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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독

  • 작성일 2015-11-28
  • 조회수 269

사독

 

동은하의 귀족들이 대거 참석하는 저녁 무렵의 경기로 신 콜로세움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귀족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동은하의 귀족들은 특히 경기 관람에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오늘 있을 경기는 매달 열리는 토너먼트전이 아닌 돌발적인 이벤트에 더 가깝기 때문에 진행위원회가 특별히 만전을 기울이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내은하의 변경을 지키는 사독 장군이 포로로 잡혀 신 콜로세움으로 전날 이송되었다는 것은 외우주의 주민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오늘은 그가 경기를 치르는 날이었다.

몇몇 사람이 유치장이 양쪽에 늘어서 있는 신 콜로세움의 좁은 지하층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방에서 멈추었다. 그 중 손에 장갑을 낀 남자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간수가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아르마칸

쓸만한 포로가 있나 해서 보러 왔네.” 아르마칸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에 서은하에서 잡힌 사독이라는 남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를 살까 해서 말일세.”

,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있을 중계방송에 내보낼 예정입니다.”

프로필이 있으면 주게.”

그러자 간수가 그에게 들고 있던 자료를 넘겼다.

아르마칸은 파라락 종이를 넘겼다. 그는 사독의 유전자변이율을 기록해 놓은 도표를 가리키며 옆의 사람과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수는 힐끗 도표를 보았다. 서은하의 소수민족 출신답게 사독은 유전자변이율이 0.0000019%를 채 넘기지 않았다.

, 사독이 유글레이의 주인이었군. 문파는 마르차카 일검술범위가 1식부터 4식까지라. 내우주의 주민인데 정말로 마르차카 4식까지 가능한가?”

, 저희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오늘 상대는 누구인가?”

“3부 리그의 검투사들이 나갈 예정입니다. 아직 다 확인은 못했지만, , 아랑카, 그리고 야삼나. 이 순서로 나갑니다.”

그렇군. 이 녀석으로 사겠네. 하지만 외우주에서는 마르차카식에 대한 파해법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내보내는 건 조금 힘들 걸세.”

안 그래도 사흘 동안 음식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내보내기 전에 왼쪽 다리의 힘줄을 끊어놓게.”

방송에 그를 내보내기 전에 상해를 입히라는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 콜로세움의 간수는 웃음으로 일관했다. 아르마칸은 신 콜로세움의 소중한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렴요.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아르마칸은 사독 장군의 프로필을 그에게 돌려주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간수는 아르마칸이 나가자마자 얼굴을 있는대로 구기더니 서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그는 곧 감정을 추슬렀다.

귀족도 아닌 것이 갈수록 요구하는 것만 많아지는군요. 고돔을 등에 업더니 눈이 뵈는 게 없나 봅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경기 진행자 역시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르마칸이 최근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아이가 있잖습니까. 화려한 데뷔전을 시켜주려고 벼르고 있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다만 방송국에서는 오늘 있을 경기로 특집프로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다리 힘줄을 잘라놓으면 제대로 된 경기 영상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독이 그라운드로 나가자 마자 죽기라도 하면 오늘 경기를 보러 온 귀족들이 노발대발 할 텐데……”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그때까지 조용하게만 있던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는 서류를 다시 집어 든 다음 툭툭 털었다. “돈을 받았으니, 사독은 이제 아르마칸의 것이군요. 당신이 진행위원이니 머리를 써보도록 하세요.”

그는 유치장 문을 열고 머리를 디밀었다.

사독, 나와라.”

 

그러자 그 안에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구인류 치고는 보기 드물게 잘생긴 젊은이였다. 큰 키를 비롯해 훌륭하게 다져진 몸이 돋보였다. 피부는 갈색이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그가 눈을 찡그렸다. 젊은 나이에 변경 수호의 임무를 맡았으며 유글레이의 소지자가 된 놀라운 인물이기도 했다.

경기 날짜와 시간이 잡혔어, 사독.” 집행위원은 문가에 팔꿈치를 기대고 기분 좋게 말했다. “오늘 오후 5시야. 하지만 그 전에 인터뷰가 있으니…… 그 꼬락서니부터 좀 어떻게 해야겠는데.”

…… 그건 어제 제압을 하던 중에 사고가 있어서.” 간수 하나가 쩔쩔매면서 말했다.

