 네?”

마르티나의 입가에 으스스한 미소가 감돈다. 앤야는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 매우 수상함을 느꼈지만, ‘수녀님이 왜 저러지’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 외에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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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도 마르티나의 수상한 태도는 계속되었다. 앤야가 유치원으로 출근할 때 언제나 골아 떨어져 있던 그녀가 전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잠도 안 자고 식사를 준비해 놓은 것이다.

“어 웬 일이세요 수녀님?”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앤야는 얌전히 식탁에 앉아 그녀가 차려준 음식을 들었다. 생각해 보면 마르티나가 자신에게 식사를 차려준 것은 처음이었다.

‘맛없네..’

그리고 앤야는 그동안 왜 마르티나가 식사를 차리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요리치라고 소개한 그녀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음식은 정말 맛이 없었다.
한참 억지로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마르티나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걸어왔다.

“참. 오늘은 유치원에 출근하실 필요가 없어요.”

“네? 왜요?”

“제가 오늘은 앤야 자매님 대신해서 유치원에 나갈게요.”

‘호오..’

마르티나가 유치원에 나간다는 것도 꽤 수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처음 유치원을 설립할 때 마르티나는 유치원의 책임자로서 가끔 앤야를 도와서 아이들을 돌봐주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석 달이 넘도록 그녀가 유치원에 얼굴을 보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앤야의 언니 로엔이 가끔 그녀를 찾아와 아이들을 돌보는 걸 도와주곤 했었다. 지금까지 마르티나는 단지 유치원 운영비만 대었을 뿐인데, 왜 하필이면 오늘..

“왜 그러죠? 이상한가요? 그동안은 바빠서 유치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은 좀 한가해서 아이들을 보려는 거에요.”

“아 네..”

마르티나의 갑작스런 변덕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앤야가 거기에 딴죽을 걸 이유는 없었다. 마르티나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하루 정도야 뭐..

“그럼 저는 오늘 휴가인가요?”

“아뇨. 할 일이 있어요. 미안하지만 앤야 자매님은 옆 에델린 마을 성당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해 주실래요?”

마르티나는 품에서 웬 빨간색 봉투를 꺼내서 앤야에게 건내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나가야 겠네요. 에델린 마을은 꽤 멀리 있잖아요. 기차타고 갔다 와야 겠어요.”

“괜히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급한 문서라서 직접 보내줘야 해요.”

“아니에요. 마르티나 수녀님 부탁이라면 당연히 수행해야죠. 부담갖지 마세요.”

앤야는 편지를 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근무 대신 심부름인가? 하루 정도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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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상해.’

이해할 수 없는 마르티나의 변덕과 갑작스런 심부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앤야가 없을 때 유치원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겠다는 것이다.

‘수상하단 말이야.’

고향에 내려온 이래 잔뜩 억눌러온 기자의 본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앤야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역전으로 향하는 동안 앤야는 내내 고민했다. 당연히 앤야는 마르티나 수녀를 믿는다. 그녀는 앤야에게 있어 살 곳과 직장을 제공해준 은인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품성도 나무랄 대 없었다. 그녀가 유치원에 무언가 몹쓸 짓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상한 아이의 존재에 대해 묻는 마르티나.

소위 이상한 아이인 ‘프랭크’에 대해 알리자 그녀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던 마르티나.

프랭크에 대해 알리자마자 억지로 구실을 붙여서 앤야를 유치원에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마르티나.
여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르티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어쩌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유치원 교사로서 마르티나 수녀의 유치원에 대한 꿍꿍이가 무엇인지 파헤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잠깐 보는 정도야 괜찮겠지.

결국 앤야는 역전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로엔의 집으로 향했다. 로엔에게 편지 심부름을 부탁하고 자신은 몰래 유치원에 돌아가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앤야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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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은 쉽게 앤야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녀는 밖에 나갈 구실이 생기자 당장 편지를 받아들고 나들이옷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에델린 마을에 다녀 오는 것은 꼬박 하루가 걸린다. 늦을 수도 있으니 한스에게 쪽지라도 남겨놓는게 어떠냐고 했더니 로엔은 이를 갈며

‘그 양반 벌써 이틀째 외박이야. 어디 술이나 쳐마시고 있겠지. 언젠가 크게 당할 날이 올 거야.’

라는 것이 아닌가? 앤야는 깜짝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로엔도 남편에 대해 아주 대책 없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로엔에게 편지를 맡긴 후 앤야는 성당으로 향했다. 마르티나 수녀는 수업을 잘 하고 있을까? 예정도 없이 다른 선생님이 들어온 것을 보고 아이들은 놀라지나 않았을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성당에 도착하자

“아..”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앤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치원 건물로 사용하고 있던 교회는, 말도 안 되게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불이 났다고? 아이들은 어쩌고? 마르티나 수녀님은?’

시커먼 연기와 타오르는 불길은 앤야의 마음에 아득한 절망을 드리웠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사람들을 부를까? 아이들은 다 무사히 탈출했겠지? 아니면..’
그녀가 패닉에 빠져 주저앉아 있는 와중에, 굳게 닫혀 있던 교회 문이 덜컥거렸다. 앤야가 반색을 하며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왈칵 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아아앙”

“우으읏”

“선생니임!”

아이들은 제각각 울며불며 앤야의 품에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잔뜩 겁먹고 당황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 할 거 없어. 선생님이 여기 있잖니.”

아이들이 무사한 것을 보자 앤야는 어느정도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조금 수가 모자라 보이는데..

‘앤디, 니키, 레오나, 마엘, 루루, 카타리나?’

불타는 교회에서 탈출한 아이는 총 여섯, 두명이 모자라다. 프랭크와 피오나..

“저기 애들아. 그런데 프랭크는 어떻게 된 거니? 피오나는?”

“프랭크가 뒤돌아 보지 말고 이쪽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피오나는 안에 있어요.”

“프랭크가 피오나를 데리러 갔어요.”

아이들의 말을 듣고 앤야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탈출하지 못한 아이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 마르티나 수녀님은? 수녀님도 안에 계시니?”

“에? 그게 누구에요?”

“오늘 유치원에 친구들 말고는 아무도 안왔어요. 앤야 선생님도 안와서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

앤야는 잠깐 숨을 골랐다. 여기서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불길이 이미 거세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도와줄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들이 두 명이나 안에 갇혀있다. 두 명 씩이나..

“애들아. 지금 당장 마을 사람들을 불러오렴.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교회에 불이 났다고 말씀 드리는 거야. 알겠지?”

“하지만 프랭크는요?”

“피오나는요?”

“걱정할 거 없어. 괜찮을 테니까”

아이들은 언제나 앤야의 말을 잘 들었다. 앤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제각기 흩어져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앤야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괜찮다. 할 수 있어. 여기서 물러서면 평생 죽기보다 괴로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야. 다 잘 될거다. 그렇고말고. 더 지체할 여유가 없다. 다 잘 될거야. 자 이제 간다.

결정을 내린 앤야는 문을 박차고 불타는 교회 안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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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연기가 여기저기 피어오른다. 앤야는 콜록대며 프랭크와 피오나를 찾아다녔다.

“프랭크! 피오나! 어디있니?”

앤야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한참을 헤매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타닥 타닥 나무타는 소리와 앤야 자신의 헐떡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갈수록 불길은 거세어지고, 앤야의 심장은 자꾸만 죄어들어갔다. 어디있지? 어디있지?

‘어라?’

그녀에게 절망스런 예감이 들어오던 찰나, 어디선가 오르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분명 예전에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다. 마을을 떠나려던 그 날 교회에서 들려오던 마르티나 수녀의 오르간 소리..

“마르티나 수녀님?”

마르티나도 아직 탈출하지 못한걸까? 일단 그녀에게 가 봐야 할 것 같다. 앤야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급히 달려갔다.

“아..”

하지만 그곳에 마르티나는 없었다. 작은 남자아이가 오르간을 치고 있고, 그 옆에 여자아이가 눈을 감고 그 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프 프랭크? 피오나?’

