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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정적일순」

  • 작성일 2015-07-04
  • 조회수 1,081





“ 실존의 도끼날 위에 엎어진 사람들이 있다.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럽다.
외로운가? 외롭다.
두려운가? 두렵다.
비명을 삼키면서도 도망칠 수가 없다. 삶으로부터... ”



최정희, 「정적일순」






눈이 부시면 눈물이 더 잘 괴는 눈을 양 손등으로 비벼가며 노파는 손수레의 거동을 살폈다. 손수레는 어느 집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만에 짐짝을 잔뜩 싣고 손수레는 내려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어저께두 그렇게 한 모양이지. 오늘 하루를 또 저렇게 할 모양이구나. 내일두 모레두..」
노파는 유리문을 닫아버린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달렸다. 어제저녁에 옮겨놓은 것들을 모두 한군데 갖다 감춰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실의 것을 올려왔다. 이층의 것을 내려왔다. 건넌방 옷방 찬방 며느리의 양복장 속의 달걀까지도 옮겨다 놓았다. 여러 군데 갈라두고 마음을 쓰느니보다 한군데 두는 편이 애가 덜 쓰일 것 같았다.
어디다 두어야 마음이 놓일지 생각하다가 본래 두었던 곁방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쉽게 다룰 수 있고 그 녀석이 와서 가져가게 되는 때 쉽게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한군데다 몰아두었다가 몽땅 가져가버리면 그만 아니냐. 이층에 올려다 놓는 게 낫겠다. 아래층보다 이층이 훨씬 든든하다. 아래층을 거쳐야 이층에 올라가니 말이다.」
곁방에 한데 몰아넣어 두었던 것을 다시 이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 옮겨놓고 저녁거리를 이층에 올라가 떠가지고 내려오다가 노파는 다리가 아파서 신음소리를 마구 쳤다. (중략)
공포의 밤이 아무 일 없이 다시 밝았다. 이튿날 아침 노파는 층층대를 기어 올라갔다. 아침 쌀을 뜨러 간 김에 아주 언덕길 저쪽의 기색을 살피기로 했다.
유리문을 열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 사람이 있는 걸 일깨워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집 앞에 트럭이 서 있다. 어디 가나보다. 시원하긴 하나 아주 가면 혼자 어쩌나 하는 마음이 노파를 엄습했다.
무서우면서도 그녀석이 있거니 하면 한편 든든하기도 했는데 노파는 유리문을 열고 그쪽을 살폈다.




▶ 작가_ 최정희 - 소설가. 1912년 함경북도 단천에서 태어나, 부모 몰래 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상경. 숙명여고보를 거쳐 중앙보육학교에 다니던 중 일본으로 건너가서 몇 년 동안 유치원 보모로 일했다. 귀국 후 『삼천리』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을 쓰게 됨. 동란 때 책상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된 것이 평생 엎드려서 글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화투광이다. 펴낸 책으로 『천맥』『인간사』『녹색의 문』『찬란한 대낮』』등이 있음.


▶ 낭독_ 문형주 - 배우. 연극「맘모스 해동」, 「칼리큘라」, 「당통의 죽음」 등에 출연.


배달하며

때는 1.4 후퇴 동란의 한가운데, 모두가 피난을 떠나고 텅 비어 있는 마을, 노파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번듯하게 지은 전망 좋은 집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덮을 것도 그대로 있지만, 전쟁보다 더 무서운 건 외로움이다. 어느 날 아랫동네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도한 것도 잠시, 노파는 그가 도둑으로 변해 자기 집으로 쳐들어올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텅 빈 동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양식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에 쫓기며, 쌀자루를 더 깊은 곳에 감춰두기 위해 아래위층으로 숨차게 오르내리는 노파의 모습은, 전쟁보다 외로움보다 더 앞서는 것이 호구(糊口)라는 것을 말해준다. 거꾸로 유추해보면 인간은 먹을 양식만 앞에 두면, 혼자라는 두려움, 죽음의 공포도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강물의 끝』(문학사상사)

▶ 음악_ piano classics n225 중에서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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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전쟁이 주는 심각한 공포와 매우 낯선 비일상성, 평소에는 그것들이 우리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듯 느껴지지만 실은 바로 우리 곁에, 바로 종이 한 장 뒤에 존재하는 것. 그것을 새삼 절실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네요!

    • 2015-07-27 12:00: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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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깐나

    아무도 없는 그 숨막히는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 정적속에서 내꺼를 챙기려는 나의 이기적인 면도 함께 봅니다.

    • 2015-07-20 01:26:25
    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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