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송우혜 , 『하얀 새』

  • 작성일 2015-09-04
  • 조회수 828





“사랑만이 관습적 사고의 패착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불꽃이다.”’”



송우혜 , 『하얀 새』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느 시대나 전쟁이 있었고, 전쟁이 있는 곳마다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으며, 그리고 패자의 여인들에 대한 겁탈이 있었다. 그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힘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한 도저히 없어지지 않을 공식이다. 그런 무익한 소모가 안타까워서 성인들은 제각기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로 사는 법을 가르치려고 애쓰셨다. 대성(大聖) 공자는 ‘인(仁)’으로 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석가여래는 ‘자비(慈悲)’로 살라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여인의 몸이 더렵혀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함인가. 우리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인이 더럽혀졌다’는 말의 의미를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정교하게 깎고 갈고 다듬어낸 끝에 이제는 ‘살아서 외적의 포로가 되었다’는 정도면 이미 다시 돌아볼 여지 없이 더럽혀진 여인으로 보기까지 이르렀다.
중국의 원(元)나라 태조인 칭기즈칸(成吉思汗)의 고사는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칭기즈칸은 젊은 부족장 시절에 패전하여 적장에게 아내를 빼앗겼다가 뒤에 힘을 길러 적장을 쳐 없애고 아내를 되찾아 와서 같이 살았다. 그래서 뒷날 천하를 통일한 대영웅이 된 뒤까지도 칭기즈칸은 아내가 낳은 장남이 시기적으로 보아 그의 아들인지 적장의 아들인지가 분명치 않아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격렬한 경멸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한다. “그러니까 오랑캐 야만이지. ” 그렇다면 문명이란 무엇인가. 적의 침공 앞에 아내를 팽개쳐두어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서도 적의 손은 커녕 눈길조차 닿은 적이 전혀 없는 여인으로 있기를 원한다. 그것이 문명인가. 문명의 힘으로만 생각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인가.
그러나 세상에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처절하리만치 잔혹하게 안간힘을 써서 추구하고 있는 ‘흠이 전혀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것 또한 버젓하게 존재하고 있다. 욕을 당하기 전에 미리 자결한 여인들 같은 경우다. 그런 아름다움이 과연 무가치한 것일까. 더럽혀졌다는 것의 본질이 추함이라면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목욕을 하여 실절의 더러움을 씻으라는 발상 또한 이른바 문명의 소산임은 틀림없다. 아아, 물이 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까지 씻어낼 수 있는 것인가..




▶ 작가_ 송우혜 -소설가.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한신대 신학과를 거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죽은 남자들, 말하자면 이순신, 윤동주, 전봉준, 홍범도 같은 남자들에게 반해, 살아 있는 자신의 삶을 죽은 그들에게 쏟아 부으며 산다. 『윤동주 평전』 은 전문가들로부터 그 분야 연구 서적의 완결판으로 일컬어지며, 이순신에 대해 막무가내로 왜곡하는 책들이 시장에서 너무나 범람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순신에 대한 완결판을 지금 또 집필 중이다. 무서운 작가다. 지은 책으로 『저울과 칼』 『투평한 숲』 『마지막 황태자』 등이 있음.

▶ 낭독_ 우미화 - 배우. 연극「말들의 무덤」,「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농담」 등에 출연.


배달하며

우리 역사에서 매우 통렬한 고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병자호란, 이제 여인들은 스스로 위선적 구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남성 중심, 기득권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알량한 잣대를 온전한 눈부심으로 무화(無化)시켜야 한다. 전시에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적진으로 끌려가서 수모를 당한 우리의 여인들. 그녀들은 살아서 돌아왔으나 경멸의 눈초리 속에서 또다시 모진 세월을 견뎌야 한다. 남편, 친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그녀들은 절해의 고립 속에서 신음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신음은 ‘더럽혀졌다’는 뻔뻔스러운 손가락질보다 더 참된 울음이다. 아무것도 기댈 것 없어진 그 연약한 자리에서 눈물로 대면한 신의 은혜로움으로, 더럽혀짐은 더 이상 상처나 두려움이 아닌, 짓밟혀질수록 온전해지는 역설의 신비를 이루어낸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하얀 새』(푸른숲)

▶ 음악_The Film Edge / Reflective-Slow 중에서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2건

  • 익명

    짓밟혀질수록 온전해지는 역설의 신비... '문명'의 본질과 그 힘에 대해서 생각하면 때로는 숨이 차다.

    • 2015-09-05 23:08:02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병자호란 때의 여성 문제도 그렇고 오늘날 많이 거론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라 봅니다. 자기네 여성들을 지켜내지 못한 바보들이 마음은 좁아터져서 눈물 흘리면서 돌아온 그들을 아프게 품어주지도 못한 그런 민족성, 왜 우리는 그런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지금도 그런 것이겠죠?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공론화할 일이 아닐까요?

    • 2015-09-05 10:24:40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