경건하기까지 한 그 광경에 앤야는 일순 말을 잊었다. 저 애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프랭크!”

앤야의 외침에 프랭크는 오르간 연주를 멈추었다. 프랭크는 고요한 눈으로 앤야를 빤히 바라본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나가야 해!”

프랭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섯 살 짜리 아이가 이 상황에 어떻게 저리도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앤야는 프랭크가 예사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어서 나가야 한다니까!”

“소용 없어 선생님. 나와 피오라는 이 불길을 해치고 빠져나갈 체력과 정신력이 없다니까? 아이들은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 뿐이야.”

“너..”

앤야는 아이 답지 않은 침착함과 수준 높은 어휘를 구사하는 프랭크를 가만히 노려봤다.

“그렇게 새삼스럽게 볼 거 없어. 나는 이미 선생님이 내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비상시에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거지. 마르티나에게 안부 전해줘. 난 죽음을 택할 테니까.”

‘마르티나?’

앤야는 프랭크의 입에서 마르티나 수녀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마르티나가 치던 오르간의 곡을 이 아이가 치던 것도 퍽 이상하다. 하지만 그에 신경 쓸 일말의 여유도 없었다.

“네 정체가 뭐든 상관없어. 일단 여기서 나가야한단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맞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여기까지 우리를 구하러 온 네 책임감은 높게 사지만, 안타깝게도 이미늦었어. 지금 당장 온 길을 거슬러 혼자 도망쳐. 안 그러면 너도 죽게 될 거야. 나는 너처럼 현명한 인간이 죽는 걸 원치 않아. 그건 인간들에게 꽤 손해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앤야는 화가 나서 프랭크를 몰아 붙였다. 앤야의 분노에 프랭크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지만, 피오나는 약간 겁에 질린 듯 프랭크의 팔에 달라붙었다.

“앤야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봐. 지금 혼자 돌아가면 선생님이 살 가능성은 오 할 남짓. 한 명을 데리고 가면 가능성은 일 할, 두 명을 데려가면 가능성은 제로야. 내 정체를 알아챌 정도로 감이 좋고 현명한 아가씨가 책임감이나 정 같은 허상에 현혹 되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으래?”

앤야는 피오라를 오른쪽 옆구리에 끌어안고 프랭크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들을 양 옆에 끼고 이 건물을 탈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만.. 제발. 이건 바보 같은 짓이야. 난 네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 정 책임감에서 눈을 돌릴 수 없다면 피오나만 데려가도록 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으니까."

프랭크는 몇 마디 되도 않는 설득을 하려 했지만, 앤야는 어린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줄 여유가 없었다. 앤야는 거부하는 프랭크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아 남은 왼쪽 옆구리에 껴안았다.

“....”

프랭크는 앤야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그가 저항을 멈추자 앤야는 이를 악물고 출구를 향해 뛰쳐 나갔다.

앤야는 계속 뛰었다. 사방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해 방향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 호흡도 제대로 하기 힘든데 양 옆에 낀 아이들의 무게가 갈수록 그녀를 압박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이들을 내려놓고 혼자라도 살아가는게 어때?”

“시끄러워! 넌 가만히 있는게 선생님을 도와주는 거야.”

“흐음.. 이 와중에 선생이라니.”

프랭크는 킥킥 웃었다. 앤야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화가 끓어 올랐지만, 사실 프랭크의 말이 옳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젠 혼자서 탈출하는 것도 어렵다. 지금이라도 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그녀는 애들과 함께 불타 죽게 될 것이다.

“벌써 피오나는 질식한 모양이야. 할 수 없지. 다섯 살 아이의 폐활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연기니까. 차라리 잘 되었어. 이대로 기절한 채 고통없이 죽는게 나으니까.”

“쿨럭 쿨럭.. 넌 기절 안해?”

“의식과 신체를 분리해서 깨어있는 시간을 늘렸어. 몸은 이미 활동을 정지했고 의식으로 직접 네게 말을 건내는거야.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 흥미가 있거든?”

“참 얄미운 쿨럭. 녀석이네. 우린 다 살아 나갈거야. 그리고 살아 나가면 네 녀석의 엉덩이를 호되게 때려주지.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로 말이야.”

“후후.. 넌 참 재밌는 여자로군. 너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흥미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꽤 오랜 만인걸? 아니.. 어쩌면 거의 처음일지도.”

연기 속을 헤매며 앤야는 프랭크와 끊임없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은근히 속을 긁어대는 프랭크의 말은 그녀의 화를 돋구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의식을 잡고 있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쿨럭 쿨럭.’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조금씩 의식이 흐려진다. 프랭크의 음성이 환청처럼 멀게 느껴지고, 온 몸에 탈력감이 퍼져나간다.

‘이대로 나는..’

앤야는 혀를 잘려나갈 정도로 꽉 깨물어 다시금 의식을 되찾았다. 죽는다니. 그럴 순 없다. 아직 해야할 일도, 하고싶은 일도 많은데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이미 뇌에 공급되는 산소도 거의 없을 텐데, 어째서 너는 아직도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

“하물며 애들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말이야. 넌 정말 대단해. 너와 같은 이들이 끝도 없이 있어서 역시 인간은 싫증나지 않아. 너희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지만.”

‘뭐라는 거야 이 미친 꼬맹이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앤야는 억지로 혀를 몇 번 깨물어 봤지만, 이젠 혀를 깨물 힘도 없었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몇 발짝 더 나가는데 쾅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 앞에 불타는 커다란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길이 막힌 것이다.

‘제길.’

앤야는 욕지기를 했다. 이대로 타 죽는 것인가? 그녀는 고작 스물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죽게 될 프랭크와 피오나는 심지어 그녀보다 스무살이나 연하다.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 새싹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저물게 되다니.

“여기까지인 것 같네. 하지만 네 분투는 내 마음을 움직였다. 여기서 죽게 하지는 않아.”

이 순간에도 프랭크는 헛소리를 계속해대고 있다. 곧 죽게되는 것도 모르고 참 속편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좀 빌릴게.”

빌리다니? 뭐를? 프랭크의 되도 않는 헛소리에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는 순간, 앤야의 의식은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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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야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긴.. 어디지?’

앤야는 스스로에게 물어 봤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잠깐 주변을 서성이던 앤야는 무작정 아무 방향이나 걸었다.

그녀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걷혀나간다. 또 한발 짝 내딛으면 해가 떠오르
고,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한 발짝 더 걸어가면 다시 해가 지고 또 다시 해가 뜨고..

‘난 죽은건가? 여긴 대체 어딜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앤야는 계속 걸었다. 앤야의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하루가 저물고,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도 조금씩 변해간다. 메마른 황무지가 조금씩 하얗게 얼어붙어 가더니, 종래에는 눈과 얼음만 존재하는 설원으로 탈바꿈했다. 어느순간 그녀는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는 얼어붙은 대륙을 홀로 걷고 있었다.

‘나는.. 대체..’

조금씩 몸이 싸늘해지고 힘이 빠져간다. 그래도 앤야는 계속 걸었다. 걷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하루가 점점 길어진다. 낮도 길어지고, 밤은 그보다 배는 더 길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앤야가 지쳐 쓰러졌을 때, 그곳에는 오직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대지에 홀로 쓰러져 앤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또다시 앤야의 의식은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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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성의 극단, 북위 91도 상공 270m지점에 그는 존재했다. 그의 감각은 세상 구석구석에 뻗칠 수 있었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의식의 일부로서 자신이 맡은 일, ‘관찰’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대지에 풀이 자라고, 생명이 출현하고, 하늘과 땅 바다로 번성해 가는 것을 꾸준히 관찰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했고, 세상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퍽 흥미롭게 생각했다.

수많은 생명체가 출현했다가, 곧 조용히 무대 뒤로 퇴장하곤 했다. 단궁류가 그랬고, 공룡이 그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간이 출현했다.