신 콜로세움의 간수들이 예의가 없기는 하지만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검투사들이나 변경에서 잡혀오는 포로들에게 손찌검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사독이 입은 몇몇 상처는 그를 잡으려던 사냥꾼들과 싸우다가 생긴 것이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그들은 신 콜로세움의 총 책임자가 주문한 것을 모두 마쳤다. 그 다음은 경기방송에 나갈 인터뷰 영상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사독은 스튜디오로 이송되었다. 포스트 갤럭시 방송사의 기자들이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까지 이제 50분이 채 남아있지 않았다. 중계위원회에서 서두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벌써부터 귀족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개막식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포스트 갤럭시 방송사에서 왔습니다.”

인터뷰를 위한 자리로 이송된 자리에서 마이크를 든 캐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능숙한 서은하 방언을 사용했다.

사독 장군 되시지요?”

그렇습니다.”

몇 시간 후면 그라운드에 설 텐데 기분이 어떠세요? 신 콜로세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많이들 긴장한다고 하던데, 긴장되세요?”

캐스터는 마이크를 내밀고 사독의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그가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자 유려한 솜씨로 화제를 돌렸다.

아르마칸이 당신의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을 주문했는데, 저희가 거절 했습니다. 우리 쪽 사정이라는 것도 있거든요. 이것은 아르마칸도 동의했습니다. 최소한의 방송 분량을 뽑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동은하의 귀족 분들도 많이 오십니다. 아무쪼록 좋은 경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사독이 불쑥 물었다.

?” 캐스터가 그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13 55일입니다만.”

그리고…… 이 방송은 외우주 전체로 나갑니까?”

, 오늘 경기는 생방송으로 454번 채널에서 편집 없이 나갑니다. 특별히 시간제한도 없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 당신은 내우주 사람이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서 당신이 죽을 때까지 방송이 계속됩니다. 이런 방송에 나오신 것은 처음이겠지만 너무 낙심 마시고요. 간혹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니까요. 그렇기에 더욱 신 콜로세움 토너먼트가 유명한 것이니까요.”

캐스터는 밝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사독 장군 또한 그렇게 놀라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인가요? 평생.”

당신이 죽인 상대 검투사들의 이름과 함께……” 캐스터가 말했다. “그런데 날짜를 물으신 건 왜인가요?”

“……오늘이 예정일이거든요.” 그리고 이 질문에서 사독이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얼굴에 비쳤다.

그 말에 캐스터는 놀라운 표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우주의 어떤 곳에서는 아직도 결혼과 출산이 합법적인 나라가 있다지요? 당신의 반려, 아니, 아내는캐스터가 자꾸 말실수를 하자 방송국의 사람들이 놀랄만한 속도로 단어를 고쳐주었다어떤 사람입니까?”

군인입니다.”

더 없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 그것 참 재미있고 이상하네요. 현재 제 반려자는 남자여자 합쳐서 네 명이나 되는데 말이에요. 물론 같이 살았다가 헤어진 사람들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것보다 더 많지만요.”

캐스터는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깔깔 웃었다. 하지만 뒤에서 웃지 말라고 손짓발짓을 하자 얼른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내우주는 행정시스템과 사회구조가 외우주와 많이 달랐다. 이것은 언제나 시청률을 뽑기에 좋은 소재가 되었기 때문에 캐스터는 다양한 것들을 물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서는 캐스터가 마지막 말을 요청했다. 사독은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내우주 방언으로 딱 한마디를 더 했다.

경기 진행자들이 사독을 데리고 나간 후 캐스터는 편집자를 시켜서 사독의 마지막 말을 지우라고 했다.

 

사독은 유글레이를 인계 받고 다른 검투사들과 이송될 때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냥꾼들에게 붙잡힐 당시의 옷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검투사들 및 싸울아비들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어이, 형씨. 장군이요?” 피부가 검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은 우람한 키의 한 남자가 물었다.

사독은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사독이지? 당신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 오늘은 신 콜로세움 관계자들이 당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라던데. 우리야 평소와 같은 떨거지 역할이지만……”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다른 노인이 말했다. 사독의 경기는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그 전까지는 다른 검투사들이 겨루며 흥을 돋우게 되어있었다.

처음에 말을 걸었던 검은 피부의 남자는 사독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찐득한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잔이었다.

마셔요. 안 그러면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 테니까.”

뭡니까?” 사독이 물었다.

내우주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안 돼.”

늙은이는 좀 입 닥치시오.”

