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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 작성일 2015-10-15
  • 조회수 870

http://youtu.be/2F0s0DVKRkg


“살던 터전을 벗어나, 가고 또 간 끝에 지평선에 이르러 본 일이 있는가?” 


가브리엘 루아,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멀고 너무나도 외롭고 너무나도 비통해서 거듭거듭 가슴이 조여드는 하나의 지평선. 그게 전부인 곳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작은 야산 줄기 하나가 오른쪽 상당히 먼 곳을 건너지르면서 마침내 그 고장이 지워져 없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 마을과 마찬가지로 거칠 데 없는 그 밋밋한 평원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어김없이 그 놀라운 야산들에 눈을 박을 수 있었고 아침마다 눈을 뜨면 그 산을 바라보면서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는 이 밋밋한 풍경이 결국은 자아내고 마는 현기증과 맞서서 일종의 피난처 같은 것을 되찾는 것이었다.
해가 그 야산들의 주름 속으로 낮게 내려오면 바로 그때 산들은 어떤 이상한 빛을 담뿍 안으면서 그 아래 가만히 엎드려 있는 마을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매혹을 끼치는 것이었다. 삼리웡이 구월 어느 날 짚으로 엮은 고리짝 하나를 들고 역에서 내려 이 지평선 마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도 산의 모습은 바로 이러했다.
날은 덥고 바람이 불었다. 기차는 어느 새 다시 떠나버리고 없었다. 나무로 된 플랫폼에 혼자 남은 삼리웡은 무슨 요술에 걸려 이곳에 던져진 인간 같은 인상이었다. (중략)
바람이 불어 먼지 많은 땅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마을에는 누구 하나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먼지로 더럽혀진 역사의 유리창 저 뒤에 앉아 있는 역장조차도 서류만 훑어볼 뿐 고개를 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역사와 짙은 붉은색 저수탱크 사이의 작은 나무 플랫폼 한가운데 뚜렷이 보이도록 서 있는 삼리웡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싸고 있는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역 앞의 빈 벤치 아래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 철길과 그 가장자리에 높게 웃자라 흔들리는 잡초 속을 건너질러 가더니 길로 나서서 판자를 깐 인도에 이르렀다.
그는 어느 쪽으로 갈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오른쪽 벌판 방향으로 걸어갔다.

▶ 작가_ 가브리엘 루아  - 소설가. 1909년 캐나다 보니파스에서 출생.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위니펙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생활을 하며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몬트리올로 옮겨 기자로 일하던 중 1945년에 발표한 『싸구려 행복』이 프랑스 페미나상을 수상하며 캐나다 대표 작가로 부상. 1983년 영면하기까지 『내 생애의 아이들』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 낭독_ 박성연 - 배우. 연극 <베르나르다알바의 집>,<목란언니>,<아가멤논> 등에 출연

배달하며

삼리웡, 그대는 어찌하여 조상들의 뒤를 따라 서역으로 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대가 옳았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그대가 다다른 곳엔
인간이 손으로 빚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에게 막막함을, 존재의 현기증을 안겨 주는 저 먼 지평선 밖에 없다.
너무나도 외롭고, 너무나도 비통한 느낌이 바로 그대가 신을 만났다는 증거이다.
신 이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그곳,
이제 막 시작된 그대의 새 출발은 이미 자기 이상(以上)의 위대함을 실현하고 있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세상 끝의 정원』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사 2004년 7월)

▶ 음악_BackTraxx-mellow2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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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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