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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과 비녀

  • 작성일 2015-11-23
  • 조회수 223

도둑과 비녀

 

들었는가?”

그려. 최대감네도 전부 털렸다면서.”

그 놈 참 신출귀몰하네. 관아에서도 다들 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도 아직까지 모른다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애인지 어른인지도 모른다고 하네. 본 사람들마다 증언이 엇갈리니 원. 어쩌면 도깨비나 귀신일지도 몰라.”

주막 웅크린 황소에서 국밥을 들며 남자들이 하던 대화였다. 곰방대를 꼬나물고 있던 한 노인이 그 대화를 듣다가 쌈지를 내려놓으며 낄낄 웃었다.

군졸들은 그 놈을 못 잡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마 노고단에서 흘러 들어온 녀석인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립니까?” 소머리국밥을 열심히 퍼먹던 일꾼이 그에게 물었다.

노인은 곰방대에 꾹꾹 눌러 담은 재를 털면서 주모에게 술 한 병 내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자 일꾼들은 술 값을 대신 치러주겠다면서 더 들려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노고단에서 온 놈이요? 그 홍길동이 울고 간다는 노고단의 붉은이리 시랑말입니까?”

일꾼들이 술값을 대신 내주자 기분이 좋아진 노인은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렴. 얼마 전까지 그 지역 부호들을 죄다 털던 놈이 있는데, 최근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주 조용해졌거든. 그런데 때마침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 마을을 털어먹는 놈이 있다. 뻔하지 않는가? 노고단에서 군졸들이 대대로 순찰을 돌기 시작해서 더 이상 도둑질 하기 힘드니 타 지역으로 넘어온 것이지. 손만 대면 잠긴 문도 저절로 열리고, 값진 재화는 알아서 굴러 그 놈 자루로 들어간다고 해.”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는지도 모른 채 일꾼들이 노인의 이야기를 듣느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디 보자. 최대감네도 도둑맞았고, 고을원님도 도둑을 맞았고, 아랫길 상단도 물건을 도둑맞았으니, 남은 집은 몇 없군. 이 마을에서 다음가는 부자가 누구지?”

노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짐짓 그렇게 물었다. 일꾼들이 즉시 대답했다.

벽이 아씨네가 있지요.”

그러자 그 집에서 일하는 일꾼이 울상이 되었다.

아니, 그럼 다음으로 도둑맞을 집이 우리저택이란 말이오? 불쌍한 아씨. 어르신 내외분께서 돌아가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씨는 이제 혼자란 말입니다. 안 그래도 못된 친척 놈들이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데 이를 어쩝니까.”

밤에는 경비를 철통같이 서고 낮에는 낯선 이를 들이지 않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 시랑이라는 놈은 도둑질을 하기 전에 예고를 하는 버릇이 있으니 잘 방비한다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노인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소.”

뭐가 말인가?”

그 노고단의 시랑이라는 놈은 50년도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대도둑이 아니오.”

그렇지.”

그렇다면 지금 아무리 안 되도 육십이나 칠십 먹은 노인, 아니면 할망구라는 건데.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군졸과 장병을 모조리 따돌리고 귀신같이 도둑질을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흐음…… 그것도 확실히 일리가 있군.”

 

노고단의 대도둑 시랑이 평사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자연히 아직까지 평사리에서 도둑을 맞지 않은 집주인인 벽옥의 귀에도 들어갔다. 벽옥은 올해 16살로, 어린 나이에 집안살림을 모두 떠안게 된 평사리 지주의 첫째 딸이었다. 용모가 곱고 품행이 단아해서 평사리에서 뭇 사내들을 많이 상사병에 빠뜨린 인물이었다.

저잣거리에서 도는 소문인데, 노고단의 시랑이라는 도둑이 저희 마을에 와 있답니다. 그래서 문단속 잘하고 도둑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매가 말했다.

주위가 온통 이리 떼구나.” 벽옥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엊그제 아씨가 계시지 않을 때, 유산상속 문제로 유씨 고모가 왔었습니다.”