그는 인간이 좋았다. 왜냐면 인간은 지금껏 지상에 출현한 생명체 중 가장 자신과 닮아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아무런 보답도 없이 세상에 대한 관찰을 계속해온 그에게 주어진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인간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아무리 관찰해도 싫증날 겨를이 없었다. 인간은 자라나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보살핀다. 그것은 마치 끝도 없이 계속되는 아름다운 대서사시와도 같았다. 그가 인간을 관찰한 시간들은 영겁에 가까운 시간동안 무수한 존재들을 관찰해온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이 쓸쓸히 무대 뒤로 퇴장할 순간이 머지 않아 오게 될 터였다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찰해온 그는 인간의 운명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껏 대지를 지배해온 생물들 중 가장 일찍 멸망할 것이다. 단궁류는2억년, 공룡은 7천만년, 그리고 인간은 그에 비하면 찰나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시간만 번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못내 슬펐다. 인간은 지금까지 세상에 출현한 생명체 중 가장 우수했고 가장 그들을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불꽃이 타오르듯 짧은 기간밖에 번영할 수 없는 것이다. 우수하기 때문에 일찍 사라져야 하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란 말인가?

인간은 매우 우수했다. 얼마나 우수하냐면 얼음과 눈보라밖에 존재하지 않는 극단, 북위 91도 지점을, 그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영겁에 가까운 시간동안 어떠한 유기체도 도달하지 못한 그 지점을 극점이랍시고 찾아올 정도로 우수했다. 북극곰의 모피를 두른 아드레안 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탐험가는, 원시적인 썰매를 끌고 먹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이 황량한 얼음의 땅에 단지 학문적 호기심이라는 이유 하나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결국 그가 존재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상공 270m지점에서 그 가여운 인간을 내려 보며 그는 생각했다. 사내는 이제 조금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고 곧 생을 다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저 인간에게 깃들면 아드레안은 그가 되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으로 존재하며 지금껏 관찰로만 알 수 있었던 인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존재하던 몇 몇 동료가 그를 말렸다. 가장 위대한 존재의 일부로서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해온 그가 한낯 피조물로 전락하려 하다니!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찰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하려 하디니!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생각이란 말인가? 동료들은 그 점을 지적했고, 그 역시 동료들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는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하고야 말았다. 인간들은 때때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감정만으로 저지르곤 한다. 아마 그는 인간을 너무 오랫동안 관찰한 나머지 인간과 너무나 비슷해져 버린 것이다.

위대한 존재의 일부로서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의 영혼은 인간이라는 조그마한 그릇에 깃들기 위해 수없이 조각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 이미 그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약해진 그는 아드레안의 죽어가는 신체에 깃들어 아드레안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간 아드레안은 자신의 가족들과 얼마 안 남은 여생을 보내다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아드레안이 죽기 직전, 그는 아드레안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려준 사제에게 깃들었다. 그 사제의 이름은 몬순이었다. 몬순은 어느날 교회에 침입한 강도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몬순이 죽기 직전, 그는 몬순의 목숨을 앗아간 강도에게 깃들었다. 강도의 이름은 톰이었다. 톰에서 리나로, 리나에서 자르반으로, 자르반에서 홍 커우로, 홍 커우에서 엘렌으로.. 그렇게 그는 수많은 인간의 생을 살며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했다. 100의 인간이 있으면 100의 인생이 있었고, 100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의 인생을 살아봐도 인간에 대해서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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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엿보는게 좋을 거야.’

‘뭐?’

앤야는 머릿속에 직접 들려오는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렸다. 대체 이건 다 뭐지?

‘뭐긴 뭐야. 내 기억이지. 아주 마음껏 엿보고 있군. 참 곤란하게도..’

기억? 지금까지 앤야가 본 ‘그’라는 존재와 아드레안, 리나, 엘렌등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기억이란 말인가? 하지만 누구의?

‘내 기억이라고! 네가 가르치는 아이 프랭크 네싱워리의 기억이야!’

‘프 프랭크?’

확실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프랭크의 것이었다. 앤야는 프랭크와 피오나를 구하려다 거의 죽게 된 참이었던 것이다. 앤야에게는 도대체가 모르는 일 투성이었다. 남의 기억을 자신이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난 역시 죽어버린 걸까?

‘넌 안 죽었고, 네가 내 기억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널 살리려고 네 안에 잠깐 깃들었기 때문이야. 내 어린 몸으로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니까.. 하여튼 너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데? 나는 널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능력을 사용했는데, 넌 내 기억이나 엿보고 있고 말이지.’

앤야는 프랭크의 말을 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그녀가 해야 할 말은 하나 뿐인 듯 보였다.

‘미 미안해.’

‘미안할 것 없어. 너도 알고 그런 것은 아니니까.’

프랭크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능력을 사용했으니, 곧 마르티나가 올 거야..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녀석이 원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니까. 애써 살아난 네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어.’

‘응? 무슨 말이야? 마르티나 수녀님?’

‘쉬잇. 왔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머릿속에서 울리던 프랭크의 음성이 끊겼다. 앤야는 속으로 프랭크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만났군요.”

그 음성은 좀 전과는 다르게 머릿 속에 직접적으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그녀의 청각기관을 통해 전해져 오는 외부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은

‘마르티나 수녀님?’

그 음성은 평소의 쾌활하고 다정다감한 마르티나의 톤과는 달리 무척이나 냉혹한 떨림을 간직한 음성이었지만 틀림없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응. 5년 만이네.”

그리고 그에 답하는 음성은 프랭크의 것이었다. 좀 전까지 앤야의 의식 속에서 직접 말을 걸어오던 그 목소리가 마르티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청각기관을 통해 전해져 온다.

이렇게 쓰러져 있을 때가 아니다. 앤야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애써 끌어모아 힘겹게 눈을 떴다. 잿더미로 변한 교회를 배경으로 어린 소년과 수녀복을 입은 앳된 아가씨가 대치하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앤야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거든요. 화재에 휘말리지 않도록 멀리 심부름을 보내 놨는데..”

“고마워 할 것은 없어.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니까. 그보다.. 여기 찾아온 까닭은 역시 그건가?”

마르티나의 입가에 살기어린 미소가 감돈다.

“후후 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제 삶의 유일한 목적이 그건데.”

“쯧쯧. 딱한 녀석 이로고.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무수히 많은데, 쓸데없는 감정에 얽매여서 생을 낭비하는구나.”

“수십, 수백 번에 걸쳐 타인의 삶을 살아온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죠. 하나의 삶과 필생의 목적이라는 의미를.. 뭐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요.”

프랭크 뿐 아니라 앤야도 마르티나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앤야가 일련의 대화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마르티나가 교회에 불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들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어서 하려무나. 앤야 선생님과 피오나는 건들지 말고. 어차피 목적은 나 하나 아니었니?”

“아하하. 그 위선은 여전하시네요. 마치 제가 악당이고 당신은 선역이라도 되는 듯 들리잖아요. 정말 가증스러워요. 지금 당장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르티나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프랭크에게 겨누었다. 앤야는 깜짝 놀라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타앙

대기를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마르티나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하지만 프랭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마력결계? 역시, 그 정도 힘은 아직 남아 있다는 거군요.”

마르티나는 품에 권총을 집어넣고 훽 몸을 돌렸다.

“내일 밤. 만월의 마력이 가장 저를 강하게 만드는 밤에 다시 올게요.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을 끝으로 마르티나는 사라져간다. 힘이 다한 앤야의 의식도 그녀의 수녀복 자락이 멀어져 감에 따라 조금씩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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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웰린 마을에 이토록 큰 화재가 난 것은 100년 사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 불길이 거세 마을의 조악한 화재진압 장비로는 도저히 불을 끌 수 없었고, 결국 불이 난 교회는 전소되고 말았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어 교회만 불탄 것, 그리고 그토록 큰 화재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유치원에서 있던 아이들은 모두 무사했고, 화재 현장에서 초기에 빠져나오지 못한 피오나와 프랭크 정도만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아이들을 구해낸 유치원 교사 앤야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곧 회복할 것이었다.