글쎄, 안 먹을걸. 저 치들은 사람을 안 먹어. 법으로 먹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러자 피부 검은 남자가 들고 있는 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무엇인지 알아챈 사독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전쟁포로입니다. , 우리 고향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이라면 마실 겁니다. 음식까지는 들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사독은 천천히 잔을 받았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입을 댔지만 결국 절반 밖에 마시지 못했다. 그걸 보고 노인이 킬킬 웃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다. 높은 곳에 있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지하에까지 들리고 있었다.

젊은이, 깔끔하게 죽는 법을 알려줄까?” 여전히 유글레이를 품에 안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독에게 노인이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인거인들한테는 죽지 말게. 그 놈들은 쓰러뜨린 상대방을 잡아먹거든. 산채로.”

간수들이 사독을 불렀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내 마지막 조언이네. 자네는 검투사 출신이 아니라 나오는 상대를 다 이기더라도 살 수 없을 거야. 외우주의 귀족들이 서은하를 얼마나 가지고 싶어했나. 그런데 자네 때문에 여러 번 고배를 마셔야 했지. 그러니 이 축제는 그들을 위한 거야. 정 고통스럽다면 자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세.”

그러나 사독은 고개를 저었다.

난 자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귀족들은 내은하의 주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보게 될 겁니다.”

고생을 사서 하는 놈이었군. 바보 같으니……”

 

신 콜로세움. 우주의 무법지대에 건설된 함선으로, 옛 지구 시대의 유물인 콜로세움의 이름을 딴 곳이었다. 용도는 같았다. 동은하의 귀족들이 콜로세움의 부활을 외쳤을 때, 의회는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시간을 쏟아 부어 건설된 말 그대로 살육만을 위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검투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서은하의 변경에서 나포된 배의 장군이 이 곳에 포로로 끌려왔고, 신 콜로세움의 귀족들은 그가 죽는 장면을 보려고 모인 것이었다.

사독 장군은 먹먹한 함성 소리를 들으며 웅크리고 앉아있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그는 돔으로 천장이 덮여있고, 바닥은 매끄러운 금속으로 도배되어있는 그라운드 중앙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관중들은 수마어로, 그리고 간혹 만투어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사독은 수마어를 할 줄 몰랐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피와 죽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독은 처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신 콜로세움의 경기장이 너무 넓었고 그리고 조명이 지나치게 강했던 것이다. 그는 유글레이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쏟아지는 조명을 가렸다.

맞은편에서는 자신의 첫 상대가 서 있었다. 혼혈거인 랭. 동은하의 귀족들이 사독의 첫 상대로 고른 검투사가 으르렁거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몸집은 야만적으로 컸지만, 보폭은 가벼워 보였다.

사독은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사독이 움직이지 않자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문이 닫히지 직전 간수가 경기장 중앙으로 가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었을 때도 그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사독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가 서 있는 벽의 바로 윗부분에 앉은 어떤 귀족이 내은하의 개들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었을 때였다.

,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오늘 신 콜로세움의 특별 손님은 내우주의 사독 장군입니다…… 마르차카식 일검술을 사용하는…… 그는 유글레이의 서른 네 번째 주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드디어, 그가 유글레이의 적합한 주인인지 확인할 수 있는…… 그가 상대해야 할 첫 상대는 최근 그 기량을 아낌없이 선보이고 있는……”

만투어로 해선을 하는 해설자의 목소리가 돔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사독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경기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랭이 포효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사독은 경기장 바닥이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중들의 함성이 커졌다. 징 박힌 장갑을 낀 주먹이 사독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독은 자신을 잡으려는 랭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유글레이가 창백하게 번뜩였다. 다음 순간, 둔탁할 소리를 내며 어깨 위에서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관중석에 앉은 귀족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방금 죽은 혼혈거인은 3부 리그에서도 제법 이름을 떨치는 검투사였는데, 사독과 맞붙는 순간에 목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의 해설자마저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급히 마르차카 해설집을 뒤적이며 덧붙였다.

“아, …… 보셨습니까 여러분. 저것은 마르차카 2식 천수라는 기술인데, 놀랍군요. 랭이 죽었네요…… 랭한테 돈을 거신 분들은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오늘의 쇼는 손님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니까요.”

이곳은 신 콜로세움이었기 때문에 시합이 끝날 때까지 시체를 내가는 사람은 없었다.

사독은 자신이 잘라낸 검투사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무인 중계기를 보았다. 전광판의 화면에는 사독의 얼굴이 나왔다. 해설자는 그러나 여전히 유쾌한 어조로 다음 상대를 소개했다.