정작 아버님이 아프실 때는 한번 방문도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가진 게 너무 많아져도 문제다. 고모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

늘 하시는 말입니다.”

그런데 벽옥과 이매가 이야기하며 막 사랑채를 돌아서 솟을대문을 지날 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문지방에 퍽 하고 꽂혔다. 화살대는 벽옥의 머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르르 떨었다. 벽옥은 물론이고 이매도 무척 놀랐다. 화살에는 편지가 묶여 있었다. 장에서 흔하게 파는 빛 바랜 한지였는데, 이매가 펼치자 가지런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십일월 스물 다섯 번째 날, 술시에 댁의 집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가지러 오겠습니다.

 

노고단의 시랑」

 

두 사람은 그 편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매가 펄쩍 뛰었다.

어느 놈이냐! 누가 이런 장난을.”

이매는 화를 벌컥 내며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옥은 힘들게 화살을 뽑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의 숲을 보았다.

아씨, 이것은 아씨의 재산을 노리는 친척들의 간계가 분명합니다. 때마침 우리 마을에 있다는 도둑을 핑계로 우리 재산을 가로채려는 속셈입니다.”

그럴 리가……” 벽옥이 말했다. “최대감네도 도둑을 맞았고, 원님도 그리고 아랫길 상단도 도둑을 맞았으니, 다음은 우리 집 차례가 맞겠지. 하지만 차라리 재산을 모조리 도둑맞고 나면 이런 복잡한 문제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니 더 좋을지도 몰라.”

그런 마음 약한 소리 마십시오. 저는 어르신의 재산 한 푼도 그런 한량과 도둑에게는 못 줍니다. 유씨 고모야 뻔하지요. 허구한날 도박에 술을 끼고 사니 돈이 남아납니까? 그리고 노고단의 대도둑 좋아하시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남들이 힘들게 벌어놓은 돈을 훔치는 것밖에 못하는 주제에.” 이매가 툴툴거렸다.

고마워, 이매. 날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아직 이레 정도 시간이 있으니, 혼구멍을 내줄 준비를 할 겁니다.”

 

이매는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추수철이었기 때문에, 수확해야 할 곡식과 과일이 많았다. 일꾼들도 매일매일 열심히 일했다. 벽옥은 돈 빌려간 사람의 날짜와 이자를 집기장에 기록했다. 올해는 가물어서 벼가 풍년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유씨 고모가 술 취한 채 또 들이닥쳐, 자기 몫의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유언장은 가짜이니 자기 몫의 정당한 돈을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매가 빗자루를 들고 달려 나오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갔다.

하지만 유씨 고모보다 골치 아픈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벽옥의 친가 친척들은 평사리의 저택을 내놓으라고 매일같이 찾아와서 요구를 했다. 벽옥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자기네들이 대신 토지관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이매가 호통을 쳤다.

아씨는 어리지 않습니다. 제 앞가림 다 하고,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 해부터 옆에서 수발을 들며 다 배웠습니다. 오히려 쉰네보다 낫습니다.”

하지만 작은 삼촌 역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찌검까지 해가며 으름장을 놓았다.

, 이야기를 들어봐, 이매. 내가 잘 아는 집에서 혼담제의가 들어왔는데, 한번 고려해봐. 조카는 적당히 시집 보내고 집은 우리한테 어서 넘겨, 이 망할 할망구야! 내 말을 들어! 녹을 좀 먹다 보니 이제는 상전도 눈에 뵈는 것이 없지!”

어디 변변치 못한 놈들한테 아씨를 줄까 봐!”