앤야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끔찍한 화재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문득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이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마르티나 수녀의 집, 그러니까 그녀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이었다. 누워있는 침대는 마르티나 수녀의 침대이고..

앤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확인해 보았다. 여기 저기 붕대를 감아놓긴 했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몸을 움직이는데도 무리는 없고..

여기저기 눈을 돌리던 앤야는 침대맡에 팔을 괴고 엎어져 있는 회백색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소녀라니 당치도 않다. 겉 보기가 어려보일 뿐이지 실상 저 소녀는 마흔 살이 가까우 아줌마, 마르티나 수녀였던 것이다.

“저기 마르티나 수녀님.”

앤야가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마르티나는 기척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 창 밖에는 아직 해가 떠있는데 지금 시간이면 마르티나는 한창 잠에 빠져있을 때였던 것이다.

“수녀님? 수녀님!”

앤야는 몸을 일으켜 마르티나를 마구 흔들었다. 마르티나는 몇 차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아, 앤야 자매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네. 덕분에요. 절 간병해 주신 거에요?”

마르티나는 잠이 덜 깬 듯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그렇죠. 앤야 자매님은 제 동생이나 다름없으니까 으음..”

그것은 정말로 고마운 말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을 테지만 앤야는 감상에 젖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프랭크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던 마르티나의 섬뜩한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르티나 수녀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으음.. 저도 앤야 자매님께 묻고 싶은 것이..”

마르티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몽롱했다.

“그날 유치원에 저 대신 출근한 것이 맞나요?”

“출근. 으음.. 출근해야 하는데..”

“왜 저를 굳이 유치원에서 떼어 놓으려 했죠?”

“앤야가 다치는게 싫어서요. 산호초니까. 으음..”

마르티나는 잠에 취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티나는 말을 하다 말고 꾸벅 꾸벅 졸다가 침대에 픽 엎어져 버렸다, 하지만 앤야는 그녀의 잠꼬대 같은 대답 속에서 그녀가 원하는 말을 대부분 추려낼 수 있었다.

“후.. 그렇군요. 마르티나 수녀님. 어째서 유치원에 불을 질렀죠?”

“.....”

순간 엎어져 있던 마르티나가 움찔 했다. 앤야의 말이 그녀에게 일정부분 충격을 전한 것이 분명했다.

“수녀님 밖에 없어요. 교회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린 방화범은. 참.. 믿기지 않군요. 어째서 불을 지른 거죠?”

“....”

마르티나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언듯 보면 잠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어나서, 제 눈을 보고 대답해 주세요. 수녀님이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그 말을 듣고 마르티나는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씁쓰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분명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수녀님. 왜 불을 질렀나요.”

마르티나는 잠깐 앤야의 눈을 마주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녀와 대면하는 것이 견디기 힘든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알았죠?”

한참 뒤에야 마르티나는 한숨 쉬듯 털어 놓는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녀의 입에서 시인하는 말을 듣자 앤야는 가슴 속이 꽉 메이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냥.. 감으로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역시 앤야 자매님은 감이 좋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죠. 기자출신이라 그런가요?”

“왜 불을 질렀죠?”

앤야는 마르티나의 말을 무시하고 재차 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

“왜 불을 질렀어요? 마르티나 수녀님.”

“...어쩔 수 없었어요..”

마르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하듯 대답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앤야를 분노케 했다. 어쩔 수 없다니, 뭐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인가?

“뭐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 사정이 어린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중요한 것이었나요? 당신이 믿는 신께선 그런 짓까지 용서해 주시나요?”

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르티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전 알고 있었어요.. 그 자라면 결코 아이들을 그렇게 죽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제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에요.”

마르티나가 말하는 ‘그 자’는 아마 프랭크일 것이다. 그리고 실상 그녀의 말은 맞았다. 앤야가, 피오나가, 그리고 다른 모든 아이들이 교회를 완전 전소시킨 화재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프랭크가 당황하지 않고 조기에 아이들을 피신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야에게 있어 그녀의 대답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앤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마르티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 당신 성직자가 맞나요?”

몸집이 작은 마르티나는 조금 전까지 의식을 잃고 있던 환자 앤야의 나약한 손길에도 힘없이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변명을 계속했다.

“모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에요. 제가 교단 지도부에 손을 써 트웰린에 부임해 온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저주받은 존재가 마음대로 세상을 활보하게 놔 둘수는 없었어요. 생각해보세요. 마음대로 타인의 인생을 훔치고 좋을 대로 세상을 조종하는 악마를, 내 생전에 처치하지 못하면 놈은 영원히 인간들을 능멸하고 다닐 거예요. 그를 감지할 수 있는 이는 저 밖에 없으니까요. 앤야. 당신도 그런 것을 원하는 건 아니겠죠?”

“저주받은 존재라뇨? 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전 자칫 여덞 명의 죄 없는 아이들을 끔찍하게 태워 죽일 뻔한 수녀님의 방화 행위에 대해 묻고 있는..”

“그 저주받은 존재란..”

마르티나는 앤야의 말을 끊고 증오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르티나의 증오가 앤야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앤야는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전이체.. 그래. 그 존재를 전이체라고 한다. 그는 마음대로 타인의 삶에 깃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가 깃들기로 정한 희생자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체 의식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는 거다. 그리고 희생자의 삶을 훔친 전이체는 희생자 그 자체가 되어 또 다른 삶을 이어간다.”

마르티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이 인간, 저 인간으로 전이해가며 자기 마음대로 인간들의 삶을, 인간들의 역사를 주물러왔지. 나는 탐욕과 기만으로 인간을 능멸해온 그 존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전이체. 마음대로 타인의 삶에 깃든다. 또다른 삶을 이어간다. 설마?

놀랍게도 앤야는 마르티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칭하는 전이체란, 다름아닌 프랭크가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프랭크가 그녀 안에 들어왔을 때 엿볼 수 있었던 그의 다른 기억이..

“그 전이체가?”

“그래. 프랭크라는 아이지. 반신반의 했지만, 그가 능력을 사용함으로서 분명해 졌다. 난 전이체가 능력을 사용하면 즉시 감지해 낼 수 있으니까.”

프랭크는 전이체가 맞다. 수백, 수천 년을 타인의 삶을 훔쳐가며 살아온 저주받은 악마가 바로 프랭크라고!”

이야기의 실마리가 이어지는 느낌이다. 다섯 살 어린아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프랭크의 연륜과 지능. 화재 현장에서 엿본 프랭크의 기억, 그 때 프랭크와 마르티나가 나누던 의미불명의 대화.

앤야는 한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마르티나가 밝힌 프랭크에 대한 사실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마르티나 수녀님은 프랭크를 어떻게 할 생각이죠?”

“어떻게 하다니? 당연히 죽여야지. 놈의 정수를 건져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것이다. 그것이 내 필생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저는..”

앤야는 잠시 시간을 두고 마르티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역시 그녀가 해야 할 행동은 이것 뿐 이었다.

“전 마르티나 수녀님으로부터 프랭크를 구할 거에요.”

“뭐?”

마르티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앤야를 멍하니 바라본다. 잠시 후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앤야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그건 아냐! 말도 안 돼! 내 말을 듣지 못한거야? 프랭크는 전이체라구! 겉보기는 다섯 살 아이지만 속은 수천 년 간 타인의 삶을 빼앗아온 괴물 중에 괴물 이란 말야!”

“전 그런 어려운 말 모르겠군요. 유치원 교사로서 내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에요. 물론 프랭크도 포함해서요.”

