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현기영, 「순이 삼촌」(초판 작가의 말, 중에서)

  • 작성일 2015-06-12
  • 조회수 1,480





“ 인생을 구경해야 하고, 인생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뭔가 배울 게 생기는 것이다.”

- 토마스 만, 중편「마리오와 마술사」중에서 -



현기영, 「순이 삼촌」(초판 작가의 말, 중에서)






오년 전 등단하던 해에 얻어걸린 십이지장궤양은 나에게 퍽 상징적인 뜻이 있다. 공복 때마다 고양이 발톱으로 위벽을 살살 긁어대는 듯한 통증이 오는데, 나는 항상 이 공복상태가 두렵다. 하다못해 물배라도 채워야 그럭저럭 견뎌낸다.
이 공복에 대한 공포는 창작 작업에도 나타난다. 글 쓰고 있지 않은 시간은 나에게 굶주린 공복상태처럼 느껴져 공연히 괴롭고 안절부절 스스로를 주체 못한다. 써야지, 써야지 하고 항상 맘속으로 벼르면서도 글 한줄 쓰기가 어렵다. 아니, 글 쓰는 것 자체가 두렵다. 백지에 대한 공포. 쓰는 게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군색한 핑계를 둘러대며 허구한 날 술 마시기가 일쑤다. 자연히 술은 궤양을 헐어뜨려 공복의 통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 뿐이다.
이렇게 백지에 대한 공포랄지, 결벽증이랄지, 아니면 어쭙잖은 핑계랄지 하는 것 때문에 그동안 쓴 글이 스무편도 못 넘는 과작이 되어버렸다. 작품의 질은 둘째치고 우선 수가 너무 적은 데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첫 창작집의 출간을 계기로 좀더 분발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이다. 노력 부족으로 잠깐 명멸하다가 스러져버리는 미완의 작가로 전락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아직 미지수인 나를 격려하는 뜻에서 첫 창작집의 출간을 선선히 맡아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79년 10월 24일
현기영




▶ 작가_ 현기영 - 소설가.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남.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함.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마지막 테우리』, 장편으로 『변병에 우짖는 새』『지상에 숟가락 하나』『누란』등이 있음.

▶ 낭독_ 송명기 - 배우. 연극 「엘렉트라 파티」, 「세익스피어의 사내들」, 「다락방」 등에 출연


배달하며

한때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지요.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건 행운이나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적어도 10년 동안, 하루 여덟 시간씩 그들이 한 노력이라고 말입니다.
등단 40주년을 기념해서 재출간된 현기영 작가의 세 권의 중단편전집 중 『순이 삼촌』을 다시 읽다가 이 글을 씁니다. 선생도 젊은 작가 시절에는 “노력 부족으로 잠깐 명멸하다 스러져버리는 미완의 작가”가 돼버릴까 봐 걱정하였나 봅니다. 저는 올해로 이십 년이 되었는데요, 아직도 그런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도 매일매일 여덟 시간은 쓰지 않은 탓일지도 모릅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순이 삼촌』((현기영 지음, 창비, 2015, 360~361쪽)

▶ 음악_ BackTraxx / piano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