두 번째로 나온 검투사는 랭보다 훨씬 침착했다. 사독은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만투어 실력을 총동원해서 해설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애를 썼다. 만약 자신이 맞게 이해했다면 이번 상대는 미다급의 검투사였고, 이름은 아랑카였다.

아랑카의 체격은 사독과 비슷했다. 사용하는 무기도 길이가 비슷한 검이었다. 긴 머리채를 높이 올려서 묶고 있었는데, 가까이 오자 사독은 아랑카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독은 상대방이 마르차카에 대한 것을 알아내려고 시간을 끄는 것을 알았다. 반면 그는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자라고는 해도 신 콜로세움 출신의 강화병들은 육체강도가 내우주의 주민들과 비교가 안 되었다.

, 나왔습니다. 마르차카 1식 무기파괴!” 해설자가 소리쳤다.

사독은 기술이 들어가는 순간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랑카의 검이 산산조각 났다. 확실이 3부 리그 검투사들의 무기는 그렇게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유글레이는 대전쟁 시절의 유물이었다. 유글레이의 강도를 이겨내려면 최소한 그것과 동급의 제조자가 만든 무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는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랑카가 든 검의 칼자루가 부서지는 순간 자유로운 왼손으로 그녀의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다음 바로 죽였다.

세 번째로는 그물과 창을 든 검투사가 나왔다. 인간이었다. 이번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상당한 난전이 펼쳐졌고, 사독도 자잘한 상처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 검투사도 사독의 발 앞에 머리를 떨구어야 했다.

마르차카의 대처법이 아무리 외우주에 알려져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실력이 상당하군. 상성에서 유리하다지만 저 정도면 진짜 거인도 잡겠는데?” 고돔의 부사수 롯이 오만에게 말했다. “사독 장군은 랭커전에 들지 못하는 싸울아비로 알고 있었는데……”

무기 성능이 좋은 것도 있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1리그의 검투사들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 점에 있어서 저 장군은 운이 좋았군. 유글레이는 몰락한 기계문명의 유물이다. 특별한 장치는 없지만 강도 하나만큼은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어. 공방 아아의 장인들조차도 그 옛날의 무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복원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어차피 돼지 목의 진주지. 아르마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움직임은 나쁘지 않습니다……” 아르마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잘 봐두어라.”

소년은 아르마칸을 한번 보았고, 다시 사독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는 다시 혼혈거인이었다. 사독은 네 번째 검투사가 나오는 동안 죽은 검투사의 옷을 찢어서 오른손에 감았다. 흰 천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어깨와 옆구리도 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사독은 혼혈거인의 키를 가늠해 보았다. 첫 번째 놈보다 좀 더 컸다. 어림잡아도 2m 60cm은 넘었다. 평균적인 거인들보다는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해설자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그냥 거인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신장이었다. 혼혈거인의 손에는 양날도끼가 들려 있었다.

, 여러분! 드디어 야삼나가 나왔군요…... 야삼나 하면 도끼죠. 사독이 이제는 상당히 지쳐 보입니다만, 과연 그가 내우주 장군의 목을 가져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는 땅을 박찼다. 쇳소리를 내며 도끼자루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사독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유글레이가 호선을 그렸다. 핏방울이 튀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사독은 유글레이와 도끼날이 부딪히는 순간 검이 그 공격을 견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우였다. 야삼나가 도끼를 어찌나 무섭게 휘둘렀던지 사독은 팔이 부러지는 줄 알았지만, 유글레이는 그 모든 공격을 견뎌냈다.

서른 합 정도 마주했을까, 야삼나의 도끼날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야삼나도 놀랐지만 사독도 놀랐다. 그는 유글레이가 그의 생각보다 훌륭한 무기라는 사실에 감탄했다. 발이 엇갈렸다가 떨어졌고, 사독의 왼손 검지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야삼나는 그 대가로 슬개골과 무릎 인대를 내어주어야 했다.

사독은 부러진 이빨을 뱉어내고 몸을 구부렸다. 이 녀석은, 빠르긴 했지만 공격이 단조로웠다.아마 한번 정도 더 붙으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목을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독이 잠깐 방심을 한 사이에 옆구리에 야삼나의 주먹을 꽂혔다. 그와 동시에 한쪽 도끼날이 깨졌다. 사독은 유글레이를 놓치고 넘어져 뒹굴었다. 야삼나도 도끼를 떨어뜨렸다.