전이체니 뭐니 복잡한 단어를 끌고 올 필요도 없었다. 프랭크는 결국 다섯 살 난 사내아이에 불과했고, 이 미친 수녀가 그 아이를 죽이려 한다면 아이들을 책임진 교사로서 당연히 그녀를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르티나는 앤야의 침대에서 떨어져 한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적지않은 고뇌와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네가 어떻게 프랭크를 구한다는 거지? 넌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해. 내가 손짓 한번만 하면 산산조각 나버리는 나약한 존재라구. 헛소리는 집어 쳐.”

“네. 전 평범한 인간이에요. 그리고 마르티나 수녀님은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수녀님이 다섯 살 사내아이를 잡아 죽이는 걸 보고만 있을 거라 생각 하셨나요?”

“앤야 제발.. 아무리 너라 할 지라도 나를 방해하면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지 마세요.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용서까지 받아야 하는지. 죄는 마르티나 수녀님이 지었지요.”

마르티나는 ‘죄’라는 말을 듣자 순간 움찔 했다. 그 말이 마르티나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티나는 간절한 어조로 다시금 애원했다.

“난 널 동생처럼 생각한다. 해치고 싶지 않아. 제발 마음을 돌려줘.”

“죄송해요 수녀님. 제 언니는 따로 있어요. 로엔이라고, 양아치 남편에게 시달림 받는 평범한 가정주부죠.”

앤야의 대답에 마르티나는 크게 분노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큰 목소리로 앤야에게 소리쳤다. .

“어디 마음대로 해 봐! 하찮은 인간 주제에 네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바보 같은 아이가!.”
마르티나는 프랭크를 죽이려 하고 앤야는 프랭크를 지키려 한다. 더 이상 대화의 여지는 없다. 여기에 더 있어서도 안 된다. 앤야는 애써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 볼게요. 마르티나 수녀님이 교회를 다 태워먹었으니 이제 출근 안 할 거예요. 집에 있는 제 짐도 곧 뺄게요.”

“흥. 넌 어차피 해고야!”

분노한 마르티나를 뒤로 하고 앤야는 주섬 주섬 옷을 차려 입었다. 이어서 손가방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품까지 챙겨 넣은 앤야는 마르티나 수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

마르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앤야를 무섭게 노려본다. 하지만 앤야는 그녀의 시선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제 가 볼까?’

앤야는 몇 달간 함께 생활한 마르티나의 집을 뒤로하고 묵묵히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둑어둑 했다. 곧 달이 뜰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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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야가 향한 곳은 교회, 정확히 말하자면 전소된 교회가 있던 자리 옆에 위치한 공터였다. 유치원의 아이들이 놀이터로 사용하던 그 장소다. 여기서 마르티나와 프랭크가 만나기로 했다.

“역시 있었구나.”

저물어가는 석양 아래 프랭크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앤야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는 싱긋 웃는다. 천진난만한 그 웃음에 앤야는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겉 보기에 저 아이는 다섯 살 난 사내아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도망치지 않은 거야?”

“도망쳐 봐야 소용없어. 마르티나는 이미 내 능력을 각인했으니까, 내가 어딜 가도 그 애는 나를 찾아올 수 있어.”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셔? 화재에서 간신히 살아나왔는데, 이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다니..”

“응. 그래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웠어. 부모님 뿐 아니라 나를 아는 사람 대부분의 기억을..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

앤야는 프랭크가 어떻게 부모님의 기억을 지웠는지, 그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프랭크에게는 묻고 싶은 가장 궁금한 사실이 있었다.

“마르티나 수녀님이랑 너는 대체 어떤 관계야?”

프랭크는 쓰게 웃었다.

“그 애는 내 딸이야.”

“뭐 뭐??”

이제 놀랄 일은 그닥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프랭크의 대답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떻게 마르티나가 프랭크의 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반대의 경우도 아니고.

앤야의 기색을 보고 프랭크는 설명을 덧붙였다.

“100여년 전, 밤의 일족 군주에게 전이했을 때 인간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밤의 일족이지.”

“와아..”

밤의 일족이라니.. 거기다 100년 전이라고?

“밤의 일족? 그런 것이 정말 존재했어? 네 말 대로라면 마르티나 수녀님은 100살이 넘었다는 거야? 서른 여덟 이라고 했는데?”

“뭐? 서른 여덟? 큭큭 정확히 100살을 줄여서 말했구나. 여자가 나이를 속이는 것은 꽤 흔한 일이지만 100살은 너무했다.”

‘정말인가?’

겉 보기에는 십대 후반인 마르티나가 서른 여덟도 아니고 백 서른 여덟살이었다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르티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밤의 일족이라고 했나?

앤야가 알기로 밤의 일족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가공의 생명체였다. 인간의 피를 빨고 밤에 활동하며 파충류처럼 피가 차가운데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저주받은 존재.프랭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르티나의 한결같은 저체온과 밤낮이 뒤바뀐 수면패턴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랭크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앤야가 불신의 표정이 가득 찬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프랭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 밤의 일족은 결국은 인간의 한 갈래일 뿐이니까 특별할 건 없어. 하지만 이제는 없다. 멀리 보면 인간 전체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해서 내가 다 자멸시켰어. 이제 남은 건 반쪽짜리 마르티나 뿐이야.. 뭐 믿거나 말거나 그 부분은 너에게 맡길게.”
신화 속에 나오는 종족을 특별할 게 없다고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멸시켰다고 말하는 프랭크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물론 아이의 말이 사실일 경우로 가정한 것이지만, 앤야는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일단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모든 비정상 적인 일들을 사실로 믿어 보기로 했다.

“아무튼, 마르티나는 내가 미울 수 밖에 없을 거야. 그녀의 종족을 멸한 장본인이자, 아비로서의 역할도 전혀 하지 못해서 외롭게 자라나게 했으니까.”

“너 참 대단하구나.”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도 않아.”

프랭크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모습에서 왠일인지 저릿한 슬픔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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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날이 저물어. 만월의 밤은 밤의 일족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지. 마르티나가 나를 찾아 올거야.. 참, 넌 대체 여기 왜 온거야. 내 마지막 모습을 구경하려고?”.

“난. 널 도우려고.. 유치원 교사로서 돌보는 아이가 위험에 처한 꼴을 볼 수 없었어.”

“후후 이 마당에 유치원 교사라니..”

프랭크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새삼 느낀 건데 이 아이는 정말 잘 웃는다. 유치원에서도 언제나 웃고 다녔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 마당에도 웃고 있다. 원래 성격이 그런걸까?

“아무튼.. 난 마르티나와 싸울거야. 원래의 내 힘은 마르티나보다 훨씬 강하지만, 환생한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의 나는 마르티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환생? 너는 다른 사람에게 전이하는게 아니었어?”

“마르티나는 과거 나를 한번 죽였어. 딸이라고 방심한 대가를 크게 치뤘지. 그때는 전이할 사람이 없었기에 그냥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죽는다고 해서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이가 아닌 환생을 통해 다른 삶을 살게 되면 내 기억의 상당 부분이 손실되어 버려. 이번처럼 어렸을 때 또다시 죽음을 통한 환생을 하게 되면, 나는 나로서 있을 수 없게 될 정도로 기억을 잃게 되겠지.”

“저런..”

“뭐 그것만 해도 내게는 꽤나 절망적인 일이지만, 이번에 마르티나에게 죽게 되면 아예 환생조차 할 수 없을 거야. 그 애는 분명 내가 전이나 환생을 할 수 없도록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테니까.. 날 도와준다고 했지?”

“응.”

“쉬운 일을 줄게. 따라와.

프랭크는 공터 가장자리로 앤야를 데려갔다.

“이건..”

바닥에는 나뭇가지로 그린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프랭크가 쉬는 시간마다 줄기차게 그려대던 그림이다.

“나도, 마르티나도 서로의 존재를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어. 마르티나가 나를 생각보다 일찍 찾아낼 때를 대비해서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 놨지. 그것이 이 주술진이야.”

“주술진?”