! 그 말 다 들었어! 그대로 전할 테다! 평생 시집 따위 못하게 해주마!“

하지만 고을원님이 가지고 있는 유언장은 진짜였다. 친척들은 유언장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며 돌아갔다. 이매는 문간에 소금을 뿌렸다.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도둑이 찾으러 오겠다는 날짜가 가까이 오자 이매는 장졸들을 불러모으고, 관아에도 이것을 신고했다. 해가 질 무렵 길 모퉁이마다 횃불이란 횃불은 다 밝혀졌으며, 그물과 창을 든 군졸들이 대기를 했다. 벽옥은 조심하라는 이매의 말에 호랑이라도 잡으러 가는 거냐고 농담을 던졌지만, 이매는 웃지 않았다.

아씨 말대로 사방이 이리 떼네요. 짐승을 잡으려면 몽둥이가 약이죠. 오늘 내참에 노고단의 도둑인지 뭔지도 잡아서 족쳐 옥에 넣겠습니다.”

이매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을 보고 벽옥은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랑이 예고를 했던 11 25일의 밤이었다. 하지만 벽옥은 시랑이 적은 편지의 내용을 읽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저기, 이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보석이 뭐야? 아버님은 보석을 모으시는 취미는 없었는데, 보석을 가지러 오겠다니.”

그렇게 말하면서 벽옥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가진 보석이라고 해봐야 어머니의 유품인 둥근 반지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값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니 그대로 되팔아도 어느 정도는 값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유언장이나 토지증서 같은 것들이 더 비쌌다. 집 안에 자신이 모르는 보석함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벽옥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마 보석이라는 것은 아버님의 재산을 가리키는 것일 거라고 벽옥은 생각했다.

어느덧 술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평사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몇몇 일꾼들은 졸면서 보초를 섰고, 이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도둑을 기다렸다.

어쩌면 나타날지도, 그리고 어쩌면 나타나지도 않을 도둑을 기다리느라 온 집안 식구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어머니의 유품을 손에 꼭 쥐고 품 속에 넣었다. 재산싸움에 끼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괘씸한 도둑에게 재산을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이매의 말처럼 도둑의 문제는 군졸로 풀고, 재산상속의 문제는 유언장으로 풀어야 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하니, 아무것도 훔쳐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도둑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예고장 같은 것을 보내다니, 그 놈은 바보인 걸까?’

그러나 벽옥이 모르는 것도 한 가지 있었다. 이매가 심혈을 기울여가며 보초를 세우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노고단의 시랑은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괴도였고, 동시에 예고장을 모두 던지고도 유유히 원하는 것을 훔쳐내는 도둑이었던 것이다.

올빼미가 울었다. 두 번 더 울었다.

그때 벽옥은 아버님의 방으로 이어지는 안채의 마루턱에 걸터앉은 채 둥근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만약 도둑이 나타난다면 아마도 패물함을 비롯한 중요한 서류와 물건들이 있는 이 방을 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였기 때문에, 벽옥은 소리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잠시 그 어두컴컴한 형체를 보았다. 담장의 그늘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도둑 잡아라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둑이다! 도둑이야!” 카랑카랑한 이매의 목소리도 들렸다. “놈이 안채로 갔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어쩐지 벽옥은 별로 겁이 나지 않았다.

누구세요?” 벽옥이 물었다.

남자는, 아니 남자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앳된 목소리의 주인은 벽옥보다 키가 약간 큰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늑대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벽옥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궁금증이었다. 노고단의 대도둑 시랑. 그 시랑이라는 이름이 혹시 저 늑대탈 때문에 생긴 걸까? 그리고 대체 뭘 찾았다는 거지?

사람들이 온다, 시간 없어. 가자.”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시랑은 벽옥의 팔을 잡아 끌었다. 막 솟을대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온 군졸들이 멀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순간 묵직한 천자락이 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벽옥은 몸이 홱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놀라서 시랑의 팔을 꽉 잡았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벽옥을 데리고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자신을 부르는 이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느새 멀어지고 있었다. 시랑은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큰 소리로 비웃었다.

아하하하하! 비사벌의 하나뿐인 보석은 바로 나 노고단의 시랑이 가져간다아아아아와아아아악!”