, 야삼나의 도끼날이 부러졌지만 사독, 쓰러졌습니다. 두 시간이 넘게 계속된 싸움 끝에 처음으로 등이 바닥에 닿습니다. 유전자변이율이 거의 없는 내우주의 주민치고 이 정도면 신 콜로세움에서 굉장히 오래 버틴 셈이지요……”

사독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야삼나가 그를 밟으려고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굴려서 빼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때 폐부 쪽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갈빗대가 두서너 개는 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유글레이를 주웠지만 팔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기침을 억누르며 부러진 도끼를 비스듬히 쳐냈다.

신장이 3미터에 가까운 거인을 잡으려면 발돋움이 필요했다. 아니면 잽싸게 품 안으로 파고들어 목이나 다리를 치고 빠져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너무나 지쳐 있어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머리 속을 뒤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더라…… 원래 마르차카 식은 대인전용 기술이지 거인전을 생각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거인이 쉽게 목을 내주었던 것은 그가 사독을 얕잡아보고 있었고, 주먹을 사용했던 이유도 있었다. 인간을 얕잡아보고 찢어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거인들의 특성이 거꾸로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야삼나는 부러진 도끼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르던 피가 눈으로 들어갔다. 사독은 옷소매로 그것을 훔쳤다.

그리고 그는 야삼나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쳤으며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야삼나가 반원을 그리며 걷자 사독도 원을 그리며 걸었다. 놈이 눈에 띄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는 유글레이의 칼자루에 입을 맞추었다.

쾅 소리가 나며 도끼가 바닥을 찍는 순간 사독이 도끼자루를 밟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유글레이가 야삼나의 허벅지를 깊게 찔렀다.

으르렁거리는 고함소리, 쇠붙이가 마찰하며 지르는 비명, 피로 붉게 물든 경기장, 그리고 근육이 잘게 떨며 토해내는 긴장감. 두 사람은 한번 붙었다가 다시 떨어졌고, 세 번째로 부딪혔을 때 사독이 심혈을 기울여 쏟아낸 마르차카 제 4식이 빗나갔다. 원래 4식은 대부분 명중률이 낮은 편이지만 이번에는 잘려나간 왼손 검지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때 야삼나가 발을 헛디뎠다. 죽은 다른 검투사의 시체에 걸린 것이다. 사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저런……. 야삼나가…….”

해설자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독이 마침내 유글레이로 야삼나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관중들은 사독이 또 이기자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사독이 쓰러진 야삼나에게 허리를 숙였고, 머리를 잘라냈다. 그는 피로 물들어 질척해진 머리카락을 잡은 채 그 머리통을 관중석 쪽으로 던졌다. 퍼붓던 야유가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그때 관중석에서 탕 하는 총열음 소리가 났다. 사독이 넘어졌다. 그는 유글레이를 손에서 놓치지 않았지만, 허벅지를 꾹 눌렀다. 총을 쏜 사람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고만 있던 아르마칸이었다.

사독은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유글레이를 쥔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황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꾸 눈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고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찾는 것을 발견하고 웃었다.

신 콜로세움에 끌려왔던 포로들 중에서 그처럼 아무런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경기를 보러 왔던 동은하의 귀족들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사독은 전투 장면을 가까이서 찍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는 무인 중계기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제는 두 팔까지 벌리고 웃고 있었다.

이윽고 관중석에 앉은 귀족들이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신 콜로세움의 진행자들은 다음에 내보내려던 또 다른 3부 리그의 검투사를 불러들이고, 당장 시간이 되는 2부 리그의 검투사를 내보내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처음부터 2부 리그의 검투사를 내보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가 약간 지연이 되었다.

다섯 번째 상대가 결정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사독은 앞의 네 검투사들이 차례로 나왔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입구는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 상태로 열려있기만 했다. 관중석에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때 프로그램의 변동 사항을 전해들은 해설자가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이 결정되었습니다. 오늘의 깜짝 쇼입니다. , 나와주세요!”

전광판의 화면은 여전히 관중석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때 피부색이 조금 짙은 한 소년이 관중석의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해 졌던 군중들은 그것을 보고 다시 미친 듯이 환호했다. 소년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아르마칸이 무언가 말하며 소년의 어깨를 밀었다.

그 소년은 키가 크기는 하지만 아직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게 많이 쳐줘도 15살에서 16살 정도로 보였다.