“응. 밤의 일족에게 있어 치명적인 마력을 발산하지. 마르티나는 당장 나를 죽이려 하진 않을거야. 선생님은 여기 숨어 있다가 기회를 봐서 내가 신호를 보내면 이 주술진을 작동시키면 되. 그러면 이 공터 여기저기에 내가 심어놓은 원형의 진이 연쇄적으로 작동해서 마르티나를 공격할거야.”

“그 그럼.. 마르티나 수녀님도 위험하지 않아?”

프랭크는 재미있다는 듯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봤다.

“날 지켜주겠다더니, 이젠 마르티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앤야는 마르티나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프랭크를 지키고자 한 결심은 응당 유치원 교사로서 당연한 책임감의 발로였고, 그와는 별개로 마르티나도 그녀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다.

“대책없이 착한 아가씨네. 걱정할 것 없어. 마르티나는 반쪽짜리 밤의 일족이라서, 그냥 힘을 잃게 될 뿐이야.”

“힘이라니?”

“뭐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건강에 치명적이다거나 한 건 아냐. 단지 밤의 일족의 힘을 오랫동안 못 쓰게 될 뿐이지.”

그 정도라면 걱정 없다. 앤야는 프랭크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럼.. 이 주술진은 어떻게 작동시키는데?”

“그냥 손을 대면 되. 아 지금 대보지는 말고. 넌 주술진을 시동시킬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

그 외에도 프랭크는 앤야에게 몇가지 당부를 전했다. 어린애에게 지시받는 유치원 교사라니, 무언가 역할이 바뀐 것 같아 이상했지만, 앤야는 프랭크가 전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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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밤이 되었다. 프랭크가 말한 대로 마르티나는 만월의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때 유령처럼 찾아들었다.

“역시 있었네요.”

마르티나는 프랭크를 향해 으스스하게 미소지으며 천천히 걸어온다. 프랭크는 온화한 미소를 띈 채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앤야는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죽여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버님.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마세요. 저는 5년전 처음 당신을 죽였을 때 보다 배는 강해졌으니까, 그 어리고 나약한 몸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못해요. 고통 없이 빠르게 끝내드릴게요..”

“죽을 생각은 없단다. 얘야. 아직 나는 인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가능한 오래 생을 지속하며 천천히 인간의 삶에 대해 구도하고 싶구나.

마르티나는 프랭크의 온화한 대답을 듣고 차갑게 그를 비웃는다.

“쿡쿡. 그러시겠죠.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강탈하며 욕심을 채워온 추악한 당신의 집념은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몸으로 일깨워 드릴게요. 당신의 정수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뽑아내어 제 안에서 소멸시켜 드릴게요.”

“역시 그 방법을 찾아냈구나. 하지만 나를 용해시키려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텐데. 난 네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르티나는 머리를 짚고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하하하 저를 너무 얕보시네요. 제가 지금껏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데, 고작 저의 죽음 따위를 두려워 하겠어요? 애초에 저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당신과 같다구요!”

‘마르티나 수녀님..’

앤야는 마르티나의 광소속에 어려있는 비애와 한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앤야는 지금까지 마르티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녀에게 있어 프랭크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그녀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프랭크도 앤야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듯 전에 없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어디 해 보려무나. 가여운 내 딸아.”

“네 아버님.”

대화가 끝나자마자 마르티나는 프랭크에게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갔다. 앤야는 일순 희미한 안개가 일렁이는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찰나의 간격을 두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프랭크 주변에서 파편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저런. 아버님이 자랑하는 마력결계가 제 손짓 한 번에 깨져버렸네요. 고작 이정도 인가요? 너무 시시한데요?

“.....”

프랭크는 저항을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마르티나는 그대로 프랭크를 넘어뜨리고 목을 움켜쥐었다. 다섯 살 어린 아이의 나약한 육신은 마르티나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흔들린다.

“유언으로 남길 말은 없나요?”

“난 죽지 않아. 유언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후후후 아버님이 마지막까지 지저분한 욕망을 버리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래야 저도 100여년에 걸친.”

푸악

“큭”

앤야는 프랭크의 왼쪽 팔이 붙어 있던 자리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는 끔찍한 광경을 똑똑히 목도했다. 마르티나가 그의 팔을 마치 곤충다리를 떼어내듯 뜯어낸 것이다.

“복수의 맛을..”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프랭크의 다리가 뜯겨나갔다. 목불인견의 참상에 앤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게 마치 지독한 악몽 같다. 아이의 사지가 뜯겨져 나가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미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드득 우드드득

작은 아이의 몸뚱어리를 짓밟고 선 마르티나의 동체가 달빛을 받아 기괴하게 빛난다. 한쪽 팔과 양 다리가 뜯겨나간 프랭크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마르티나를 올려보고 있다. 앤야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제 정말 끝이에요. 아버님. 당신의 목에 이를 대고 당신의 추악한 영혼을 빨아올리겠어요.”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불쌍한 프랭크는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에게 곧 마지막이 닥치리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확실해 보였다. 마르티나는 그런 그를 잠시 내려 보다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아버님.”

“.....”

“저에게 전이하는 거에요.”

“!!”

앤야는 그 말을 듣고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프랭크를 유혹하듯 건넨 그녀의 말은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저것이 마르티나 수녀님의.. 진심일까?’

마르티나는 프랭크의 뺨을 살짝 쓰다듬는다. 다정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조금 전까지 프랭크를 찢어 죽이려던 모습과 괴리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아버님도 이대로 끝내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저에게 정수를 빨리면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형태를 유지할 수 없어요. 제 영혼의 그릇은 당신을 분해해서 함께 소멸할 정도는 되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절 강탈하시면 되지 않나요? 후후.. 전이는 아무리 저라도 막을 수 없어요.”

“.....”

“제 인생을 사세요 아버님. 아버님께서 저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으니 저를 가지는 것도 당신의 권리에요. 사양하지 말고 어서.”

마르티나의 일종의 광기마저 서린 얼굴을 대하며 프랭크는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수는 없다. 내 딸아.”

“.....”

“알고 있잖느냐. 내가 사랑하는 딸에게 전이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것을.”

그 말을 듣고 마르티나의 눈빛이 무겁게 저며들었다. 그녀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다 떠오르는 상념을 지우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그럼 저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죠. 저도 당신도 신께서 용납하지 않은 존재에요. 함께 무로 돌아가요.”

그 말이 부녀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마르티나는 송곳니를 세우고 프랭크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랭크가 크게 외쳤다.

“선생님! 바로 지금이야!”

앤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를 악물며 주술진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주술진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 이 마력은?”

마르티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원과 거기에 손을 대고 있는 앤야가 보였다. 원에서 흘러나온 빛은 공터를 가로질러 수십 갈래로 퍼져나갔고, 빛이 닿는 곳 마다 수많은 주술진이 떠올라 저마다 빛을 발했다.

“이건..”

공터를 가득 메운 빛이 마르티나를 휘감아오자 그녀는 크게 당황하여 프랭크에게서 물러났다. 주술진의 빛이 마르티나에게 해롭게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머 멈춰. 거기서 손을 떼! 지금 당장!”

마르티나가 앤야를 노려보며 다급히 외친다. 하지만 앤야는 그녀의 살기에 덜덜 떨면서도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르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듯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앤야! 내 말좀 들어봐. 이 저주받은 전이체를 내 손으로 소멸시키는 일. 그걸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하찮은 내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내버릴 수 있고 영겁의 고통을 약조하는 죄로 내 영혼을 더럽히는 것도 당연하다시피 할 수 있다. 난 그걸 위해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질긴 생을 이어온 거야!”

“.....”

“너는 모를 거야.. 이름도 존재도 없는 공허한 괴물을 아무 단서도 없이 백여년간 기약없이 찾아다닌 내 저주받은 생의 무게를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조금만 눈감아 줄 수 없겠느냐? 거의 다 다다랐다. 5년 전, 놈을 처음으로 처치하는데 성공했으니까, 이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놈의 환생체를 처리하기만 하면 내 100년에 걸친 숙원도, 내 저주받은 생도 끝나는 거야! 앤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난 너를 동생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눈 감아줘. 조금만 너도 나를 언니처럼 생각해 주지 않겠니? 도와달라고 까지는 하지 않을게. 그저 조금만 눈 감아 주면 돼.”

