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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은, 『쥐식인 불루스』

  • 작성일 2015-07-31
  • 조회수 1,025





“맛은 몸에 무엇이 독이 되는지 알아내기 위해
우리의 혀를 칼로 바꾼다.
영혼 속에 쓴맛의 DNA를 가진 사람들, 소설가”



김다은, 『쥐식인 불루스』






가족 중의 누구도 내 방문을 열지 않았지. 이번 싸움도 무승부야. 문을 사이에 두고, 밖에는 식탁과 가족과 세상이 대치하고 있고, 안에는 배고픔과 나 홀로와 소설이 대치한 채 말이야. 문밖의 가족은 나를 골방에서 끌어내어 세상으로 나가게 만들 심산인 거야. 죽은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랑하는 아들이 혹은 사랑하는 오빠가 영양실조에 걸려 천천히 죽어가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잔인하지만, 이제 공짜 밥의 시효가 끝났음을 철저하게 알려주고,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항복할 때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기로 합의한 거야. 그들처럼 일상의 삶을 살면서, 일류학교 나온 졸업생답게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번듯한 중소기업에 양복입고 매일 출근하겠다고 내가 선언할 때까지 저들은 한통속으로 지독한 인내심과 사랑으로 기다릴 거야. 가난한 예술세계에서 나를 건져내기 위해 그들은 이번 마지막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 할 거야. 나는 지금 저들이 원하는 상태로 천천히 변하고 있지. 배고픔 때문에 언제 문밖으로 뛰쳐나갈지 모르는, 굶어서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오로지 밥을 위해 어떤 것이든지 버릴 수 있는 인간. 저들은 승리를 예감하며 미리 출 춤의 스텝을 밟고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지. 내가 저 방문을 여는 순간에 저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저들은 내가 화려한 세상의 삶과 기쁨으로부터 추방당한 채 골방에서 아무 소용없는 소설 속에서 허비당하다가 마침내 먹을 것을 위해 두 손을 들고 나온 것이라고. 마침내 픽션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문을 연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거야. 소설이 밥 먹여주니? 아니요. 여태 일용할 양식을 먹여준 것은 아버지예요. 내가 소설을 포기했다고 환호하던 가족은 곧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거야. 내가 문을 박차고 나가면, 아니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 된 상태에서 문을 간신히 열고 기어나가게 될 때쯤이면, 나는 화려하고 배부른 식탁은 원하지도 않을 거야. 운이 좋다면 나는 완벽하게 시나리오 작가의 허기증에 도달해 있을 거야. 운이 더 좋다면, 갑상샘기능항진증에 걸린 환자처럼 끝없는 배고픔의 인자를 몸에 지닌 상태가 되어 있을 거야. 쓴 맛처럼, 내 영혼과 예술가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줄 DNA! 내가 쥐구멍에서 빠져 나간다면 가족이 기대하듯이 내가 소설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준비되었기 때문일 거야.




▶ 작가_ 김다은 - 소설가. 1962년 전주 출생.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응모한 장편소설 『당신을 닮은 나라 1,2』가 1억원 고료 국민문학상에 당선. 현재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중에도 『훈민정음의 비밀』 『이상한 연애편지』 등 500쪽 넘는 긴 호흡의 역작들을 발표하며 인내를 가진 참 독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 낭독_ 손상규 - 배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내마', '햄릿프로젝트' 등에 출연


배달하며

소설 쓰기는 문학 행위이자, 굶주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밀한 저항 행위이다. 작가는 가장 높은 것을 욕망하기에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생 빈 원고지를 알집 삼아 스스로 태어나는 아프락사스. 고립, 갈증, 불면, 탈진, 백수의 대가로 얻어지는 소금 같고 빛 같은 문장들-그것은 작가들이 차린 식탁 위에 놓인 언어의 밥이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쥐식인 불루스』(작가출판사)

▶ 음악_ Sounddogs - hollywood-acoustic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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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책 제목이 강렬하게 시사하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연! 때로 혼자 생각해보는 존재이자 명제인 '지식인'에 대해 오늘 오후, 다시 깊이 성찰해보고 싶다.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의 자긍심을 가진 자가 지닌 욕망의 크기, 그것은 얼마나 처연한 것일까!

    • 2015-08-05 11:21: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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