신 콜로세움에서는 정해진 투사가 아니라 관중석에서 일종의 게스트처럼 다음 상대가 정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어디 보자, 저도 자료를 지금 받고 있어서요. , 그렇군요! 사다 출신의 소년이군요. 이름은아직 출력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15살이라고 합니다! 후견인은 아르마칸! , 아르마칸도 저기 보이는군요. 얼마 전에 발타이의 붉은거인들과 전쟁을 치르다가 팔이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다 나았나 봅니다. 만약 아르마칸이 대신 나와서 이 경기를 치렀어도 볼 만했을 텐데요.”

소년은 어색해 하는 것이 한 눈에 봐도 역력했다. 그러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관중석에서 내려와 경기장으로 뛰어내렸다.

사독은 숨을 몰아쉬며 그 소년을 보았다.

 

그런데 소년은 빈 손이었다. 사독은 몇 걸음 걸어가서 죽은 아랑카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집어 든 다음 그것을 소년에게 던져주었다. 그 광경을 보고 관중들은 비웃음을 쏟아냈다.

싸움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년은 이런 식의 싸움이 처음인 것 같았다.

사독은 한번 웃더니 소년에게 무언가 물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자 만투어로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지? 이름이 뭐라고? 아르마칸?” 사독의 만투어는 억양이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르마칸은 후견인입니다. 내 이름은 아셀라스인데…… 보통 아셀이라고들 불러요. 나이는 15살입니다.”

경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셀라스는 검을 들고서 서 있기만 했다. 아셀라스는 바닥을 뚫어져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마지막입니다.” 아셀라스가 상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 그래? 네가 마지막인가?” 사독이 대답했다. “잘 됐군. 슬슬 서있기도 힘들었거든.”

그는 숨이 차서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야유소리가 더 커졌지만 아셀라스는 그 소란을 무시해버렸다.

이윽고 사독이 유글레이를 들면서 말했다.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막지 말고 쳐내던가 흘려 보내야 해. 마르차카식이라서 어설프게 막으면 죽어. 맞찌르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원래 유글레이는 마르차카식에 특화되어 있는 검이거든.”

사독이 검을 들어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싸움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번 엇갈리는가 싶더니 사독이 무릎을 꺾고 넘어졌다. 그는 엎드려 있다가 괴로운 듯 가슴이 위쪽으로 가게 천천히 몸을 굴렸다.

사독의 마지막 공격은 평범한 내지르기였지만, 빠르고 묵직할 뿐만이 아니라 변동 폭이 컸다. 아셀라스는 그 공격은 성공적으로 흘렸지만, 그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관중들은 물론이고 해설자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끼리 부딪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아랑카의 칼자루에 금이 갔고 사독은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셀라스는 사독이 떨어뜨린 유글레이를 주웠다. 사독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셀라스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로 사독에게 걸어갔다. 잠시 후, 유글레이는 조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주인의 빗장뼈 사이를 찔렀다. 사독은 곧 숨을 거두었다.

3부 리그 검투사들을 상대로 상당히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던 것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러나 동은하의 귀족들은 함성을 질렀다.

아셀라스는 붉게 번뜩이는 유글레이를 몇 번 뒤집어보고, 시체 처리반이 나오자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칼날에 묻은 피를 남김없이 닦았다.

마지막 공격은 조금 위험했더구나. 그건 마르차카 4식 중에서도 일격기에 해당하는 건데, 잘 대처했다.” 아르마칸이 말했다.

아셀라스는 말없이 유글레이를 내밀었다. 검신이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아르마칸은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는 검을 아셀라스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네 거야.”

저 사독이라는 사람 이상해요, 아르마칸.”

? 내우주의 사람들은 다 그래. 마음에 둘 것 없어.”

그런데 싸움이 끝날 때마다 왜 자꾸 중계기를 봤던 걸까요?”

잘난 귀족들을 비웃어 주려는 것이겠지.” 아르마칸은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셀라스는 죽은 사독을 내가는 시체 처리반을 보면서 그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독이 중계기를 볼 때마다 지었던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화면 너머의 누군가를, 혹은 그리운 사람을 보듯 환하게 웃었던 것이다. 순간 아셀라스는 가슴이 저몄다. 그런 웃음을 언제 보았더라, 하고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아셀라스는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폐막식을 알리는 춤꾼과 광대들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는 이제 끝났으니 자신과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르마칸을 쫓아서 관중석에서 발걸음을 옮겼다.