“죄송해요 마르티나 수녀님. 전 유치원 교사인걸요? 아이들을 지켜야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앤야는 마르티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작게 덧붙였다.

“전 제가 언니처럼 생각하는 분이 죄를 짓는 것도,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

“아..”

그 말을 듣고 마르티나는 결코 앤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쓰러진 프랭크와 앤야를 번갈아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는다.

“하하.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다음 순간 마르티나는 안개로 화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다 끝난 건가?’

앤야는 잠깐 마르티나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널부러진 프랭크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프랭크는 폐에 바람이라도 든 듯 웃어대다가 피를 토한다. 앤야는 급히 프랭크의 몸을 부축했다.

“프랭크. 괜찮니?”

“아니 별로 안 괜찮아. 곧 죽을 것 같아.”

곧 자신이 죽는다는 말을 하는 프랭크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했다. 앤야는 끔찍한 몰골로 널부러진 프랭크를 보고 있자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아마 마르티나가 날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하려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거야. 녀석이 몸을 회복해서 나를 찾아다닐 때 쯤이면 이미 나도 세상에서 지워진 후 겠지. 뭐 그쯤 되면 녀석도 포기 할 수 밖에 없을 테지만.”

프랭크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죽어가는 어린 소년에게 앤야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이대로 죽게 되는 거야?”

“아니. 사실 죽는 것이 아니고 환생이야. 뭐 이번에 환생하면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되지만. 끝은 아니다.”

앤야는 프랭크가 자신에게 잠깐 깃들었을 때 엿본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비할 대 없이 존귀한 존재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하찮은 피조물로 전락한 그의 생을.

“넌 수천 년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 왔잖아. 기억을 잃게 되면 그 모든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거잖아!”

프랭크는 그 말을 듣고 앤야를 이상하다는 듯 올려봤다.

“그 사실을 아는 네가, 왜 나를 미워하지 않지?”

“으 응?”

“나는 내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삶을 강탈해왔어. 내가 깃들면 당사자는 영문도 모른 체 나와 의식이 합쳐져 내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돼. 그들에게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내 욕심을 위해 가장 소중한 그 시간들을 잃게 되는 거지. 나는 이런 삶을 수백 번이나 반복해 왔다. 내 딸이 나를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너는?”

“아..”

“너는 왜 나를 미워하지 않아?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나 같은 존재, 전이체를 배격해야 하잖아. 미지의 존재가 육신을 강탈해 가는데, 두려워하고 증오해야 마땅하잖아.”

확실히, 앤야는 프랭크 말대로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래도 너는 프랭크잖아.”

“응?”

“나는 전이체고, 뭐고 잘 모르겠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다만 내 눈에 비친 너는 다섯 살 짜리 착한 남자아이 프랭크야.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는 단지 프랭크일 뿐이라구.”

“.....”

그 말을 듣자 프랭크는 눈을 감고 자신의 이름을 몇 차례 되뇌었다.

“프랭크.. 프랭크.. 맞아. 이번 생은, 이 육신은, 프랭크는 온전한 나였지. 전이 같은 것을 통하지 않고 온전히 얻은 내 삶이야. 후후. 몰랐어. 전이를 통한 삶이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삶이라는 개념을 잊고 있었다.”

프랭크의 호흡이 점점 길어져 간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과 출혈을 안고 지금까지 견딘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불쌍한 소년은, 곧 죽게 될 것이다.

앤야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이토록 어린 아이가 죽어 가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에 절망했다.

“이대로 죽으면 안 돼 프랭크. 네가 죽는 꼴을 못 보겠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곧 죽게 돼.”

“아니,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너는 타인에게 전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지? 나에게 전이해. 그럼 살 수 있어. 마르티나는 네 딸이라서 안 되었지만, 나는 상관없잖아.”

그 말을 듣자 다 죽어가던 프랭크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하하하. 정말 대책 없이 착한 아이네. 이제 하다 하다못해 네 삶까지 바치겠다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걸?”

앤야는 진심이었다. 몸을 빼앗겨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인간은 때때로 감정에 휩쓸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한다.

“네 머릿속이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이해서 확인하고 싶기는 한데.. 후후 더는 의미가 없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타인에게 전이해가며 알게 된 ‘인간’ 보다 이번, 단 한 번의 환생을 통해 이해하게 된 ‘인간’의 분량이 훨씬 많으니까. 더 이상은 전이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이대로 환생하면.. 애써 이해하게 된 ‘인간’에 대해서도 모두 잊게 되잖아.”

“기억은 중요하지 않아. 나는 다만,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아..”
숨이 끊기기 직전 프랭크는 온전한 팔을 들어 앤야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음 생에서는, 가능하면 선생님과는 다른 형태로 다시 만나고 싶어. 음.. 그러니까.. 고마워.”

“아..”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적막이 감돌고, 트웰린 출생의 다섯 살 난 남자아이 프랭크 네싱워리는 그를 돌봐주던 보육교사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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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조사와 수습을 위해 파견된 담당사제에게 앤야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과 마르티나 수녀, 프랭크에 대한 일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직접 겪은 일을 말하면서도 워낙 황당무개한 일이라 스스로도 헛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40대 중반의 수염이 덥수룩한 담당사제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심지어 그는 중간 중간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프랭크는 죽고 말았어요. 그리고 마르티나 수녀도 안개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죠. 하하 이상하죠?”

“아니, 그렇지 않소.. 당신의 증언을 신뢰토록 하겠소.”

“제 말을 믿는다구요? 솔직히 말한 제 자신도 잘 믿기지 않는데요...”

반쯤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실을 털어놓은 건데 너무 쉽게 믿어줘서 앤야는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정신병자 취급당하고 마녀로 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대의 증언은 내 추측과 거의 들어맞소.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밤의 일족이라구요. 남의 삶을 훔쳐 사는 전이체라구요. 주술진이라구요. 성직자가 방화범이라구요. 이런 황당무계한 일들을 믿는다구요?

“믿지 않을 이유가 없소. 어느 정도는 교단에 알려져 있던 사실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진실에 눈 돌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오.”

“헤에.. 대단하네요.”

“어쨌든, 성실히 조사에 임해줘서 고맙소. 이제 돌아가도. 좋소.”

“이걸로 조사가 끝났나요? 고작 두 시간 정도 진술한게 다인데?”

“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소. 트웰린 교구를 인수받았으니, 마르티나 사제가 벌여놓은 그 모든 난장판을 수습해야지. 보고서 한 장으로 끝날 조사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을 순 없소.”

담당사제는 서류의 작성을 끝마치고 한쪽에 밀어 놓았다. 정말로 가도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나 쿨하다니!

‘세상에. 내 스타일인데?’

만약 그가 성직자가 아니라면 명함을 건네고 저녁약속이라도 잡아 봤을 것이다.. 어쨌든 가도 좋다니 더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앤야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그대에게 할 말이 아직 남아있소. 깜빡 잊을 뻔 했는데.”

“뭔가요?”

앤야는 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담당사제를 돌아봤다.

“유치원 교사 계속 해 주지 않겠소?”

“네에?”

“마르티나 그 여자는 제대로 해 놓은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지만, 부설 유치원을 설립한 일 만은 꽤 괜찮은 생각이라 보오. 유치원은 내가 교구를 맡은 후에도 계속 유지할 생각이오. 그리고 지금껏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온 그대가 교사로서 최적임자라고 생각하오만?”

앤야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보면 유치원 교사로서 있었던 3개월은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아이들도 좋아졌고, 기자 생활보다 훨씬 보람차고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의 미소가 보고 싶다.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역시 안 되겠어요.”