기세 좋게 담장을 넘으며, 내빼던 시랑은 그러나 벽옥이 있는 힘껏 머리로 턱을 받아버리자 그만 자빠지고 말았다. 넘어질 때 어찌나 큰 소리가 나는지 벽옥은 자기가 도둑을 잡았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시랑은 벌떡 일어났다.

, 계집애가 힘만 세서! 조용히 안 해!”

이거 안 놔!”

벽옥은 그 사내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그가 쓰고 있던 늑대탈이 거의 벗겨질 뻔했다. 하지만 곧 그는 벽옥을 꽉 누르고 아무 소리 내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넘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로 옆을 지나치면서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이 어둠 속에 잘 녹아 드는 검은색이었던 탓도 있었다. 군졸들이 지나가자 시랑은 재빨리 벽옥을 들쳐 매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려줘!”벽옥이 발버둥치면서 소리쳤다. 내려줘! 와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악! 여기 도둑이 있어요! 살려줘요!”

너 조용히 안 해!”

저 쪽이다! 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그물과 창을 들고 우르르 쫓아왔다. 시랑은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벽옥은 더 크게 소리질렀다.

안되겠다!” 시랑은 잠시 멈추더니 (벽옥은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마구 걷어찼다.) 허둥대면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벽옥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이거 먹어봐.”

누가 이딴 걸, 먹을 줄 알아, 엣취! 야아아아아, 이거 뭐야!!!”

벽옥은 시랑이 입 속에 넣어준 것을 바로 뱉어냈지만, 혀에 닿는 순간 눈물콧물이 마구 쏟아지면서 재채기가 나왔다. 고춧가루 같은 것을 둥글게 뭉친 경단 같았다.

콜록콜록콜록!”

하지만 그걸 보고 시랑은 더 크게 놀라서는 팔을 마구 휘저었다.

어라? 왜 안 잠들지? , 이런. 엉뚱한 걸 먹였다.”

, 너어—(콜록콜록) , 두고!” 벽옥은 정신 없이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시랑은 보기보다 힘이 셌다. 간단히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기 있다! 이쪽이다!”

포졸이 소리지르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랑은 잠시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한 다음 할 수 없지.”하고 말하며 다시 벽옥을 들쳐 맸다. (벽옥은 여전히 기침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목이 타는 듯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침소리를 듣고 군졸들이 쫓아오기를 바랬던 것과는 달리, 시랑은 빠르게 큰길에서 벗어났다. 길도 없는 숲을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쫓아오던 소리가 사라졌다.

사방은 다시 쥐 죽은 듯이 고용해졌다. 숨 넘어갈 것 같은 기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번 시랑이 자기가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느라 멈추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달리며 마을에서 멀어졌다. 몇 분 정도 지났을 까, 간신히 진정이 된 벽옥은 다시 외쳤다.

내려줘!”

가만히 있어!”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보낸 예고장 안 받았어? 네 집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가져가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게 대체 뭔 짓이냐고!”

평사리 지주 비사벌의 보석, 벽옥.”

그 순간 벽옥은 하도 기가 막혀서 말문이 다 막혔다.

벽옥은 별로 값나가는 보석이 아니야.”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보석은 보석이잖아.”

그게 날 납치한 것과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시랑이 웃었다. 그는 갑자기 멈추더니 몸을 확 숙였다. 벽옥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강한 두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다시 주저앉혔다.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서 벽옥을 뚫어져라 보더니 한번 더 웃었다.

결정했어. 결혼하자! 가까이서 보니까 너 완전 예쁘다. 식은 어떻게 올릴래? 장소는?”

, 정신 나간—”

벽옥이 있는 힘을 다해서 시랑의 탈을 이마로 받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시랑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접었다.

쌤통이다! 코가 부러졌으면 좋겠네!”

