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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남대문 시장」

  • 작성일 2015-10-04
  • 조회수 677





“은 기억에 피를 돌게 하는 것은 그리움.
그리움은 항시 마법의 리듬을 숨기고 있는 피리와 같다”



이우환 「남대문 시장」






잘 살펴보면 여기는 어딘가 이상하다. 물건도 점원도 손님도 모든 것이 조금 몸을 앞으로 내밀어 숙여서, 묘하게 안정감 없이 기울어진 느낌. 그만큼 물건의 각도가 원위치에서 빗나가 상반신이 드러난 무방비 상태다. 그리고 서로가 호의나 적의나 욕망 껏 쳐다보고 불러보고 침투해 간다. 사과는 얼마간 내 눈길이나 옆의 생선 냄새나 옷 색깔이나 모든 것들의 침투를 받아 더 이상 사과 그 자체가 아니다. 부침개에 치마저고리의 색깔이, 술에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하늘이, 술잔에 사람의 입술 흔적과 파리똥이, 빨간 고추 더미, 눈에 배어드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모양에 이끌려 마구 휘젓고 있는 사이에 벌써 손도 마음도 새빨갛다. 고추 쪽 또한 나를 끌어들여 무언가를 빨아들인 듯, 더욱 더 빨갛고 맵고 기차게 요염하지 않은가. 내 속엔 물건이, 물건 속에 내가 서로 침입한다. 모두가 서로 거리감을 잃고, 신발 채로 상대의 내면으로까지 예사로 들어가 뭐가 뭔지 서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중략)
욕정이 내키는 대로 서로 접하고 서로 범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물체의 세계를 여는 광기에 찬 일들의 공간. 이런 가운데를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에 나야말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엇인가로 둔갑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시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방안이 사온 물건투성이다. 비닐 손가방, 부엌칼, 돌 냄비, 돌김, 부채, 사과, 장난감 권총. 그런데 이 플라스틱 탈과 흙투성이의 너덜너덜한 헌 신은? 이 백자 항아리. 저 오래된 듯한 나무 상자는 가짜 아닌지? 10킬로그램이나 되는 자루에 가득한 물들인 듯한 고추..
여우에 홀렸던 것일까. 어쩔 작정으로 이런 것을 이렇게나 사들여버렸을까. 그렇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들은 모두가 광채를 잃고 무엇 하나 눈길을 느낄 수 없다. 제 자리를 떠나 열이 식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휘둘러봐도 손에 들고 서로 접촉을 해보려 해도 그야말로 그냥 사과이며 어디에라도 있을 법한 부채이고 말 그대로의 비닐 가방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가 다 잡동사니로 변하고 말았는가. 사실은 원래부터 그런 것들이었는가. 나야말로 취기에서 깨어나 의식을 가진 한 개의 잡동사니로 되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는 잠시 어처구니없는 환상을 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 쳐도 인간을 물건을 그토록 미친 듯한 욕망으로 내모는 그 남대문 시장이란 무엇일까.




▶ 작가_ 이우환 - 화가. 문인 황견룡에게서 유년기에 시. 서. 화를 배웠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숙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1년 일본대 문학부 철학과 졸업 후 사토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짐. 여백의 아름다움을 전위적으로 담아낸 화풍으로 국제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래, ‘그는 미쳤다’는 평을 받으며, 일본의 전위화가들이 따라잡아야 하는 ‘목표’가 되었다.



배달하며

고향을 떠난 사람, 넓은 세상으로 나가 얻고 오르고 성취한 뒤에도
고향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 뭘까. 채워지지 않음으로써 더욱 순결해지는 결핍감.
그에겐 남대문 시장이 우리가 아는 그 시장이 아니다.
쓰임이란 잣대로 값이 매겨지는 물건들의 집합소가 아닌,
색깔, 형태, 소리, 냄새로 소용돌이치는 원시적 에너지의 향연.
그가 떠날 때 멈춘 피딱지 같은 기억들이 살아나 춤추는 야성의 무대.
이우환처럼 남대문 시장에서 마법의 미로에 갇혀 길을 잃고 싶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시간의 여울』 (디자인하우스 1994년 8월)

▶ 음악_

▶ 애니메이션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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