하지만 앤야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결국 프랭크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돌보던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지 못했는데 무슨 염치로 그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곤란한 일이군. 그대가 맡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후임자라도 추천해 주시오. 난 할 일이 많아서 적임자를 찾아낼만한 여유가 별로 없소.”

담당 사제의 말에 앤야는 머릿속으로 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잘 해낼 것이다.

“제 언니 로엔 리즈릿은 어때요? 종종 유치원에 와서 저를 도와주곤 했어요. 아이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고, 가정적이라서 저보다 훨씬 일을 잘 해낼 거에요.”

“좋소. 나 대신 이 계약서를 그녀에게 건내 주겠소? 거기 적혀있는 이름만 앤야에서 로엔으로 바꾸면 되오.”

“에..”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거기다 미리 계약서를 준비해 두다니! 예전 마르티나 수녀도 그렇고, 새삼 교단 사람들은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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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은 앤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삯바느질로 변변찮은 부수입을 올리고 있는 그녀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좋은 직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언니가 일을 맡아줘서 다행이야. 사실 남겨진 아이들이 조금 걱정이었거든, 하지만 언니라면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어. 정말 고마워.”

“나야말로, 네가 나를 후임으로 추천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한스가 주는 쥐꼬리만한 생활비로는 살림을 꾸려가기 힘들었거든. 마침 아이들을 돌보는게 내 적성에 맞기도 하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직장이 생기면 로엔도 양아치 같은 한스로부터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되어 집안에서도 어느정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앤야 자신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동안 그녀가 가르치던 아이들을 맡게 되어 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만약 형부가 이 일로 언니를 못살게 굴면 담당 사제님께 말씀드려. 형부 같은 인간을 꼼짝도 못하게 할만한 사람이니까."

"그이는 내가 뭘 하던 관심도 없을걸. 오히려 내게 지불할 생활비가 줄어들었다고 기뻐할거야."

"잘 되었네. 그럼.. 나도 안심하고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아.”

“뭐?”

로엔은 다음순간 이어진 앤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올라가다니?

“도시로 돌아가야지. 몇 달간 트웰린에서의 생활은 꽤 좋았어. 하지만 역시 도시 생활이 내게는 더 맞는 것 같아.”

예전부터 어렴풋이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유치원 교사 일에 매어 있어서 올라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지만 이제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

“하지만 너 고향에 정착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도시가 싫었어. 외롭고 삭막한 생활과 가식적인 주변사람들이 싫었어. 하지만 그건 살고 있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였던 것 같아. 고향에서의 내 생활도 예전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니까.. 이번에 상경하면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 보려고.”

로엔은 고개를 끄덕여 앤야의 생각을 지지해 주었다.‘

“하긴.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시골에서 살 필요는 없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껏 살아보고, 지치면 잠깐 쉬러 내려와. 내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언니.”

앤야는 살짝 감동해서 로엔을 끌어안았다. 역시 피를 나눈 혈육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이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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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앤야는 자신의 얼마 안되는 짐을 챙겨 도시로 올라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트웰린을 떠나기 전에 앤야는 잠깐 창가를 바라보며 프랭크와 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란 정말 수천 년을 바쳐 이해를 바랄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일까?’

프랭크는 ‘관찰자’라는 비할 대 없이 존귀한 신분에서 한낱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루고 인간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삶을 경험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한결같이 노력했다. 하지만, 인간인 앤야로서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인간이란, 가식과 기만으로 똘똘 뭉친 피곤한 족속이었다. 도시에서 접한 인간들은 그녀에게 상처와 피로만을 안겨주곤 했다.

그것이 싫어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고향에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곧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 터이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어딜 가든 다 비슷비슷한 것이다. 덧붙여, 앤야 자신 또한 예의 ‘인간’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수긍하고 살아 보려 마음먹은 참이지만, 인간이란 프랭크의 생각처럼 정말 그토록 가치 있는 존재일까?

‘...역시 모르겠다.’

프랭크는 인간을 알기 위해 구도해온 시간은 무려 수천 년에 이른다. 하지만 수많은 삶을 반복해온 프랭크는,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앤야는 말할 것도 없다. 앤야는 고개를 내저어 떠오른 의문을 애써 지워버렸다.

“저기.. 제 자리가 창가인데, 잠깐 옆으로 비켜볼래요?”

한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앤야의 귓가에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앤야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

다음 순간 앤야는 입을 딱 벌렸다. 그 곳에는 나들이옷 차림의 앳된 아가씨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마르티나 수녀였던 것이다!

“마.. 마.. 마르티나 수녀님?”

“이제 수녀 아니에요. 누구 때문에 파문을 당해서 말이죠. 젝터 그 자식에게 제가 벌인 일에 대해 전부 털어 놓으셨더라구요. 흥. 아주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서 파문통지를 하던데요.”

‘젝터?’

그러고 보니 마르티나의 후임으로 트웰린에 파견된 담당사제의 이름이 젝터라고 했던 것 같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어째서 마르티나가 여기 있는 거지?

마르티나는 앤야를 노려보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다. 앤야는 당황해서 옆으로 자리를 피했지만, 좌석이 그리 넓지 않기에 별로 도망갈 공간이 없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뭐 그리 빤히 보고 있죠?”

“무.. 무사하셨나요?”

“안 무사해요. 힘을 거의 다 잃었어요. 지금의 저는 일반인보다도 약하고 밤의 권능도 전혀 사용할 수 없어요.”

“그거 참 유감이네요. 하하..”

앤야는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힘을 잃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130여년을 벼려온 필생의 목적을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워요. 누구 때문에 제 130년은 완전히 헛 산 셈이 되고 말았지 뭐에요. 참고로 130년이면 앤야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다섯배를 곱해도 부족한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강산이 열 세 번은 바뀔 시간이니까요.”

앤야는 마르티나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르티나 입장에서 앤야는 정말 엄청난 민폐를 끼친 셈이다.

“그래도.. 전이체가 이제 더 이상 전이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만족 해야죠. 그 이상은 복수라는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영역이니까. 후우.. 너무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되요. 교리에도 어긋나구요.”

“그렇군요.”

앤야의 입가에서 어색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앤야에게는 유감이 있어요. 아주 신세를 크게 졌으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좀 책임져 줘야겠어.”

“네엣?”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앤야가 어떻게 마르티나를 책임진단 말인가?

“말 했잖아요. 파문당했다고. 전 이제 갈 곳 없는 연약한 여자에 지나지 않아요. 친한 사람도 한 명도 없어요.. 그러니 당분간 저 좀 먹여주고 재워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저.. 저는..”

“그럼, 졸려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눈 좀 붙여야겠네요. 제가 잠든 사이에 혼자 도망치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

협박 아닌 협박을 끝으로, 앤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마르티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건드려 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깊게 잠든 모양이다. 빠르게 잠들고 흔들어도 깨지 않는다.. 마르티나의 잠버릇이다.

‘하.. 어떻게 하지?’

앤야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녀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마르티나까지 어떻게 먹여 살린단 말인가? 다행히 퇴직금이니, 유치원 월급이니 해서 모아둔 돈은 꽤 있지만, 둘이서 생활하면 금방 바닥날 것이다. 도시의 물가는 트웰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앤야는 마르티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르티나 입장에서 앤야는 평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한 원수다. 거기다 앤야의 증언 덕분에 파문까지 당했다는데? 미워하고 가까이 있는 것조차 싫어해야 정상인데, 하물며 신세를 지겠다니? 그건 요 몇 달간 그랬던 것처럼 같이 살자는 말이 아닌가?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걱정해야 하는 걸까?

‘툭’

깊게 잠든 마르티나가 어느새 앤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처음 마르티나를 만났을 때 앤야도 마르티나의 어깨를 기대고 아주 푹 잠들었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지금의 상황과 겹쳐보니 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후후 뭐 외롭지는 않겠네요.’

결국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앤야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왠지 모를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어왔다. 그것은 처음 도시에서 고향으로 내려갈 때의 감정과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