벽옥은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일어났다. 하지만 서너 발자국 걷기도 전에 다시 시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벽옥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다시 탈을 써 버린 후여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벽옥은 이 도둑놈이 미쳤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나무들뿐이었고, 자신이 벌써 마을어귀까지 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졸들이 오가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드문드문 횃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늑대탈 위로 횃불의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잠시 후, 시랑은 한 손으로 벽옥의 팔을 잡은 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태연하게 다른 손으로는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도둑은 도둑이었고, 벽옥은 한평생 그렇게 무례한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벽옥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 무엄한 것! 당장 날 집에 데려다 줘! 뭐 하는 짓이야! 여기가 어디야!”

, . 왜 울어? , 울지마.”

이 멍청하고, 무엄하고 예절이라고는 유씨 고모의 술병 뚜껑만큼도 없는 도둑놈아! 잘 들어! 날 가져가고 싶다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어야 할 거 아니야!” 벽옥은 심지어 발을 쾅쾅 구르면서 화를 냈다. (아직도 입 안에 고춧가루 맛이 남아 있었다.) “넌 그러면 사람의 마음도 물건 훔치듯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집에 데려다 줘! 안 그러면 평생 미워할 거야! 너 같은 놈하고 결혼 따윌 할까 봐! 하더라도 난 울기만 할거고 너랑은 말 한마디 안 할 거야!”

벽옥이 마구 울며 화를 내자 시랑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쩔쩔매며 벽옥을 달랬다.

네가 그렇게 싫어할지 몰랐어. 울지마. 집에 데려다 줄게.“

지금 당장!”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그 이상한 가면 좀 벗으면 안돼?”

? 이건 안돼. 얼굴이 알려지면 도둑질을 할 수가 없잖아.”

시랑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벽옥은 쌀쌀맞게 고개를 돌리며 그 손을 잡지 않았다. 하지만 시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옥을 확 끌어당기며 온 길을 돌아갔다. 벽옥은 한번도 그렇게 밤길을 달려본 적이 없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시랑은 밤길에 걷는 것이 익숙한 것 같았다.

어느새 집이 보이자, 벽옥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이매와 일꾼들이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집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시랑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저기, 집에 데려다 줬으니까 나 미워하지 마. 내가 웬만하면 훔친 물건—”

누가 물건이야!”벽옥이 버럭 소리질렀다.

“—사람 제자리에 안 가져다 두는데, 오늘은 특별한 거야. 알았지?”

시랑은 벽옥의 두 손을 꼭 잡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늑대탈을 디밀어서 벽옥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부호들을 울린 도둑치고는 꽤나 어수룩한 부탁이었기 때문에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쩐지 놓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원래 가져가려고 했던 것은 너지만, 네가 싫다고 하니까…… 그 대신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지? 그리고 알고 보면 나도 꽤 괜찮은 놈이라고. 난 없는 게 없어. 너 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벽옥은 꿀꺽 삼켰다. 늑대탈 너머로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팔을 뻗어서 벽옥의 머리 근처로 가져갔다. 사락 하고 비녀로 고정시켜두었던 벽옥의 머리가 풀어졌다. 그리고 한 마리의 사슴처럼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가씨, 아가씨!”

벽옥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매가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다. 벽옥을 발견한 이매는 울며불며 다친 곳은 없는지 소란을 떨었다.

난 괜찮아.”

그 놈이 아씨를 채갈 때, 심장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별일 없으셨나요? 아이고, 머리가 다 산발이네. 혹시 놈이 못된 짓이라도 한 건……”

아무일 없었어. 정말이야.” 벽옥은 재차 이매를 달랬다.

어서 들어가요, 아가씨. 제가 따뜻한 음료라도 데워드릴게요. 어휴, 세상 흉흉해서 어디 살 수가 있나.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요?” 집에 들어가는 내내 이매는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벽옥은 솟을대문 아래에서 잠시 멈춘 다음, 집 뒤쪽에 있는 숲을 보았다. 횃불이 집 주위에 둘러쳐져 있기는 했지만, 그 안까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매를 따라서 부엌으로 갔다.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한 사람의 형체가 벽옥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사내와 소년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체격이었는데, 몸이 가벼웠다. 그가 향한 곳은 평사리의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그 너머로는 작은 둔덕이 하나 있었다. 삐걱 하고 문이 열렸다.

