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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경, 「타르」

  • 작성일 2015-08-17
  • 조회수 1,234





“어두운 정염, 일상의 권태와 무기력을 갈아엎고픈 육체의 절박한 호소. 그것이 아니면, 그 무엇이 타산과 관습에 찌든 우리의 눈을 생판 멀게 할 수 있을까.”



이숙경, 「타르」






당신은 가게 벽에 기댑니다. 시멘트로 마감하지 않은 거친 불록 담입니다. 셀룰로이드를 뜯고, 타르가 많다는 담배 한 개비를 꺼냅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당신은 담배를 입에 뭅니다.
그 몇 달 전, 마리 이모와 나란히 벽에 기댄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그때 당신은 타르를 들이마시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간입니다.
마리 이모는 꽁초를 찾아 식탁 주위 풀밭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함부로 던진 담배꽁초들은 밤이슬에 모두 젖어 있습니다. 마리 이모는 무릎을 꿇고 엉금엉금 기면서 당신 주변을 맴돕니다. 당신 곁에 바짝 붙어 있던 폴이 자리를 피해 줍니다.
크고 둔탁한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간 마리 이모의 손이 당신의 발목을 스칩니다. 스쳐 지나간 줄 알았던 손이 천천히 당신의 맨발을 감쌉니다. 손은, 무척 뜨겁습니다. 당신은 식탁 아래 숨어 있는 마리 이모의 표정을 볼 수 없습니다. 마리 이모는 당신의 단단한 복사뼈와 발가락 사이를, 뒤꿈치와 발목을 쓰다듬습니다. 손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뜨거워집니다. 마리 이모는 당신의 발치에서, 마치 폴처럼 당신을 쳐다봅니다.
「아무래도 담배를 사러 가야겠어.」
당신은 망설입니다. 집은 조용합니다. 열린 현관으로 거실의 불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옵니다. 라디오는 제멋대로 음악을 선곡해서 들려줍니다. 탁주 사발을 들이켜는 듯 갈라진 창이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갑자기 마리 이모가 차에 오릅니다. 시동을 켜는 소리가 급작스럽게 튀어나옵니다. 짜작, 차바퀴에 깔린 자갈이 흐트러집니다. 자갈은 길을 내줄 때 좀 더 앙칼진 소리를 냅니다. 몇 미터 후진했던 차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조금 빠른 속도입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식탁 가장자리로 피합니다. 마리 이모는 당신이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를 넘어뜨리고 나서야 핸들을 꺾습니다. 당신은 마리 이모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엎치고 밀치는 와중에 마리 이모의 어깨와 가슴에, 땀내 나는 머리카락과 술내 나는 숨소리에 젖은 작은 신음을 듣습니다. 당신은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든 기분입니다. 한동안 실랑이 끝에 당신은 마리 이모를 옆자리로 밀칩니다.
페달을 밟는 감촉이 섬뜩합니다. 그제야 당신은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맨발로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당신은 잠시 생각합니다.




▶ 작가_ 이숙경 - 소설가. 1958년 서울 출생. 1999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일간지와 문예지에 수십 차례 응모했지만 모두 낙선하고 2006년 마흔 여덟 살이 되어서 대구매일신문과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원고 청탁 하나 없이 다시 몇 년을 버틴 후 습작 십년 만에 첫 소설집 『유라의 결혼식』을 출간. 200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품창작기금을 받았다.

▶ 낭독_ 이연규 - 배우. 연극 '먼데서 오는 여자', '베키쇼', '그을린 사랑' 등에 출연


배달하며

정염은 단순히 욕망이 이성의 균열을 비집고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쇳물이 아니다. 기억 속의 파란 이끼 같은 회한, 상처, 가눌 수 없는 비애의 감정, 오랜 한숨을, 허무하게 사라지는 한 줄기 담배연기나, 헛도는 변기레버에 얹어 방치해 놓은 채, 무기력하게 지내온 사람이, 조카의 연인이나, 수도배관공의 의미 없는 눈빛에 화들짝 놀란 듯 자기를 얽어맨 돌연한 환영일 수 있다. 스스로 ‘그녀를’ 또는 ‘그를’ 위해 단 한 사람의 ‘그대’가 되려는 나 아닌 다른 자기의 발견. 그래서 정염은 처연한 연기이다. 그 연기는 몰입하면 할수록, 그 배우가 진짜 자기이고, 평소의 자기는 세상을 헛사는 로봇으로 느껴진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유라의 결혼식』(문이당)

▶ 음악_ Stock Music-Guitar Horizons 중에서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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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진정한 '정염'이란 어떤 것인지, 그 처연한 민낯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군요!!!

    • 2015-08-19 06:12:5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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