마루턱에 한 노인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랑이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래침을 뱉어내더니 곰방대로 그를 가리켰다.

, 인석아. 적당히 털어먹어라. 이러면 한 군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

영감은 일 없으면 조용히나 있어요.” 시랑은 오늘 일진이 사납네 마네 하고 중얼거리며 곰방대에서 떨어진 재를 밟았다.

무슨 놈의 애새끼가 곱게 키워났더니 말버릇 손버릇 고약한 놈이 됐어.”

그러자 시랑은 노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한테 배웠는데.”

난 그래도 너처럼 아무 집이나 막 털진 않았어.”

이빨 다 빠진 늙은 이리가 된 주제에 훈계질이야.”

, 저 못된 놈이……”

하지만 노인이 곰방대로 바닥을 두드려 대건 말건 시랑은 탈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러자 노인은 아이고, 내가 아끼는 건데.”하고 탈을 다시 줍더니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그는 손자를 한번 쏘아보았다.

그런데 오밤중에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 거냐? 평사리를 전부 뒤집어놓았더구나. 비사벌의 집에는 훔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사실이야. 그 집에는 별로 돈 될 만한 게 없어. 지주치고는 모아놓은 재산도 별로 없고. 그 지주보다는 내가 더 부자일걸?”

그럼 방금까지의 소란은 대체 뭐냐?”

시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돈 말고 가지고 싶은 게 생겼거든.”

?”

그런데 잘 안 됐어. 다른 방법을 써야 할까 봐. 여기 며칠만 더 머물면 안돼? 그때까지 확실하게 훔칠게.”

무슨 뜻이냐?”

시랑은 마루에 걸터앉은 채 비녀를 쥔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까닥였다.

할아범,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노인은 곰방대를 몇 번 뻐끔거렸다.

혹시 네가 말하는 계집애가 비사벌의 첫째 딸이냐?”

.”

예쁘냐?”

, . 완전 예뻐.”

성품은 고와? 요리는 잘해?”

글쎄 그건 아직 몰라.”

요리 잘하는지 먼저 알아와. 요리 못하는 여자는 며느리로 안 받아줄 거니까. 자고로 내 며느리가 되려면 생선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 해야 해. 특히 고등어 구이를. 손재주가 좋으면 더 좋지.”

시랑은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알겠다고 했다. (“그 애는 아마 요리도 잘할 거야.” 아무 근거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손자를 옆구리에 끼고 담배연기를 뿜었다.

잘 들어라, 이 녀석아. 세상에서 가장 훔치기 힘든 게 세 가지 있는데, 바로 황실의 옥새, 백성의 지지, 그리고 여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네 할미를 꼬셨는지 이야기해주마.”

 

벽옥은 이매가 가져온 뜨거운 꿀물을 마셨다. 그러자 그 즉시 온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긴장이 모두 녹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벽옥은 잔을 남김없이 비워 입 안에 남은 고춧가루의 맛도 지워버렸다. 그 동안 이매는 벽옥의 머리를 다시 깔끔하게 묶어주었다.

, 정말 정신 사나운 밤이었어.’

큰 일이 없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이매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하지만 벽옥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시랑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하기 부끄러웠던 그녀는 그냥 간단히 마구 소리지르고 걷어차자 그 놈이 자신을 두고 가버렸다고 설명했다.

천하의 못된 놈. 어디 훔칠 게 없어서 사람을 훔쳐. 분명 아씨를 납치하고 몸값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을 겁니다.”

,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니요. 확실합니다. 아가씨가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이매가 너무나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기 때문에 벽옥은 이매를 그냥 놔두었다. 이매는 한참을 더 열의에 차서 말하다가 벽옥이 잠은 것을 알고 조용해졌다. 그녀는 잠든 벽옥을 몇 초 정도 보다가 얇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